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엔 하루 종일 회사가 술렁였다. 희망퇴직 신청 때 특별퇴직금 명목으로 최대 60개월치 급여를 지급하겠다는 공고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이 참에 크게 땅겨보자”고 농담을 했다. 노조는 반발했다. 협의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처사라는 것이다. 당장 파업 이야기가 나왔다. 노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내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었다. 한국씨티은행이 미국 회사라 보니 문서 상당수를 영어로 만든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회사를 떠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다.은행이 제안한 희망퇴직 신청 자격은 공고일 기준 근속기간이 만 5년 이상인 정규 직원과 무기 전담직원이다. 내부에선 희망퇴직자 대상자로 1965년생 1·2급 부장, 3급 부부장, 1969년생 4급 차장, 1973년생 행원으로 기준을 정했다는 말도 돌았다. 해당 사안을 보고 망설임 없이 퇴직을 신청했다.나는 40대 초반이다. 한미은행 출신인데, 2004년 씨티은행과 한미은행이 합병하며 만들어진 한국씨티은행에서 일해왔다. 씨티은행원이란 이름표를 달고 일한 지 올해로 10년이다. 이곳의 연봉이나 처우는 시중은행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가진 앞서가는 은행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한국씨티은행은 선진 금융 시스템을 도입하며 시장을 주도해온 기업이다. 1989년 국내 최초로 개인재무관리(PrivateBanking)를 도입해 1:1 자산관리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1년에는 VIP 자산관리 프로그램인 씨티골드 서비스를 시작했다. 역시 고액자산가를 위한 한국 최초의 전문 서비스다. 먼저 시작한 덕에 국내 금융회사의 팀장급 PB 상당수가 씨티은행 출신이다. 사실상 업계 사관학교다. 1990년 한국 최초로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도입해 365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3년 직불카드와 폰뱅킹 도입 등도 국내 은행보다 한발 앞섰다. 최근엔스마트폰을 활용한 스마트뱅킹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변화를 주도하며 시장을 이끌어갈 역량이 있는 조직이었다.
인재 몰리고 선진 서비스 주도했지만…퇴직은 지난해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다. 미래가 없는 조직이라는 생각에서다. 2012년 한국씨티은행은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았다. 고민했지만 머물기로 했다. 금융권 상황이 워낙 흉흉해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희망이 있었다. 회사가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도 사라졌다. 내 생각이 틀렸던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10년 간 한국씨티은행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이번 구조조정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지난해 회사는 무려 29개나 되는 지점을 폐쇄했다. 그 결과 2012년 하반기만 해도 219개였던 점포수가 2014년 3월 190개로 줄었다. 시중은행에 비해 적은 점포수는 지난 수 년 간 한국씨티은행의 약점으로 꼽혀왔던 점이다. 이런 와중에 오히려 지점을 줄이고 나선것이다. 지난해 벌인 지점 정리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점포들을 통폐합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포항지점을 없애고울산지점에서 고객을 관리하게 했다. 경기도에선 파주지점을 없애고 일산중앙지점으로 통폐합했고, 하남지점 문을 닫고 다소 거리가 있지만 고객들을 명일동지점에서 관리하는 수준이었다. 이 과정에서 지점 직원들의 불만이 커졌다. 현장 직원들은 고객을 찾아 다니며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 기존 고객을 한 명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본사에선 지점 폐쇄 공문 이외에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현장에서 “회사에서 너무 무관심 한 것 아닌가”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지점 폐쇄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2014년 5월 9일부터 6월 20일 사이에 56개의 지점이 사라졌다. 광주를 제외한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한국씨티은행 지점이 모두 사라졌다. 전주·순천·춘천지점 등이 일시에 사라졌다. 전주시에 거주하는 한국씨티은행 고객들의 관리를 맡은 곳은 대전지점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강원도 춘천지점의 고객을 경기도 구리지점이 맡았다. 2년에 걸친 조직 정비를 통해 경쟁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 고객들을 포기한 것이란 비판이 나온 이유다. 2014년 8월 현재 한국씨티은행에는 134개 지점만 남았다. 1998년 경기은행을 인수하기 직전 한미은행 시절 점포수(128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더구나 이번에 문을 닫은 지점 상당수가 다수의 우량 고객을 보유한 흑자 지점이었다. 조직의 일원으로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다.정리 당하는 입장에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흑자 지점이 문을 닫아야 하는가’ 지‘ 점 통폐합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 떤 기준으로 지점 정리를 단행했는가’. 경영진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 글로벌 본사의 지침을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심지어미국 본사에서 인원을 몇 명 이상 줄이면 현 경영진에게 보너스를 약속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임대료를 절감하거나 은행 소유 건물을 매각해 시세 차익을 남기려는 속셈이란 주장도 힘을얻었다. 씨티그룹 본사에서는 한국 내 사업 방향을 부유층 중심 영업으로 정했다고 한다. 부유층을 타깃으로 재편하기 위해 대도시 이외 지방 점포를 정리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신문을 보니 한미은행 시절부터 활용해온 서울 다동의 본점 건물을 매각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한국씨티은행이 본점 건물까지 내놔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했다.한국에서 왜 씨티가 이렇게 밀렸을까? 나는 현지화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문제가 있었고, 개선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시중은행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우리만 못했다. 사실 우리도 매출을 키우고 수익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문제는 매니지먼트였다. 조직의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제 발로 찾아온 기업 고객도 돌려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