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인맥이 금융 산업 이끈다.” 특정 대학이나 조직의 주장이 아니다. 금융회사 감독과 금융 소비자 보호 기관인 금융감독원이 공식블로그에 올렸던 내용이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은 공식블로그 ‘FunFun한 금조사역’과 동영상 전문 웹사이트 유튜브에 ‘우리나라 금융 산업을 이끄는 서강 금맥(금융인맥)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게재했다. 동영상은 서강대금융인회(서금회)와 서강포럼 등을 소개하며, 서강대 출신 금융인들이 우리나라 금융을 좌지우지한다는 취지의 문구를 자막처리 하기도 했다.
우리은행·대우증권 차기 CEO 선임 과정에 서금회 두각동영상이 문제가 되자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해당 동영상을 삭제했지만, 금융권에선 여전히 회자된다. 특히 이번 우리은행 차기 행장 선정 과정에서 그랬다. 11월 초 금융권에서 이순우 우리은행장의 연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실적이 나무랄데 없는데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은행을 위해 일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11월 중순 상황이 달라진다. 애초 명단에 없었던 이광구 우리은행 부행장이 차기 행장 후보 명단에 추가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광구 부행장이 ‘서금회’기 때문에 이순우 행장을 제치고 차기 행장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돈 것도 이 시점이다. “설마~” 하는 반응이 대세였다.그런데 연임이 유력하던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12월 1일 갑자기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이어 우리은행 행장후보추천위원회는 12월 2일 김승규 우리은행 부행장, 김양진 전 우리은행 수석부행장과 함께 이광구 부행장을 차기 행장 후보 숏리스트에 올린다. 행장후보추천위원회는 12월 5일 3차 회의를 열어 심층면접을 진행했다. 이광구 우리은행 부행장 내정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부터 일사천리로 선임 과정이 진행됐고, 결국 이광구 부행장이 차기 행장으로 낙점됐다. 이순우 행장의 돌연 연임 포기가 외압에 의한 것이었음이 확인된 셈이다.금융권 인사에서 서금회가 논란이 된 사건은 또 있다. 약 4개월 동안 공석이던 KDB대우증권 사장 선임 과정이다. 이사회가 두 차례 무산되는 끝에 11월 26일 KDB대우증권 사장 후보로 홍성국 KDB대우증권 부사장이 선출됐다. 홍 사장 후보는 12월 12일 임시주주총회를 거쳐 공식 취임할 예정이다.이광구 행장 내정자와 홍성국 사장 후보의 공통점은 서금회 주소록에 이름이 기재됐다는 점. 서금회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박근혜 대통령을 지원하는 서강대 출신 경제·금융인 모임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밀려 대선 후보에 오르지 못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은행·증권·보험·여신금융·자산운용·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서강대 출신 인물 300여명이 주소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학맥(學脈)이 금융권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이명박 정권의 못된 유산이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명박 대통령 시절엔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 KB·우리·하나금융지주 회장 자리를 휩쓸어 강만수 KDB산은금융지주 회장과 함께 이른바 ‘4대 천왕’으로 일컬어졌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려대 동기이며,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과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고려대 후배다. ‘고금회(고려대 출신의 금융인 모임)’ 혹은 ‘호금회(고려대 상징인 호랑이와 금융인의 조어)’가 회자된 배경이다. 4대 천왕의 등장과 함께 금융권 요직도 고려대 출신이 포진했다. 라응찬 전 회장 시절엔 고려대 출신이 한 명도 없었던 신한금융지주는 이명박 정권 들어 서진원 신한은행장, 소재광 신한금융지주 부사장 등을 중용했다. 신한은행도 부행장보 이상 12명의 임원 중 5명(위성호·이상호· 이원호·임영진·조용병)이 고려대 출신이었다.
MB 정부 땐 고려대 출신 ‘4대 천왕’ 나오기도2008년 고려대 출신 임원이 전무했던 KB금융지주도 마찬가지. 김왕기 당시 KB금융지주 부사장과 손영환 당시 KB부동산신탁 사장, 이찬근 당시 KB국민은행 부행장, 김형태 당시 KB국민은행 부행장이 모두 고려대를 나왔다. 이팔성 회장 취임 전 고려대 출신이 단 한 명(박성목 전 전무)이던 우리금융지주 역시 2008년 이후 최승남 당시 우리은행 부행장과 황성호 당시 우리투자증권 사장, 이병재 당시 우리파이낸셜 사장, 차문현 당시 우리자산운용 대표를 중용했다. 이밖에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신충식 전 NH농협은행장도 이명박 대통령 시절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을 겸직했다.이명박 대통령 전임인 고(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상고 출신이 금융권에서 속칭 잘나갔다. 2008년 이전엔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을 비롯해 신한금융지주·신한은행 임원 17명 중 9명이 상고 출신이었다.우리금융지주도 당시 박인철 전 전무, 송기진 전 부행장, 이공희 전 부행장이 상고를 졸업했으며, KB금융지주에도 이달수 전 KB데이타시스템 사장, 김흥운 전 KB금융지주 부사장, 심형구 전 KB국민은행 부행장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김동수 전 수출입은행장, 허창기 전 제주은행장 등이 상고를 졸업했다. 다만, 상고 전성시대는 노 대통령이 부산상고를 졸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 은행권이 대거 채용한 상고 출신이 임원으로 올라설 때가 된데다, 학력을 따지지 않던 문화의 영향이 더 크다. 서금회나 호금회 논란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전문가들은 특정 학교 출신이 금융계를 쥐락펴락하는 게 심해지는 상황을 우려한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전문성이나 실력보다 학연·지연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 줄대기 문화가 확산하고 금융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실인사는 조직의 줄대기 문화를 양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도 ‘금정유착’을 걱정한다. “정치권은 금융권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금융권은 정치권에 도움을 주는 금정유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해법은 없을까. 전성인 교수는 ‘금융회사 근무이력제’를 제안했다. 금융회사 근무 경력이 있는 인물이 선임되면 정피아(정치권 마피아) 등 외부 낙하산을 일단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윤석헌 교수는 ‘낙하산 금지법’과 ‘금융회사 지배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강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행(사)장추천위원회나 사외이사가 금융회사 임원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의사록을 꼼꼼하게 실명으로 작성하고, 사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윤 교수는 “추천 과정을 굉장히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역량이 떨어지면서 인맥·학맥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물을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