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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지는 키덜트시장 덕 보는 유통가] ‘장난감 덕후’ 쇼핑파워 장난 아니죠 

편의점·대형마트·백화점의 피규어·블록 장난감 인기... 남성 패션·시계 매출도 덩달아 늘어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CU의 블럭 장난감 ‘변신하는 CU’.
어린 시절, TV 만화영화 속 주인공은 요술봉을 빙글빙글 돌리면 단숨에 마법소녀로 변신했다. 소심한 소년도 팔목에 찬 팔찌를 하늘로 뻗기만 하면 악당 몇쯤은 가뿐하게 물리치는 히어로가 됐다.

장난감이 주는 행복한 상상이 실제로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내수 침체에 허덕이는 유통 업계에서 ‘키덜트(Kidult)’시장은 매년 20~30%씩 성장하며 블루오션으로 각광받고 있다. 키덜트는 어린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아이처럼 장난감·인형·캐릭터 등에 관심과 애정을 갖는 어른을 뜻한다. 1985년 뉴욕타임스가 언급한 이래 키덜트족(族)은 꽤 오랫동안 미성숙한 어른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여왔다. 일본의 ‘오타쿠’, 한국의 ‘덕후(특정 분야에 심취한 사람)’가 폐쇄적이고 생업에 등을 돌린 느낌을 주던 것과 비슷하다.

CU, 편의점 최초로 PB 블록 장난감 내놔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명 ‘장난감 덕후’들이 유통가 매출을 올리는 주요 고객층으로 등장했다. 키덜트 문화가 유행을 넘어 하나의 ‘긍정적인 취미생활’ ‘최신 소비 트렌드’로 당당히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1인 독신가구가 늘고, 개인 취향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그 배경이다. 극심한 경쟁사회 속에 어릴 적 향수가 담긴 장난감을 통해 정서적 안정과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 사람도 점점 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키덜트 시장 규모는 지난해 5000억~7000억원 대에서 올해 1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백화점·대형마트·편의점 등 유통 업체들은 앞다퉈 관련 상품을 발굴·판매하고 있다.

키덜트 파워가 가장 흥미롭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편의점이다. 인기 캐릭터가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 개봉에 맞춰 자체 기획을 통해 정기적으로 상품을 내놓고 있다. 편의점 1위 CU(씨유)는 업계 최초로 자체 브랜드(PB) 블록 장난감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국내 블록 장난감 제조사인 옥스포드와 함께 편의점 점포, 배송 차량 등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한정 판매했다. 내부에서 반대도 많았다. 음료수나 라면 같은 저렴한 먹거리가 주를 이루는 편의점에서 과연 1만~2만원 대의 장난감이 팔리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은 편의점 주요 이용객인 2030세대의 대세 트렌드인 키덜트 코드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10개월의 기획·제조 과정을 거쳐 장난감 시리즈를 출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탄 ‘달리는 CU’는 출시 일주일 만에 3000개 수량이 완판됐다. 2탄(‘변신하는 CU’)은 5000개 한정 판매였지만 점포 발주량은 4만 개가 넘었다. CU선릉역점 최순재 점주는 “상품을 구하려고 아침부터 택시를 타고 강남 일대 점포를 순회하는 남자 손님도 있었다”고 말했다. 장남감 인기는 편의점 전체 매출도 늘렸다. BGF리테일 생활용품팀 윤태준 상품기획자(MD)는 “블록 장난감 구매 고객 4명 중 1명은 다른 상품도 같이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세븐일레븐은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캐릭터 상품을 정기적으로 내놔 ‘덕후’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지난해 ‘미키마우스’와 ‘어벤져스2’ 피규어에 이어 최근 일본의 인기 만화 캐릭터인 ‘원피스’ 12종 시리즈를 선보였다. 여기에도 편의점 측 전략이 숨어있다. 피규어만 별도 판매하지는 않고 총 구매금액이 5000원 이상이면 5000원에, 7000원 이상이면 3990원에 파는 것이다. 게다가 캐릭터를 알 수 없도록 불투명 케이스에 담아 소비자들의 수집욕을 자극한다. 실제 중고거래 인터넷 카페 등을 중심으로 자신에게 없는 피규어를 맞바꾸려는 물물교환이나 웃돈을 얹어 거래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세븐일레븐 관계자는 “피규어 자체가 돈이 된다기보다 전체 판매점 매출을 10% 이상 올리고 방문을 유도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른들의 장난감 사랑은 백화점 매출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백화점들은 전통적인 유·아동 완구 매장을 줄이거나 없애는 반면 주로 성인 남성 고객을 겨냥한 키덜트 매장은 늘리고 있다. 롯데백화점만 해도 ‘멘즈아지트’ ‘다비드컬렉션’ ‘클럽모나코 맨즈샵’ ‘큐리오시티오브레노마’ ‘레고’ ‘센토이’ 등이 있다. 멘즈아지트는 월평균 8000만원, 다비드컬렉션과 레고는 각각 월 평균 1억200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인기가 좋다.

키덜트 매장의 인기는 곧 남성 고객들의 소비 부활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동안 남성은 여성에 비해 쇼핑에는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이 늘어나면서 경제력 있는 30~40대 남성 고객의 키덜트 매장 방문이 늘어났다. 특히 과거엔 남성 고객이 살 것만 사는 ‘목적 구매’를 했다면 이제는 백화점이나 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제품을 둘러보고 즐기는 ‘가치 구매’를 하기 시작했다. 20~30대 싱글 남성의 경우 장난감과 피규어로 집을 꾸미는 사람도 많아 키덜트 상품이 인테리어 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롯데백화점 남성패션부문 이준혁 수석바이어는 “과거 오렌지족 등 개성이 강한 세대가 장난감을 마음껏 구매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남성 고객의 키덜트 상품 구매가 크게 늘고 있다”며 “백화점에서도 다양한 상품과 행사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매장 방문 유도하는 효과도 커

신세계백화점이 지난해 말 야심차게 선보인 ‘스타워즈 피규어·레고 전시회’는 키덜트족의 힘을 보여준 사례다. 스타워즈 전시회가 시작된 후 3주 동안 주말 전체 매출이 전년 대비 15.8% 증가한 것이다. 이 기간 남성 패션은 14.4%, 스포츠는 22.7%, 시계·주얼리는 무려 48.2% 매출이 뛰었다. 흥미롭게도 스타워즈 관련 상품을 구매한 고객의 연령대를 살펴보니 40대(37%), 50대(27%) 등 중장년층이 60% 이상을 기록했다. 1978년 국내에 첫 개봉한 스타워즈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40~50대 고객이 추억을 떠올리며 집중적으로 상품을 사고 즐거운 기분으로 백화점을 둘러보며 의류와 스포츠·시계 등을 덩달아 구매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NH투자증권 한슬기 연구원은 “키덜트 시장은 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영화·패션·완구·음식 등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며 “일본의 오타쿠시장 규모가 약 8조원(2013년 기준)인 것을 감안하면 1조원이 안 되는 국내는 앞으로 성장성이 매우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1333호 (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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