사무장 병원이라는 게 있다.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이 만든 병원이다. 현행법상 불법이다. 의료기관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또는 조산사만 개설할 수 있다. 박카스·감기약·해열제·소화제는 약국이 아니면 살 수 없다. 약사만 팔 수 있게 돼 있다. 의료·의약산업에는 유난히 규제가 많다. 국민의 건강과 직접 관계가 있는 만큼 당연한 규제 같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불편하게 하거나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과도한 규제는 또 두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사무장 병원은 사실 규제가 아니면 문제될 게 거의 없다. 일반 의약품의 수퍼 판매가 좌절되자 대통령까지 언급하고 나섰다. 사무장 병원, 일반 의약품 논란을 계기로 의료·의약산업의 규제 문제를 짚어 봤다.기업형 사무장 병원이 덜미를 잡혔다. 검찰은 5월 18일 기업형 사무장 병원을 운영하면서 리베이트를 챙긴 A의료법인 대표 홍모씨와 의료 전문 브로커 김모씨를 구속기소했다. 사무장 병원은 의료인(의료법인)이 아닌 사람이 개설한 의료기관이다.의사 명의를 빌려 운영하는 병원이다. 의료법에 따르면 병원은 아무나 만들 수 없다. 의료인(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 국가·지자체, 비영리 의료법인, 준정부기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지방의료원만 병원을 세울 수 있다. 비의료인이 개설한 사무장 병원은 그래서 불법이다.사무장 병원은 처벌된 적이 많다. 하지만 이번엔 기업형 사무장 병원이 적발됐다. A의료법인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A의료법인 대표이자 의사인 홍씨는 2007년 1월 병원을 설립했다. 그 후 의료 전문 브로커 김씨와 공모해 사무장 병원을 운영하기를 희망하는 비의료인을 모집했다.홍씨는 이런 비의료인들에게 의료법인 명의를 빌려주는 대가로 한 곳당 3000만원을 받았다. 매달 200만원을 관리비로 챙겼다. 브로커 김씨는 알선 수수료 명목으로 1억여원을 받았다. 이런 방식으로 홍씨는 전국에 33개의 사무장 병원을 세웠다. 수도권 등 대도시에 설립됐다. 검찰 관계자는 “네트워크 형태를 띤 기업형 사무장 병원을 적발한 것은 국내 최초”라며 “A의료법인 외 사무장 병원을 운영하는 업주에 대해 후속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檢, 기업형 사무장 병원 적발 정부도 사무장 병원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4월 29일부터 5월 26일까지 사무장 병원으로 의심되는 의료기관 99곳을 특별 점검했다. 이 가운데 12개 기관이 사무장 병원으로 밝혀졌다. 조사 대상의 12% 비중이다. 사무장 병원은 각종 폐해를 양산한다. 의료비 허위·부당청구 등 불법 의료행위가 자주 발생한다. 이런 식이다. 환자를 진료한 것처럼 속여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에 의료비를 허위 청구한다.환자가 내는 본인부담금을 과다 징수하는 경우도 있다. <※ 여기서 말하는 의료비는 보험(요양)급여비용이다.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는 진찰료와 처방료를 낸다. 이 중 환자가 내는 비용을 본인부담금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건보에서 의료기관에 지급하는데, 이것이 보험급여비용이다.>합법적 의료기관 중에서도 의료비를 허위·부당 청구하는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무장 병원이 더 심각해 보인다. 복지부의 의료기관 99곳 점검 결과에 따르면 사무장 병원의 의료비 허위·부당청구 금액은 조사기관 평균보다 1.5배 많았다. 정부가 사무장 병원을 뿌리 뽑기 위해 각종 대책을 내놓는 이유다. 건보는 사무장 병원으로 확인되면 그동안 지급한 보험급여비용 전액을 환수할 방침이다. 국세청은 ‘사파라치’ 제도를 도입했다. 사무장 병원을 신고한 사람에겐 포상금 100만원이 지급된다.그러나 이런 대책이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사무장 병원은 내부고발(자진신고)이 아니면 적발하기 어렵다. 검찰 관계자는 “사무장과 의사가 입을 맞추면 법망을 쉽게 피할 수 있다”며 내부고발이 유일한 단속 해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현재로선 사무장 병원에 고용된 의료인이 내부고발을 하고 싶어도 그러기 어렵다. 내부고발을 해도 똑같은 처벌을 받아서다.
|
사무장 병원으로 적발되면 사무장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의 벌금형을 받는다. 사무장 병원에 고용된 의사도 처벌된다. 의사 자격이 3개월 정지된다. 3개월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형도 받는다. 사무장 병원인지 모르고 취업했든 내부고발을 했든 면죄부는 없다. 여기 자신을 고용했던 사무장 병원을 내부고발했다가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 인천시 계양구에서 노인병원을 운영하는 대한의사협회 불법진료대책특위 오성일(49) 위원(서울실버병원 원장)이다.국내 명문대 의대를 졸업한 오 위원은 활동적인 의사였다. 대한임상암예방학회 기획이사, 대한노인의학회 기획이사, 대한의사협회 사이버 홍보팀장 등 그가 맡은 직책은 수없이 많다. 오 위원의 운명이 틀어진 건 2006년 11월부터다. 경기도 수원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그는 의대 선배의 소개로 M의료법인 일산실버병원 원장에 취임했다. 사무장 병원인지는 몰랐다. 소개한 사람이 의대 선배였고, 전임 원장도 평소 친했던 의사였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M의료법인이 사무장 병원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 그가 원장에 취임한 지 4개월여 지났을 때다. 오 위원은 곧장 ‘원장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M의료법인 대표에게 전했다.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내용증명까지 보냈다. 대표는 정작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 위원은 “일산실버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들을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일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2007년 11월 참다 못한 오 위원은 대한의사협회 불법신고센터에 ‘M의료법인 일산병원은 사무장 병원’이라고 자진 신고했다. 내부고발이었다. 그는 “의도하지 않게 법을 어겼지만 자진 신고했기 때문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법은 오 위원의 편이 아니었다. 오 위원의 신고 덕에 M의료법인이 사무장 병원으로 적발됐지만 그 역시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300만원 벌금형에 자격정지처분을 받았다. 오 위원은 또 M의료법인에 근무할 때 건보에서 지급된 보험급여비용을 다시 내놔야 한다. 20억원이 넘는다.오 위원이 보험급여비용을 토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사무장 병원이 불법이기 때문에 오 위원도 불법진료를 한 셈이다. 건보는 이런 경우 의료기관에 지급한 보험급여비용을 환수 조치한다. 언뜻 생각하기엔 M의료법인의 대표가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건강보험법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사무장 병원의 대표(사무장)는 보험급여비용을 내놓을 주체가 아니다.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험급여비용 환수 주체는 오 위원이 맞다.민주당 주승용(보건복지위) 의원은 “죄질이 더욱 불량한 사무장 대신 고용된 의사만 보험급여비용과 관련, 처벌을 받고 있어 사무장 병원이 근절되지 않는 것”이라며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사무장에게도 금전적 처벌을 부과하도록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오 위원은 최근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의사면허 자격정지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병원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사무장 병원 때문에 받은 금전적·심리적 충격이 크다”며 말을 이었다. “정부 대책으론 사무장 병원을 근절할 수 없다. 내부고발을 유도해야 하는데, 어려울 것이다. 의사가 나처럼 자진 신고하면 돈을 물어야 하는데 누가 고발을 하겠나.”규제 풀어야 사무장 병원 근절 가능사무장 병원을 근절하기란 쉽지 않다. 보험급여 전액 환수, 사파라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사무장 병원을 없앨 방법은 없을까. 해답을 찾으려면 사무장 병원이 왜 등장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고영선 KDI 연구본부장은 “잠재적 의료 서비스 공급자와 자본의 진입이 막혀 있기 때문에 국내 의료시장이 왜곡됐다”며 “이 틈을 타 사무장 병원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국내 의료시장의 진입 문턱은 높다. 의료 서비스 공급자 측면에서 보면 자본력이 충분해도 비의료인이면 병원 개설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싶은 ‘돈 있는’ 비의료인은 불법을 감수하고 사무장 병원을 설립하는 것이다.‘비의료인 병원 개설 금지’ 규제를 풀면 어떨까. 경쟁력 있는 사람이 ‘사무장’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 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고영선 연구본부장은 “현행 의료법상 사무장 병원에 근무하는 종사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며 “사무장 병원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깐깐한 관리시스템을 도입해 이들을 점검하면 알찬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 이 대목에선 사무장 병원을 다시 짚어 봐야 한다. 모든 사무장 병원이 불법 의료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복지부 점검 결과를 보면 사무장 병원으로 확인된 12곳 중 9곳에서 의료비 부당·허위청구가 있었다. 나머지 3곳은 사무장 병원으로 밝혀졌지만 의료행위는 건전했다.>
‘비의료인 병원 개설 금지’ 규제를 풀자는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의사는 반기를 든다.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료시장에 비의료인을 끌어들이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된다”고 지적했다. 의료기관은 오직 의료인만이 개설·운영해야 한다는 논리다.여기에선 또 다른 반론이 나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철행 기업정책팀장은 “이분법적인 시각”이라며 “오너가 경영하면 회사가 잘 돌아가고, 전문경영인이 맡으면 기업이 망한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라고 주장했다.실제로 비의료인 병원 개설 금지는 선진국에선 찾기 어려운 규제다. 오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수십 년 동안 공부만 한 의사가 무슨 경영을 하겠는가. 경영과 진료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비의료인에게도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이에 대해 경만호 회장은 “비의료인이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다시 강조한 뒤 “굳이 운영하고 싶다면 비영리 의료법인을 통해 투자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경 회장은 또 “영리병원 개설이 허용되면 비의료인에게도 기회가 많겠지만 아직 결정된 게 없다”며 “의료법상 비의료인이 병원을 운영하고 싶다면 선의의 투자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국내 의료법은 영리병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영리법인만 병원을 개설할 수 있다. 의료시장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진입 규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의료시장에 진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투자수익을 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의료기관은 비영리법인이기 때문에 주주를 모을 수도, 채권을 발행해 투자금을 모을 수도 없다. 의료기관 설립에 관심 있는 영리법인은 차라리 ‘돈 되는’ 사무장 병원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병원 경쟁해야 의료 서비스 개선영리법인의 병원 개설을 규제하는 국가는 네덜란드 외에는 찾기 어렵다. 일본 의료법인 중 95% 이상은 지분이 인정된다. 독일과 미국의 영리병원 비율은 각각 30%, 17%에 달한다. 영리병원의 수익성은 입증된 지 오래다. 싱가포르의 영리병원 래플스 메디컬은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도 지난해 2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순이익(세후)은 400억원이 넘었다. 인도 아폴로 병원은 상장을 발판으로 성장했다. 1984년 개원한 이 병원은 현재 53개 지점을 거느린 초대형 영리병원으로 거듭났다.사무장 병원이 등장한 건 높은 진입 규제 때문이다. 돈 있는 비의료인과 영리법인이 의료기관을 합법적으로 개설할 수 있다면 사무장 병원은 사라진다. 사무장 병원의 존폐를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의료시장의 진입 규제를 하루 빨리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의료시장에 투자가 이뤄져야 의료 서비스의 질이 개선된다는 이유다. 이철행 팀장은 “비의료인의 의료기관 개설 금지, 영리의료법인 금지 등 진입장벽을 낮춰 의료시장에 민간 투자금이 유입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러면 의료 서비스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글로벌 의료시대가 열린다. 자국의 의료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환자가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찾아 국경을 넘는 시대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 앤 컴퍼니는 “의료관광산업의 시장 규모가 2012년이면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료산업이 황금어장으로 떠오르는 것이다.아쉽게도 한국은 이 어장에서 밀려나 있다. 불필요한 규제에 묶여 있는 의료산업은 성장이 더디다. 국내 환자는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 받지 못하고, 외국인 환자는 한국 의료관광을 머뭇거린다. 지난해 한국은 외국인 환자 8만1789명을 유치했다. 많은 수 같지만 그렇지 않다. 태국 156만 명, 인도 73만 명, 싱가포르 72만 명과 비교조차 안 된다. 이러다간 국내 환자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찾아 해외에 나갈 판이다.지금이야말로 의료산업을 둘러싼 규제를 조정해야 할 때다. 의료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라면 과감히 풀어야 한다. 의료인의 질을 높이고 무자격 의료시술을 막는 규제라면 강화해야 한다. 이게 한국 의료산업을 성장시키는 지름길이다.■ 지지부진한 의료 규제 개혁영리병원 허용 두고 4년째 갑론을박의료산업을 키우려면 규제개혁이 필수적이다. 해외 각국은 의료산업 성장을 위해 각종 규제를 풀고 투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비의료인에게 의료기관 개설을 허용하는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의사들의 반발을 의식해서다. 만약 비의료인 병원 개설 금지 규제를 푼다면 일반 의약품의 수퍼 판매를 저지한 대한약사회 사건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의사들의 밥그릇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2008년부터 진행된 영리병원 허용 문제는 여전히 진통 중이다. 정부가 영리병원의 명칭을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으로 바꾸고,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서만 추진하겠다고 물러섰음에도 달라진 건 없다. 영리병원 문제는 6월 임시국회에서 재논의된다.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