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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와 이란이 충돌하는 진짜 이유는] 종교·역사·주도권·유가 놓고 뼛속까지 원수 

최근 35년 사이 세 번째 충돌 … 유가 불안 등 세계 경제에 악영향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의원
중동 지역을 대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거칠게 충돌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에 경제적 이익이 걸려 있는 한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양국 모두 한국의 주요 에너지 수입처일 뿐 아니라 건설·무역 파트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사우디를 방문할 정도로 이 지역에 걸린 한국의 경제적 이익은 막대하다. 사우디는 한국의 의료와 병원운영 시스템도 수입하고 있다. 과거 핵개발 문제로 미국이 이란에 대한 금융봉쇄를 주도할 당시 한국은 미국에 특별예외를 인정해 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유엔의 경제 제재 당시에도 한국은 이란의 석유를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이런 사우디와 이란이 왜 충돌하고 있는지, 앞으로 전망은 어떤지 심층 분석했다.

▎지난 1월 3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 앞에서 한 성직자가 대중을 향해 분노 섞인 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사우디와 이란의 격렬한 충돌이 새해 벽두부터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 1월 3일 사우디가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하면서다. 사우디는 전날 자국의 시아파 성직자 님르 알님르를 처형했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가 소수파인 시아파 성직자를 테러범들과 함께 처형하자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들고 일어났다. 처형 직후, 이란 시위대가 테헤란의 사우디 외교 공관을 공격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신의 분노가 사우디 정치인들에게 내려질 것”이라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자 사우디가 즉각 반격해 자국의 이란 외교관들에게 48시간 안에 떠날 것을 요구하고 이란 주재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교장관은 이런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란은 사우디에 테러리스트 조직을 심고 무기를 공급해왔다”며 “이란의 역사는 아랍 문제에 있어 부정적 간섭과 적의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했다. 이란도 정면으로 맞섰다. 이란 정부 대변인은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고 시아파 지도자를 처형한 사우디의 커다란 잘못을 숨길 수는 없다”며 “사우디가 전략적인 잘못과 경솔한 행동으로 지역 안전을 위협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해묵은 갈등을 노출했다. 양국 갈등이 단순히 시아파 성직자의 처형으로 촉발됐다기보다 그 이면에 해묵은 갈등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양국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충돌과 해빙을 거듭해왔다. 특히 이란에 이슬람 혁명이 벌어진 1979년 이후 양국은 세 차례에 걸쳐 심각한 외교 갈등을 빚었다.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에는 사우디가 같은 수니파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감싸고 돌면서 이란과의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됐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끈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사우디의 알사우드 왕조의 바탕이 되는 와하비즘을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1988년부터 3년 간은 외교관계가 단절됐다. 이번 알님르 처형과 테헤란의 사우디 공관에 대한 공격에 이은 단교는 35년 새 세 번째 충돌에 해당한다.

수니파 극단주의인 와하비즘 신봉하는 사우디 왕가


양국 갈등에는 역사적인 뿌리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사우디는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로 이슬람 종파가 서로 다르다는 데서 기원을 찾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양국의 앙숙관계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모든 수니파와 시아파가 이렇게 심각하게 대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무슬림(이슬람 신자)들은 “수니든 시아든 종파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무슬림 형제”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파의 차이보다는 극단주의에서 갈등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를 설명하려면 사우디의 특수성을 파악해야 한다. 사실 사우디는 현대적 기준으로 따지면 이해하기 힘든 나라다.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은 글로벌 인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가 왕족들에 둘러싸여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제도도 도마에 오른다. 의회는 국왕 자문기관일 뿐이다. 인권·남녀평등·민주주의 분야에서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근대적 사회다. 사우디가 이런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살라피즘으로 불리는 엄격한 이슬람주의가 그것이다. 서구에서는 알사우드 왕조의 구성원들을 살라피스트, 또는 와하비스트로 부른다. 왕조 자체가 이슬람 정통파·초보수파·엄격파·근본주의자·이슬람 청교도로 불리는 살리피즘과 정치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시작된 살리피즘은 한마디로 말해 중세 때인 초기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 운동이다. 18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 종교개혁가 무함마드 이븐 암드 알와하브(1703~1787)라는 인물이 주창해 와하비즘으로도 불린다. 당시 아라비아 사막 가운데의 척박한 리야드 지역을 지배하던 알사우드 가문의 부족장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살라피즘을 정치·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하고, 아들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1765~1803 재위)를 와하브의 딸과 결혼시켰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다. 그는 살리피즘을 확산하기 위한 지하드(성전)에 나서 아라비아 반도 동부를 정복하고, 1744년 족장에서 에미르(이슬람 군주)의 지위로 올라섰다. 이를 1차 사우디 국가(1744~1818)라고 부른다. 사우디가 종교적 잣대로 사회를 운용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알사우드 왕실 조상, 1801년 시아파 성지 파괴

압둘아지즈는 1801년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 카르발라를 점령해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의 외손자인 시아파 성인인 후세인의 무덤과 유적을 파괴했다. 성인 묘소를 화려하게 꾸미고 순례하는 시아파를 살리피즘에선 유일신 사상에 어긋나는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사우디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 앙숙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종교적 배경이다. 압둘아지즈는 1517년 이래 오스만 튀르크의 영향권이던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도 손에 넣었다. 뒤를 이은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빈 무하마드 빈 사우드(1803~1814 재위) 시절에 사단이 났다. 오스만 제국이 산하의 반독립국이던 이집트의 영주 알리 파샤를 시켜 사우디를 토벌하게 했기 때문이다. 1811~1818년의 이집트·사우디 전쟁은 사우디의 패배로 끝났고 사우드의 아들 압둘라 빈 사우드(1814~1818 재위)는 포로가 돼 이스탄불에서 참수됐다. 사우디와 이집트·터키의 악연이다.

사막으로 피신한 알사우드 가문은 와신상담 끝에 무하마드빈 사우드의 손자인 투르키 이븐 압둘라 이븐 무하마드가 1824년 이집트군을 몰아내고 옛 근거지인 리야드를 탈환했다. 2차 사우디 국가(1824~1891)의 시작이다. 압둘라만 빈 파이잘(1850~1928)이 통치하던 1891년 지역의 경쟁자인 알라시드 가문과 벌인 물라이다 전투에서 패배해 고향에서도 밀려났다. 알사우드 가문판 ‘고난의 행군’이다. 이들은 사막을 떠돌다 베두인인 알무라 부족에 몸을 의탁했다. 그 뒤 알타니 가문이 지배하는 카타르와 알할리파 가문의 바레인에 잠시 머문 뒤 알사바 가문이 지배하는 쿠웨이트에 망명해 재기를 노렸다. 사우디가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의 공격을 받은 쿠웨이트를 도와 걸프전을 주도하고, 2011년 시아파 시위가 한창이던 바레인에 파병한 역사적 배경이다.

압둘라만의 아들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만 알사우드(1876~1953)는 친족과 살리피즘 지지자 63명을 규합해 리야드의 마지막 요새를 기습해 1902년 1월 탈환했다. 알사우드 왕가는 이때를 제3차 사우디 국가, 즉 현대 사우디의 시작으로 친다. 성지 메카·메디나를 지배하던 마호메트의 후손인 하심 가문(현재 요르단 왕조)과 싸워 1925년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 두 도시를 차지하면서 알사우드 왕가는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사실은 수니파의 맹주다. 압둘아지즈는 1932년 나라 이름을 ‘알사우드의 아라비아’라는 뜻의 사우디아라비아로 바꿨다. 사우디는 1953년 압둘아지즈가 세상을 떠난 뒤 지금까지 그의 아들들이 돌아가며 통치하고 있다. 사우디가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중세적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이유다.

엄격한 이슬람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이란도 만만치 않다. 모든 여성은 히잡을 써야 한다. 공공장소에서는 얼굴과 손 외에는 신체를 노출하지 않는 의상을 입어야 한다. 심지어 외국인 여성도 비자 신청을 할 때는 머리를 가리는 히잡을 쓴 사진을 제출하도록 요구받는다. 다만, 이런 전통만 지킨다면 여성도 비교적 자유롭게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사회적 신분 상승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우디와 차이가 있다. 이란에는 여군도 있다. 사우디와 달리 현대적인 일부일처제가 정착돼 있기도 하다.

종교가 정치 위에 군림하는 신정(神政)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이란도 마찬가지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입헌군주제였던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사실상 신정 체제를 이뤘다. 이란은 수니파가 다수인 사우디와 달리 시아파가 다수다. 시아파 중에서도 ‘12 이맘파’라는 종파가 중심이다. 시아파는 아랍어로 시아투 알리,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전 세계 무슬림 인구 중에서 시아파는 10~13% 정도이며 수니파가 더 많다. 시아파도 다양한 분파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12 이맘파’라는 종단이 다수를 차지한다. 시아파의 85% 정도가 ‘12 이맘파’를 추종한다.

수니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공식적으로는 전 국민이 무슬림이다. 이교도 국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중 수니파가 90%, 시아파가 10% 정도다. 문제는 이 10%에 해당하는 시아파의 상당수가 동부 페르시아만 인근의 유전 지대에 몰려 산다는 점이다. 국가전략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 시아파 지역인 셈이다.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이 90%이고, 수니파는 8% 정도다.

친미·친서방의 사우디와 반미·반서방의 이란

사우디와 이란은 서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지위와 중동지역 주도권을 놓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여왔다. 국제정치를 보는 시각에서도, 지역 질서와 안정을 위한 방법론에서도 양국은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우디는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인 이슬람 와하비즘을 신봉함에도 대외관계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는 전통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을 안보와 국제관계의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의 대결이 곧 중동·이슬람 사회에서 친서방과 반서방 간의 대결이기도 한 이유다. 사우디는 걸프전과 이라크전 때는 자국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기도 했다. 알카에다의 창시자인 오사마 빈 라덴은 생전에 이슬람 성지에 이교도인 미군이 군화를 신고 오가는 상황에 모독을 느껴 반미·반서방 테러에 나섰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초대 최고 지도자인 호메이니는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으며 반미·반서방을 대외관계의 주축으로 삼았다. 미국과 서방이 자신을 탄압한 팔라비 왕조를 지원하고 이슬람을 무시했다는 이유에서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사우디를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고 비난해 왔다. 이슬람이라는 신앙보다 알사우드 가문과 미국의 이익을 앞세운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반면 사우디는 이란이 중동지역에 이슬람혁명을 수출하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지역 안정이 흔들린다고 비난해왔다. 특히, 이란이 사우디를 비롯한 페르시아만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의 군주제를 전복시키고 이란식 민중 혁명을 배후조종할 것을 우려해왔다. 이란이 중동 지역 내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도 견제 대상이었다. 실제로 이란은 중동 지역 전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해왔다.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전쟁으로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란은 이라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의 아이러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사우디는 바짝 긴장하면서 이라크와의 국경에 거대한 보안장벽을 설치하고 있다. 이란은 이라크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사우디 서남부에 있는 예멘의 시아파와도 손을 잡았다. 그러자 사우디는 예멘 내전에 개입해 공중 공습을 계속 벌이고 있다. 이란은 1월 7일 예멘 수도 사나의 이란 대사관이 사우디의 공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란은 시아파의 소수파인 알라위파에 속하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도 지원해왔다. 시리아 내전은 성격과 양상이 워낙 복잡하긴 하지만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시리아 내전의 성격을 독재정권과 민주화 세력 간의 투쟁을 기본 축으로 하고 여기에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이 가세한 정도로 여겨왔다. 여기에 최근 들어 알카에다를 계승한 알누스라와 잔학행위로 이름 높은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까지 가세한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시리아 내전은 질적으로 사우디가 지원하는 수니파 반정부군과 이란이 지지하는 시아파 정부군 간의 대결이라는 종파 전쟁으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갈수록 사우디와 이라크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언제까지 계속되는지에 쏠린다.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 추정으로 국내총생산(GDP)은 사우디가 6489억 달러(약 777조2000억원)로 세계 20위다. 1인당 GDP는 사우디가 2만677달러로 세계 38위다. 이란은 GDP가 4190억 달러(501조 8000억원)로 세계 29위, 1인당 GDP는 5306달러로 98위다. 이란이 주요 석유·가스 수출국임에도 이렇게 가난한 것은 이라크와의 전쟁과 핵개발에 따른 오랜 국제 제재로 석유를 제대로 팔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국제사회와 관계 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

경제에선 이란이 밀려

문제는 석유 가격정책에서도 사우디와 이란의 시각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3000만 명이 안 되는 인구에 비해 엄청난 에너지 매장량을 자랑하는 사우디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적절한 유가 유지를 지향한다. 이와 달리 이란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유가를 원한다. 석유를 팔아 돈을 마련해 국민의 생활수준을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우디와 이란의 이번 갈등이 일단락돼도 문제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사태가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하는 것일 뿐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다는 이야기다.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은 종교·역사·자존심·지역주도권·체제 경쟁 등 복잡한 요인이 얽힌 국제문제다. 이를 풀어나가는 것은 양국이나 중동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과제다. 석유·가스의 공급과 가격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물론 아랍 에미리트·카타르·바레인 등 페르시아만 연안 산유국의 에너지는 대부분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 전 세계로 수송된다. 석유수송의 목줄인 호르무즈 해협을 이란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은 전 세계인의 목줄을 동시에 누르는 사건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의원

1318호 (201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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