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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채무 적지만 가계부채 눈덩이일단 정부는 변동금리·일시상환 중심인 대출구조를 고정금리·분할상환 중심으로 바꿔갈 방침이다. 이를 위해 고정금리·분할상환 비중 목표를 상향 조정(2015년 25%→35%)했다. 이자만 갚다가 원금을 한꺼번에 갚는 일시상환 방식은 부실 대출 우려가 크고, 변동금리는 금리 상승기에 이자 부담이 크다. 이런 대출을 줄이겠다는 의도다. 이에 따라 앞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집값보다 대출금이 일정 비율을 넘으면 초과분은 대출 즉시 분할상환을 시작해야 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통상 3~5년 정도인 거치 기간도 1년 이내로 단축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라며 “대출자 스스로가 분할상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애플리케이션(안심주머니)을 활용한 캠페인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은행이 대출 심사를 할 땐 담보보다 상환능력에 중점을 둔다. 이를 위해 소득 증빙 방법도 더 꼼꼼하게 가다듬고, 상환능력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더 엄격하게 바꾸기로 했다. 금리가 오를 가능성에 대비해 변동금리 대출 한도를 오른 금리를 기준으로 정하는 ‘스트레스 금리(Stress rate)’ 제도도 도입한다. 예비금리 역할을 하는 스트레스 금리는 일종의 완충장치다. 대출금리가 5%일 때 스트레스 금리가 2%포인트라면 총 7%의 금리로 이자를 부담하는 상황을 가정해 대출 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대출 한도는 줄어들지만 금리 상승기에 이자 부담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유한책임대출제도’가 처음 언급된 것도 눈길을 끈다. 담보로 잡힌 집값이 대출금 아래로 떨어진 경우 집만 포기하면 나머지 대출을 갚지 않아도 되는 제도다. 은행의 상환 청구권(소구권)을 제한하겠다는 건데, 올 연말부터 시범 도입하기로 했다. 3억원짜리 집을 담보로 2억원을 빌렸는데 집값이 1억원으로 떨어진 경우 집 열쇠만 넘겨주면 부채를 털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는 나머지 1억원에 대한 채무도 그대로 진다. 이 때문에 담보로 잡힌 집 외에 다른 재산과 월급까지 차압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깡통주택’이 되더라도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이자 은행도 잘못된 대출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의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널리 활용되는 제도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36%(2014년)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공 공기관을 포 함한 공 공 부 문 전체 부 채도 62.9%(2013년)로 안정적인 편이다. 그러나 가계부채로 항목을 바꾸면 한국의 순위는 급등한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1099조원에 달한다. GDP의 80%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가계부채의 증가 속도다. 2005~2010년 사이 연평균 9.3%씩 증가했던 가계신용은 이후 3년간 5~6%대의 안정세를 보였다가 올해 다시 7%대에 올라섰다. 2012년 3.1%로 떨어졌던 주택담보대출 증가율도 올 1분기 11.3%를 기록했다. 가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164.2%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32.5%를 크게 웃돈다. 3월 초 맥킨지글로벌연구소(MGI)가 한국·네덜란드·캐나다·말레이시아 등 7개국을 ‘가계부채 잠재적 취약국가’로 분류한 것도 이 때문이다.1년 전 주택담보인정비율(LTV)와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해 ‘빚내서 집 사기’를 부추겼던 정부가 정책 기조를 확 바꾼 건 가계부채가 관리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위기감의 표현이다. 대출 규제 완화와 각종 부양책으로 부동산 시장이 달아올랐지만 그 효과가 내수 경기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은 채 가계 빚만 늘린 꼴이 됐으니 당황할 만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취임 직후부터 강조한 ‘소득 주도 성장론’도 별 효과를 못 봤다. 실물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데 소득이 늘어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 대책을 내놓으며 ‘선제적 대응’이란 표현을 썼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책 방향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계부채 급증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부가 이렇다 할 사과 한마디 없이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더 불편하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살리려다 가계 빚만 왕창 늘어비록 늦었지만 정부가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응에 나선 점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고정금리와 분할상환 비중을 늘리겠다는 방향도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이번 대책은 대출의 질을 높이려는 것일 뿐 대출 자체를 줄이는 방안이 아니다. 경기를 감안해 LTV와 DTI에 손을 대지 않는 게 상징적이다. 가계부채 증가세에 브레이크를 걸 만한 묘수는 아니라는 의미다. LTV·DTI 한도를 그대로 두더라도 일정 부분을 분할상환으로 바꾸고 대출 요건을 강화하면 한도를 낮추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금융 당국의 설명이지만 실제 효과는 미미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실장은 “원리금 분할 상환을 유도하면 가계부채의 구조나 체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결국 소득이 늘지 않으면 상환 능력이 좋아지긴 어렵다”고 지적했다.이번 대책이 금융회사의 자율 규제에 의존한다는 점도 우려 된다. 구조개선 실적에 따른 각종 인센티브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금융회사가 화끈하게 움직일 가능성은 작다. 금리만 봐도 알 수 있다. 금융회사는 변동금리를 좋아한다. 금리 변동의 위험성을 대출자에게 떠넘길 수 있어서다. 주택담보대출 상품 대부분이 처음엔 고정금리지만 얼마 후에 변동금리로 바뀌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 상반기 고정금리로 바꾸는 32조원 규모의 안심전환대출을 진행했을 때 금융회사들의 미지근한 반응을 떠올리면 된다. 정부가 ‘잘 관리하겠다’고 하지만 신뢰가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