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북유럽 국가라고 하면 아주 추운 날씨를 떠올리지만 덴마크는 좀 다르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기온이 가장 낮은 1월에도 평균기온은 영하 1.5도에 불과하다. 여름철에도 평균 17도에 맴돌아 기온의 연교차가 적은 편이다. 사시사철 바람이 많이 불고, 바람을 막을 만한 높은 산이 없어 농지나 주택 주변엔 주로 방풍림을 조성한다. 바람이 많으니 풍차도 흔하다. 덴마크 사람들은 예부터 풍차를 돌려 동력을 만들어냈다. 19세기 말 전기가 보급될 무렵 풍력발전기를 만들어 농촌 지역에 널리 퍼뜨린 것도 덴마크 사람이었다. ‘바람의 나라’ 덴마크에서 세계 최대 풍력발전기 회사인 베스타스(Vestas)가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베스타스 본사 전경. / 사진:Courtesy of Vestas Wind Systems 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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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타스의 역사는 117년 전인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8년 덴마크 서부해안에 자리한 시골 마을에 사는 핸드스미스 한센은 스물두 살의 당찬 청년이었다. 그는 동네 대장간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비록 작은 대장간이었지만 고객의 작은 불만도 놓치지 않고 해결하는 열정으로 규모를 키워나갔다. 1928년 아들 페더 한센이 합류하며 대장간에서 창문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산업화 물결을 타고 일반주택은 물론 각종 상업 빌딩이 늘면서 창문틀 주문량이 나날이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철강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며 이들의 사업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1945년 전쟁으로 인해 사업이 위축됐고, 페더 한센은 새로운 동력을 찾아나섰다.
그는 전후 독일군이 남긴 막사를 베이스캠프로 해 믹서기와 부엌저울 등 주방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군 작은 대장간이 ‘베스타스’라는 사명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다.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딛고자 일찍이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페더 한센은 1950년 냉각 우유통에 관한 세계 특허를 취득해 생산에 나섰다. 낙농업이 발달한 덴마크에서는 매일 갓 짠 신선한 우유가 생산됐다. 그러나 보관법이 마땅치 않아 생산·유통에 한계가 있었다. 이때문에 생산된 우유를 장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냉각 우유통은 곧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승승장구하던 베스타스에 시련이 닥쳤다. 1960년 화재가 발생해 사무실과 공장이 전소한 것. 한센은 좌절하지 않고 경트럭용 수압크레인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 수압크레인은 곧 베스타스 생산품의 약 96%를 차지하는 주력제품이 됐고, 이후 65개국으로 수출되며 베스타스는 세계적인 농기구 회사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한센은 1970년대 들어 두 번의 오일 쇼크를 겪으며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한센은 농기구회사에서 풍력발전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한다. 그는 이러한 계획을 비밀에 부친 채 관련 기술자를 영입했다. 1978년부터 1년 6개월에 걸쳐 풍력터빈실험을 진행한 결과, 이듬해 세계 최초의 풍력발전기가 탄생했다. 그러나 보급용으로 쓰기에는 내구성과 경제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농기구회사에서 에너지기업으로 변신
▎베스타스는 2년간 제품 테스트를 거친 후 신제품을 출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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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봉착한 베스타스에 구원투수로 나타난 이는 기술자 요르겐슨과 쉬티에스댈이었다. 이들은 현재 풍력터빈의 모태가 된 날개 3개짜리 풍력터빈을 개발했지만 생산할 만한 자금이 부족했다. 기술의 가치를 알아본 한센은 즉각 이들을 베스타스 연구팀에 합류시켰다. 두 기술자의 연구개발로 이듬해 베스타스는 날개 길이 10m에 30kW의 용량을 가진 풍력발전기를 회사 부지에 세울 수 있었다. 때마침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도 풍력발전 바람이 불고 있었다. 197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대체에너지 개발에 중점을 두고 에너지부를 설치, 전력사업 규제정책법을 제정했다. 여기에 세금 감면 등 재정적 유인책을 마련해 재생가능에너지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에 캘리포니아주 역시 풍력발전 설치에 보조금을 주며 본격적인 보급 확대에 나섰다.이같은 흐름을 타고 미국 존드사는 유럽의 풍력발전기를 구매하기 위해 1980년 네덜란드를 찾았다. 소식을 접한 베스타스는 회사 쌍발기를 암스테르담으로 보내 존드 사의 구매단을 덴마크에 데려왔다. 본사에 설치된 3익형 풍력터빈을 본 존드사는 일단 2기 구매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그 해 가을, 전에 없던 요란한 태풍이 불어와 본사에 있던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흉물스럽게 부서진 날개 잔해가 회사 부지에서 나뒹굴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디자인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파악한 페더 한센은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이제껏 주문받은 풍력발전기의 설치를 전면 중단하고 문제 해결에 몰두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미국 수출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존드사와의 계약도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한센은 흔들리지 않고 결점을 보완하는 데만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베스타스는 유리섬유 부품을 이용한 방법을 고안해 전 생산 단계에서 고품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베스타스가 영국에 건설한 해상풍력발전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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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타스가 자발적인 품질 개선 노력을 보이자 구매자 역시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됐다. 계약 파기를 고민한 미국 존드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사는 1981년 155기, 1982년에는 550기를 잇따라 주문했다. 좁은 덴마크 시장에선 감히 상상 못할 정도의 엄청난 물량이었다. 베스타스는 늘어나는 생산량을 감당하기 위해 당시 200여명이던 직원 수를 몇 년새 870명으로 늘렸다. 1985년에는 세계 최초로 피치를 조정할 수 있는 터빈을 내놨다. 피치 제어란 날개의 각도를 조절해 바람이 부는 세기에 따라 출력을 바꿀 수 있는 방식이다. 이 기술이 없던 때에는 태풍처럼 강력한 바람이 불면 날개가 바람을 못 이겨 부서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피치 제어를 통해 강한 바람에는 날개가 돌아가지 않고 운행을 멈추도록 설계해 안정성을 높였다. 이렇듯 베스타스는 끊임없는 기술혁신을 통해 업계 선두자리를 지켜나갔다.한동안 순항하던 풍력발전 사업은 1986년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미국에서 주문받은 풍력 터빈 1200기를 실고 가던 해운사가 파산해 졸지에 물건이 모두 미국 로스앤젤레스 외항에 묶여버린 것. 이때문에 납품 기일을 넘기자 미국 회사는 인수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이미 배달한 터빈 결제도 미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덴마크 정부가 세법을 개정해 그간의 과세 환급을 절반으로 줄였다. 결국 베스타스는 지불 유예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위기에 처한 베스타스는 이참에 아예 풍력발전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다른 사업 부문을 모두 정리하고 한결 날렵해진 회사는 이후 덴마크 정부가 인도에 후원하는 6개의 풍력 에너지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얻었다.
GE·지멘스 등과 점유율 엎치락뒤치락
▎사진:Courtesy of Vestas Wind Systems 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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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풍력발전기를 상용화한 베스타스는 199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부는 풍력발전기 설치 바람을 타고 급성장했다. 지멘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글로벌 기업이 풍력발전 시장에 가세하며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베스타스는 날개의 무게를 줄이고 운영시스템을 최적화하는 등 기술 개발에 전념했다. 1998년 상장할 당시 베스타스의 세계 풍력발전 시장점유율은 22.1%에 달했다. 10여년간 베스타스는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2003년 17억 유로에 불과했던 매출은 2008년 60억 유로로 뛰며 연평균 28.8% 성장했다. 이 시기에 주가는 1300% 가까이 폭등했다. 2004년에는 덴마크의 또 다른 풍력터빈 회사인 NEG미콘을 인수·합병(M&A)하면서 세계 시장점유율을 32%대로 끌어올렸다.그러나 최근 중국 정부가 신재생에너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중국 업체들이 대거 등장했고, 이로 인해 베스타스의 시장 점유율은 10%대로 떨어진 상태다. 급기야 2012년 점유율 15.5%를 기록한 GE윈드에 비해 낮은 성적(14%)을 보여 10여 년 만에 1위 자리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업계에선 미국 정부가 풍력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에너지 소비에 대한 세액 공제 정책 펼치면서 자국 기업인 GE가 급성장한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1년 만인 2013년 베스타스는 GE를 근소한 차이로 앞질러 시장 점유율 1위를 탈환한 것으로 나타났다.비록 미국과 중국의 물량공세에 밀려 주춤하지만 베스타스의 풍력발전기는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4시간에 한 대 꼴로 건설되고 있다. 베스타스가 1979년 처음 개발한 풍력발전기는 로터 10m에 30kW급 용량에 불과했지만, 최근 3MW급 풍력발전기 로터의 지름은 101m로 대형화됐다. 수천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MW급 풍력발전기는 대당 공급 가격이 수백만 유로에 이를 정도로 고가 상품이다. 이런 제품에 결함이 생기면 엄청난 손실이 불가피한 탓에 베스타스는 2년간 제품 테스트를 거친 후 신제품을 출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연구개발·설계→시제품 제작→완제품 생산→시험→설치→유지 및 보수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체적으로 관리·감독해 안정성을 높인다. 전 세계에 설치된 5만4000여 대의 베스타스 풍력발전기에서 각종 운영 데이터(온도·풍속·회전속도 등)를 모두 집계해 새로운 기술개발의 기초 자료로 활용한다.베스타스의 본거지인 덴마크는 현재 전체 전력의 30%를 풍력으로 공급할 만큼 ‘풍력대국’으로 발전했다. 이제 덴마크에서 풍력발전은 한 기업만이 아닌, 나라 전체의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은 후 정부 차원에서 예산을 편성해 풍력발전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현재 덴마크 전역에 설치된 풍력발전기 수는 해상풍력발전기 500여대를 포함해 약 5000여기에 달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량은 연간 4000MW로, 원자력발전소 4기에 해당하는 설비용량이다. 앞서 덴마크 정부는 2020년도까지 화석연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전체 전력 생산량에서 풍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율을 50%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어 향후 풍력발전 사업이 더욱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2년 전 베스타스 CEO로 취임한 앤더스 루네바드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함께 ‘기술·서비스솔루션’이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발표했다. 풍력발전기의 특성상 일시적으로 제품을 파는데 그치지 않고, 꾸준히 유지·보수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세계 전역에 풍력발전기가 많이 보급될수록 베스타스의 애프터마켓 사업도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베스타스가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해상풍력발전이다. 해상풍력단지는 말 그대로 육지가 아닌 바다에 풍력발전기를 세워 전력을 생산하는 것인데 이 분야에 관한 한 베스타스의 기술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해상풍력은 육상에 비해 풍속이 20% 이상 강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육상 풍력발전에 비해 70% 이상 전력을 많이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주변에 장애물이 없어 입지 선정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육지에 비해 건설 비용이 비싸고, 해류나 수심 및 조수간만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데이터 분석과 기술력 없이는 어려운 사업이다. 해저 심토에 강철 구조물을 견고하게 설치해야할 뿐 아니라 해상 발전기와 송전선망을 잇는 수십 km의 케이블의 설치·유지·보수를 위해 해상 발전기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도 필요하다. 육상 풍력발전기를 설치할 때 필요한 기술을 토대로 해상화에 필요한 특수기술도 갖춰야 한다. 예를 들면 바다의 염분에 견딜 수 있는 구조물과 거센 바람에 적합한 발전기 날개 제작 기술 등이다. 이에 베스타스는 해상풍력을 전담하는 독립 부서를 운영해 사업을 적극 펼치고 있다.
한국 시장점유율 50%로 1위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시장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국내 풍력발전의 역사가 곧 베스타스의 한국 진출 역사라고 할만큼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깊다. 지난 2007년 설립된 한국법인을 중심으로 제주·강원 등지 풍력발전단지 건설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122기를 보급했다. 현재 약 50%의 국내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베스타스는 내년 강원도에 최신 모델의 풍력터빈 13개를 설치할 것으로 알려졌다. 베스타스는 지난 7월 국내 한 대기업이 한국의 첫 V100 풍력터빈을 발주했으며 업체명과 프로젝트 세부사항은 기밀이지만 주문은 확고하며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 회사는 한국 시장에 대해 “원자력과 수입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자 에너지원을 다양화 하고 있어 풍력 에너지 시장으로서의 매력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바람의 제왕’ 베스타스가 한국에선 얼마나 강한 바람을 일으킬지 두고볼 일이다.- 허정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