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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로빈슨 크루소]의 ‘심리적 회계’ 

지출 항목에 따라 소비자 체감 만족도 달라져 ... 고부가 신제품 판매 전략에 적용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사진:중앙포토
세계 문학사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다. 스토리는 모험문학과 조난문학의 원형이다. 알고 보면 [로빈슨 크루소]는 경제소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1600년대 후반의 경제사상을 곳곳에 담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신용과 보증, 양도와 계약 등 ‘거래행위’를 어떻게 성사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는 1719년 발표한 대니얼 디포의 작품이다. 디포 나이 쉰아홉. [로빈슨 크루소]는 그의 인생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디포는 장사를 하다가 망하고, 정부에 반하는 글을 쓰다 쫓김을 당했다. 조선으로 치면 숙종 시절에 이런 작품이 나왔다는 게 놀랍다.

자본주의 태동기의 경제사상 투영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2개월 19일간 무인도에서 표류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법률을 공부해 중산층으로 살라”는 아버지의 말을 뿌리치고 배를 탄다. 그는 유럽에서 카나리아제도를 거쳐 아프리카로 가는 기니항로에서 무역으로 돈을 번다. 하지만 곧 살레에서 무어인에게 잡혀 노예가 된다. 극적으로 탈출한 크루소는 브라질에 정착해 농장을 경영해 큰 돈을 번다. 그냥 살면 될 것을 이번에도 방랑벽이 부추긴다. 흑인노예를 얻기 위한 항해를 떠났다 조난을 당한다. 1659년 9월 30일 그는 미지의 섬에 조난을 당하고, 1686년 12월 19일이 되어서야 탈출에 성공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된 배에서 식량과 화약, 총, 의류 등을 구한다. 쌀과 밀의 볍씨로 농사까지 짓는다. 난파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개와 2마리의 고양이, 그가 잡은 앵무새는 그의 말동무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 탈출을 시도하지만 방법이 없다. 무인도 표류 15년째. 바닷가 모래밭에서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면서 섬생활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섬 가까운 곳에 식인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불안과 긴장 속에 산다. 24년째 되던 해, 식인종에게 붙잡힌 토인 포로를 구출한다. 그가 ‘프라이데이’다. 이어 스페인 사람과 프라이데이의 아버지를 구출하면서 섬은 드디어 작은 사회로 발전한다. 27년째 되는 해, 영국 배의 보트가 섬에 들어온다. 알고 봤더니 배에서 반란이 있었고 선장은 납치됐다. 로빈슨 크루소는 선장과 함께 반란 선원을 제압해 배를 되찾는다. 그는 이 배를 타고 마침내 유럽으로 돌아온다.

[로빈슨 크루소]는 최남선이 잡지 [소년]에 ‘로빈슨 무인절도 표류기’(1909)를 번역, 발표하면서 국내에 처음 알려졌다. 청소년용으로 바뀌어 국내 소개되면서 우리에게는 아동용 모험소설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복잡한 정치·경제적 이야기는 쏙 뺀 채 흥미위주의 모험만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로빈슨 크루소]에서 청교도 금욕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엿본다. 막스 베버는 [프르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청교도의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시킨 촉매제가 됐다고 주장했다. 금욕주의는 사치와 향락, 게으름을 죄악시한다. 그러면서 부를 축척하기 위한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면서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부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줬고, 이는 자본 축적으로 이어졌다. 앞서 가톨릭은 돈벌이를 죄악시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절제하고 계획 없는 방만한 생활을 추구했다. 그러다 무인도에 홀로 남겨지면서 신의 벌임을 알게 된다. 필요한 물건을 자신의 노동으로 확보하고, 먹을거리를 축적해 나가면서 그 기회를 준 신에게 감사한다.

섬에서 정착하는 동안 로빈슨 크루소의 마음은 절망과 기쁨 사이를 오간다.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것은 절망이지만, 난파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다. 무서운 맹수나 야만인이 없던 것도 행운이다. 하지만 탈출할 길이 없다는 것은 불행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섬생활은 달라졌다. 같은 사항인데도 사람의 판단과 결정이 달라지는 것, 경제학에서는 ‘심리적 회계’로 설명한다. 시카고대학의 리더츠 세일러가 제안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활동을 하면서 발생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장부가 있는데, 단순히 수입과 지출이 아닌 좀 더 세부적인 항목으로 가입하려는 성향이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지출이라도 통신비·주거비·식사비 등으로 표시한다. 수입도 월급·연금수입·이자수입·이전수입 등으로 따로 기재한다. 특정 항목을 어디에 넣느냐에 따라 손실이 되기도 하고 수익으로 잡히기도 한다. 같은 손실 내에서도 상시적 손실이냐 일시적 손실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 회계를 손실로 마감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가계부를 쓰면서 적자를 기록하고 싶지 않은 심리와 같다. 이런 판단에 따라 행동도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10만원짜리 상품을 사더라도 현금을 주고 사는 것과 신용카드를 긁을 때는 소비자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당장 10만 원을 주면 큰 돈 같아서 꺼리다가도 한 달 뒤에 결재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더 느긋해진다. 할부상품이 많을수록 ‘지름 신’이 강림할 가능성은 커진다.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하자. 뮤지컬을 보기 위해 일주일 전 티켓을 10만원에 구매했다. 그런데 집을 나서기 직전 티켓을 분실했다는 것을 알았다. 10만원을 더 들여서 티켓을 다시 사 뮤지컬을 볼까? 한편, 뮤지컬 티켓을 현장에서 사기로 하고 10만원을 지갑에 넣어뒀다. 그런데 집에서 떠나기 직전 10만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ATM기에서 돈을 찾아 갈까?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실험에 따르면 뮤지컬을 보러가겠다는 답은 후자가 더 많았다. 전자의 경우 사람들은 10만원 뮤지컬 티켓을 이미 ‘문화생활비’ 계정으로 분류해뒀다. 뮤지컬 보는데 10만원을 더 들여 20만원을 내기에는 ‘문화생활비’로는 아깝다는 생각이든 것이다. 반면 후자는 10만원이 문화생활비 계정에 들어가지 않아 문화생활비는 여전히 10만원이 됐다.

지난 연말정산 파동 당시 정부는 ‘적게 떼고 적게 돌려받는’ 방식으로 바꿨다가 납세자의 화만 북돋았다. 납세자들은 연말 정산 때 환급받는 돈을 ‘이전소득’ 계정으로 넣어뒀는데 갑자기 ‘조세지출’ 계정으로 바뀌자 박탈감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야 매달 적게 내는 것이 납세자에게 유리하다. 소액이라도 이자수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득에서 지출로 바뀌면서 발생한 심리적 충격을 만회할 정도는 아니었다.

연말정산 파동이 생긴 이유는…

고부가 가치를 지닌 신제품은 심리적 회계를 잘 이용할 때 성공할 수 있다. 스마트폰 사례를 보자. 통화만 하는 전화기가 90만원이라면 아깝지만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하는 전화기라면 달라진다. 스마트폰 구입비 90만원은 단순 통신비 계정이 아니라 문화오락비 계정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같은 지출 90만원이지만 항목이 어디냐에 따라 소비자가 느끼는 체감이 다르다. 로빈스 크루소의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회계장부에 있는 대변과 차변처럼 내가 누리고 있는 안락과 내가 당하고 있는 불행을 대조해 보았다. 아무리 비참한 상황이라고 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희망과 위안을 삼을 만한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디포는 400여년 전에 ‘심리적 회계’의 본질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1302호 (201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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