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ted.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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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엉뚱하다, 발칙하다, 황당하다.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 엇비슷할 것 같다. 설마 천재나 영웅을 떠올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 엉뚱하고 발칙하고 황당한 사람은 기피 대상이다.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히던지 왕따가 될 공산이 크고, 군대라면 영락없이 관심병사다. 회사? 십중팔구 면접에서 잘릴 게 뻔하다.하지만 이제 변했다. 진작에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창고에서 뭔가를 오물딱쪼물딱 할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더 이상 점잖고,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사람들만 가지고는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범생(範生)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세상에는 온갖 엉뚱한 연구들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어떤 연구자는 산모가 누워있는 침상을 회전시키고 거기서 얻은 원심력으로 출산을 돕는 특허를 냈다고 한다. 또 어떤 연구자는 딱따구리가 하루에 수천 번씩 나무를 쪼는데도 뇌가 멀쩡한 이유를 연구하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한 연구팀은 겨울철 빙판길에서 뉴질랜드 사람들이 신발 바깥에 양말을 싣는 것을 보고 그 과학적 효과에 대해 규명하기도 했다.
괴짜가 세상을 먹여 살린다
▎1. 이그노벨상 포스터. 2. 2009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브래지어 방독면. 진짜 노벨상 수상자인 볼프강 케털리(왼쪽, 200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와 폴 크루그만(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이 시연해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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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언뜻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왠지 아까운 연구들이 많다. 1991년 미국의 유머과학잡지인 [기발한 연구 연감](Annals of Improbable Researches)의 편집자 마크 에이브러햄스(Marc Abrahams)는 이런 연구들에게 상(賞)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이다. ‘이그노벨’이라는 이름은 ‘불명예스러운’이라는 뜻의 이그노블(Ignoble)과 노벨(Nobel)을 합성하여 만든 일종의 짝퉁 노벨상이다. 하지만 진짜 노벨상보다 확연히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 무지하게 웃기다.매년 10월 초순 ‘진짜’ 노벨상이 발표되기 1~2주 전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샌더즈 극장에서는 이그노벨상 시상식이 열린다. 매년 9000여건의 후보작들 가운데 10개를 선정하는데, 심사기준은 단 하나. ‘사람들을 처음에는 웃게 만들고, 이어서 생각하게 만드는(first make people laugh, and then make them think)’ 연구여야 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정관념을 깨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이색 연구에 상을 수여한다.
▎‘웃긴 노벨상’ 강연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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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이는 이그노벨상 수상식에는 ‘진짜’ 노벨상 수상자들이 직접 나서서 상을 수여한다.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2000년 수상자 중 한 명은 살아있는 개구리를 공중부양시켜 개구리에게 반자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안드레 가임(Andre Geim) 교수다. 그런데 그는 2010년에 그래핀을 발견한 공로로 ‘진짜’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하버드대학 물리학과의 노교수 로이 글로버(Roy Glauber)는 시상식마다 수시로 빗자루를 들고 나와 관객들이 무대로 날린 종이비행기 치우는 일을 자청해서 ‘빗자루 지킴이(Keeper of the Broom)’란 닉네임까지 얻었는데, 2005년에는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진짜’ 노벨상을 받으러 스톡홀름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상금도 없고, 시상식에 참가할 교통비나 숙박비도 지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자비를 들여 참석한다고 하니 이그노벨상에 대한 과학자들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는 이그노벨상을 ‘과학계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평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역대 이그노벨상 몇 가지를 소개한다.
두 권의 책(1993년 경제학상) : 미국의 경제학자 라비 바트라(Ravi Batra)는 [1990년 불경기]라는 책과 [1990년 불경기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책 두 권을 동시에 써냈다.
지옥 입장객 수 계산(1994년 수학상) : 앨라배마 주의 남부 침례교 교회는 앨라배마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지옥에 가게 될 사람의 수를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가라오케(2004년 평화상) : 한 일본인은 가라오케를 발명하여 사람들이 서로를 좀 더 인내할 수 있게 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평화상을 받았다.
게이 폭탄(2007년 평화상) : 전쟁 때 이 폭탄을 터트리면 동성간의 성적인 호감이 증가해서 전투력이 저하되고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한다.
브래지어 방독면(2009년 공중보건상) : 위기 시에 방독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성 브래지어. 구 소련의 체르노빌 사태 때 방독면이 없어 죽어간 사람들을 목격하고 우크라이나의 여성 디자이너가 개발했다. 브래지어 하나로 두 명을 살릴 수 있다.
이름있는 젖소(2009년 수의학상) : 영국 뉴캐슬 대학 연구팀은 이름을 가진 젖소가 이름이 없는 젖소보다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와사비 알람(2011년 화학상) : 한밤 중 화재가 일어났을 때 비상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와사비 가루를 공기 중에 뿌려준다.
스피치 재머(Speech Jammer)(2012년 음향부문상) : 수다쟁이의 목소리를 녹음해 수백 밀리세컨드(1000분의 1초) 차이로 지연해서 되풀이 해 들려줌으로써 수다쟁이가 혼동되어서 스스로 입을 다물게 만든다.
개가 용변 보는 방향(2014년 생물학상) : 체코독일잠비아 공동연구팀은 2년 동안 개 70마리의 배변행위(대변 1893번, 소변 5582번)를 조사해서 개들은 남북 자기장 방향으로 몸을 정렬시켜 배변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인 중에서도 이그노벨상 수상자가 있었다. 1999년 코오롱FnC의 한 연구원은 ‘향기 나는 양복’을 개발한 공로로 환경보호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대규모 합동결혼을 성사(1960년 36쌍을 시작으로 1997년 3600만 쌍까지)시킨 공로로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경제학상을 받았다. 가장 최근인 2011년에는 다미선교회의 한 목사가 ‘세계 종말을 열정적으로 예언’하여 수학상을 받았는데, 수학적 추정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일깨워준 공로라고 한다.
고정관념 깨는 창의적 연구 필요이그노벨상은 쓸 데 없는 연구에 주는 우스꽝스러운 상이 아니다. 단순한 비하나 조롱도 아니다. 수상작뿐만 아니라 이그노벨상 그 자체도 풍자적이고 의미심장하다. 가벼운 웃음 뒤에는 세상을 일깨우는 기발함과 통념을 깨는 대담함에 대한 나름의 찬사가 숨어 있다. 천재와 바보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눈이 휙휙 돌아가는 스마트 시대의 뉴 노멀(New Normal). 기존의 교육 제도와 연구 방식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거기다 천편일률적이기까지 하면 어림도 없다. 레이저 총이 대세인 시대에 외딴 산속에 틀어박혀 오로지 칼싸움 연습만 하는 꼴이다. 논문 편수에만 집착하는 우리나라 학계에 이그노벨상 바람이 불었으면 한다. 아니면 독자적으로 ‘황당무계상’이나 ‘포복절도상’을 만들어도 좋겠다. 아, 그런데 교수나 연구원들이 열심히 참여할까? ‘우리 식’의 확실한 방법이 있다. 성과평가에 넣으면 된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