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 설계한 본격적인 현대호텔...대규모 미국인 관광객 방한 기록도
▎조선호텔 광고지(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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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서울을 중심으로 무명의 의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요 무대 중 하나는 글로리 빈관이다. 극중 의병들의 회합장소로 전통을 상징하는 주막에 대비해 개화이자 변화를 상징하던 글로리 빈관의 모티브가 된 것은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손탁호텔(Sontag Hotel)’이었다. 실제 손탁호텔에는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주요 외국인이 머물렀으며, 드라마에서와 같이 고종과의 연관도 있던 곳이었다.그리고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더 이상 극중 고애신이 했던 “대체 부인네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오?”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호텔은 이미 단순한 여행객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도시민이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새로운 문화를 즐기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호텔에서의 바캉스를 뜻하는 ‘호캉스’는 더 이상 신조어가 아니며, 여름 휴가철 도심의 호텔 수영장은 성황을 이룬다. 또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작품을 소장해 미술시장의 ‘큰 손’이 된 지도 오래다. 이런 경향을 반영해 최근 신세계조선호텔에서 론칭한 레스케이프 호텔의 김범수 총지배인은 ‘단순한 호텔이 아니라 분야별 최고 크리에이터들과 협업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생기는 플랫폼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이런 호텔이 도입돼 변화·성장해온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로비’의 존재 유무로 구분되던 현대호텔
▎트레몬드 호텔(1834)(British Library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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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19세기 철도와 여행의 발전에 따라 종래의 여인숙과 귀족의 옛 저택이 숙박시설에 대한 수요를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어 도입된 것이라고 한다. 1829년 미국에서는 최초의 현대식 호텔인 트레몬드 호텔(Tremont Hotel)이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로비를 만들어 바(Bar)에서 등록할 필요 없이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인용, 2인용 객실을 확보했으며, 객실에는 욕탕도 있었고, 각 방에는 열쇠와 체인을 달았다. 무료 세면대와 물 주전자, 신문과 비누, 지배인을 두어 관리하는 것, 프랑스 요리를 제공하는 것, 벨보이를 부를 수 있는 호출기를 도입하는 등 지금 호텔에서 제공되는 서비스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다.
▎스타틀러호텔(1900~1910년)(Library of Congress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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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접어들면서 늘어나는 여행 인구에 대응하기 위한 호텔이 더욱 늘어나게 됐다. 고급스러운 시설을 갖추고 부유층 대상의 영업을 하거나, 철도역 주변에 허름하게 들어선 서비스가 부족한 소규모 호텔들 사이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호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호텔왕이라고 불리는 스타틀러(Statler)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는 호텔 비품에 대한 표준화와 능률화, 합리화를 꾀했다. 이때부터 계단에 방화문이 설치되고 ‘방해하지 마시오(Don’t disturb)’라는 표지가 문고리에 걸렸다. 어두운 실내에서도 쉽게 객실등을 켤 수 있도록 스위치를 설치하고 개인용 욕탕과 얼음물 공급기가 제공되는 등 근대호텔 서비스의 표준이 됐으며, 상용호텔의 효시가 됐다.우리나라의 최초의 호텔은 인천의 대불호텔이다. 대불호텔(大佛 Hotel)은 1880년대 이래 일본인 호리 큐타로(堀久太郞)가 운영했다. 침대 객실 11개, 다다미 객실 240개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인 이타이(怡泰)가 운영한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h)이 주인이었던 꼬레호텔(Hetel de Coree) 등이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사람들을 위한 숙박시설이었다.1900년 무렵 서울에도 호텔이 들어섰다. 경운궁 인접 지역의 서울호텔(Seoul Hotel), 경운궁 대안문 앞의 팔레(프렌치)호텔(Palace Hotel)과 임페리얼호텔(Imperial Hotel), 그리고 서대문정거장 부근의 스테이션호텔(Station Hotel) 등이 개업했다. 이런 호텔들은 규모가 크지 않고 서양식 숙박시설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팔레(프렌치)호텔(『The Burton Holmes Lectures』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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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손탁호텔은 1902년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을 신축해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의 형태로 운영됐다. 이 호텔의 주인은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이었다. 1885년 러시아 공사를 따라 조선에 온 그녀는 탁월한 언어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바탕으로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맡으며 고종과 가깝게 지냈고, 건물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녀의 이력과 외국 공사관들이 있던 정동이라는 입지 덕분에 이 호텔에는 자연스럽게 주요 외국인이 많이 드나들었다. 조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베델과 헐버트, 러·일전쟁 당시 특파원으로 조선에 왔던 처칠 수상, 그리고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기도 했다.1909년 손탁호텔은 당시 프렌치(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Boher)에게 팔렸다. 그 후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에서 일반 호텔로 전환해 운영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식 여관도 서울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파성관(巴城館, 하죠칸)과 포미여관(浦尾旅館, 우라오여관) 등이 있다. 이 중에서는 1906년 개업한 경성호텔(또는 1911년 개업한 것)도 있었다.
원구단 허물고 조선호텔 건설한 일본철도회사
▎손탁호텔(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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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호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호텔은 1914년 건립된 조선호텔이었다. 1911년 무렵부터 철도호텔들이 계획되고 건립됐지만 조선호텔의 위상은 다른 어느 호텔과 비교할 수 없었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규모에 60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객실은 2, 3, 4층에 있었는데 고급 객실은 2~3층에 일반 객실은 4층에 주로 배치됐다. 고급 객실에는 개별적인 근대식 욕실과 화장실이 구비됐으며, 일반 객실은 공동으로 운영됐다. 부대시설로는 로비, 라운지, 집회실, 콘서트홀, 특별식당, 대식당, 보통식당이 있었는데 대식당과 보통식당을 합치면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미국에서 수입된 승강기를 갖추었고 난방, 세탁, 제빙을 위한 설비는 지하에 배치돼 있었다.조선호텔은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라란데가 설계를 담당했다. 많은 자재와 설비는 독일 등 외국에서 수입했다. 조선철도국 직영으로 건축됐으며, 운영에는 다롄 야마토 호텔(1907), 뤼순 야마토호텔(1908), 장춘 야마토호텔(1908), 펑텐 야마토호텔(1910) 등 만주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던 남만주철도회사가 참여했다. 원구단 부지를 철거하고 건립된 조선호텔은 단순히 상업적 목적에 따라 건립된 호텔이 아니라 식민 지배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1915년 물상공진회 방문 외국 귀빈 숙소를 비롯해 정무총감, 조선총독 등 식민지 정부의 주요 권력자들이 활발하게 사용하고, 업무회의나 각종행사를 진행하는 등 조선총독부의 영빈관 역할을 했다. 1921년에는 부대사업의 일환으로 용산에 골프장까지 운영했다.
1920년대 들어 대중에게도 개방
▎(왼쪽부터) 경성호텔(『大京城都市大觀』 수록) / 조선호텔(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스테이션호텔(『The Burton Holmes Lectures』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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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고객 중에는 미국인 단체 관람객도 있었다. 미국인 관광단의 방한은 1900년대부터 이뤄졌다. 1920년대 대형 유람선 운항으로 수백 명 단위의 대규모 관광단 방한도 가능해졌다. 초기에는 소수의 인원이 손탁호텔 등에 머물렀지만, 조선호텔이 개관한 이후로는 대부분 이곳에 머물렀다. 1926년 3월 9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26년 3월 8일 미국 프랭크쿠크사에서 주최한 세계주유관광단 650명이 인천에 도착해 시내를 관광하고 임시열차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을 모두 태울 수 있는 자동차가 없어 인력거 650대가 동원됐다. 이들 중 97명은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47명은 남대문역 침대열차에서 숙박했으며, 나머지는 인천으로 귀환했다가 이튿날 다시 서울로 돌아와 관광을 계속했다.민간부문의 이용객들이 점차 증가하게 됐는데, 조선상공회의소·조선광업회·조선의사회 등 민간 협회의 사용이 빈번해 1916년 5%였던 민간 행사가 1924년에는 38%까지 증가했다. 1922년에는 류인갑이라는 시골학교 교사가 조선호텔에 머물며 남대문통에 위치한 여러 상점에서 1500여원에 달하는 물건을 훔치고 호텔에 지내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일반인의 투숙도 증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발맞춰 조선호텔은 1924년 로즈가든을 일반인에게 개방했고, 1926년에는 상류층을 상대로 한 기존의 영업방침을 변경해 500명을 수용하던 식당을 일반객실로 전환하고 중산층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해 경성여관조합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진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