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엔 스쿠버다이버 커플 수중결혼식…한강 수영금지구역 늘면서 더욱 번창
▎워커힐호텔 실외수영장 / 사진:국가기록원, 19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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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호텔은 야외수영장에 얼음을 채워 스케이트장으로 바꾸거나, 사계절 온수풀을 자랑하며 추위에도 변함없는 수영을 제안하며 투숙객을 유혹한다. 최근에는 동네 곳곳에 많은 수영장이 있어 겨울철 수영이 특별이 언급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겨울철에 수영을 한다는 것은 추위와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극기훈련’에 가까웠다.현대적 의미에서의 수영은 군인들의 훈련수단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까지의 수영이 미역을 감거나 개헤엄을 치는 등의 유영(遊泳)을 즐기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1898년 5월 14일 무관학교 칙령을 통해 여름 휴가시기 유영 연습을 명한 것은 근대적 수영 영법이 발전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강가나 바닷가에 임시로 만든 수영장에서 연습을 했는데, 서울에서는 마포와 용산의 한강변을 수영 연습장소로 활용했다.
1930년대에는 1주일 중 하루만 여성 전용
▎2. 워커힐호텔 수영장 광고. / 3. 그랜드하얏트호텔 서울 스케이트장. / 4. 경성중학교 운동장 수영장. / 5. 경성운동장 수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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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경성제국대학교에 인공적으로 물을 가두어 만든 수영장이 개장했다. 경성제국대학교 학우회에서 6000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길이 25m, 폭 13m의 수영장에서는 8월 25일 제1회 중등학교 수영경기대회가 개최됐다. 그 뒤를 이어 1931년 용산중학교와 경성사범학교, 1932년 경성중학교에 수영장이 만들어졌다. 1934년에는 경성운동장에 길이 50m, 폭 20m 국제규격의 수영장이 개장했다. 길이 20m 폭 18m의 다이빙 풀, 길이 25m 폭 20m의 아동용 풀 1개를 설치했다. 월요일을 여자 전용일로 운영해 남자의 입장을 금지했다. 경성운동장 수영장은 개장되자마자 수많은 인파로 들끓어서 수영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목욕탕과 같았다고 한다.최초의 실내수영장은 YMCA회관 내에 만들어질 계획이었다. 1959년부터 계획을 세워 1962년 5월에 착공했다. 그러나 사업비 등의 문제로 1967년 3월 10일이 돼서야 개장했다. 그 사이 워커힐호텔의 수영장이 먼저 만들어졌다. 실외수영장과 달리 실내수영장은 1963년 2월 호텔 개관 이전에 개방했다. 다만,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수영선수들에게 제공됐다. 이곳은 겨울철 영하의 날씨 속에도 실내온도 34도, 수온 27도를 유지해 ‘혹한의 망각지대’로 불리기도 했다. 해매다 여름방학 중에 실시되던 초등학교 교사들의 수상안전강습회가 겨울방학 기간에 개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968년 12월 14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결혼식이 열렸다. 신랑과 신부는 이곳에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다가 사귀게 되어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이 전한 결혼식 장면을 소개하면, 신랑과 신부는 물론 주례까지 잠수장비를 갖추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비닐면사포를 썼으며, 붉고 푸른 조명이 물속을 수놓았는데, 하객들은 물 밖에서 가끔씩 올라오는 거품만 볼 수 있었다. 워커힐호텔 수영장은 실내수영장과 실외수영장에서 각각 입장료를 받았다. 부속시설로 모터보트 10여대가 있어 수상스키를 즐길 수도 있었다. 어린이 놀이터도 있어 목마 등 7가지 놀이기구가 있었다. 시민들의 이용 편의를 위해 반도호텔 앞에서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셔틀 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워커힐호텔 실내수영장, 1963년 영업 시작
▎1. 그린파크호텔 수영장. / 2. 타워호텔 수영장. / 3. 조선호텔 실외수영장. / 4. 그린파크호텔 수영장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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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호텔은 우이동에 자리한 그린파크 호텔에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수영장을 조성했다. 1968년 6월 문을 연 이곳은 길이 50m 정규 풀과 다이빙 풀, 어린이 풀과 미끄럼틀을 갖추고 있었는데, 한달 간 약 2만여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1969년에는 방문객이 더욱 늘어 1일 수용능력을 훨씬 넘긴 6000여 명이 일시에 방문하기도 하는 등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그린파크호텔 수영장은 입장료만 내면 의자·돗자리 등 부대시설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슬라이더는 한 번에 20원씩 별도로 돈을 받았다. 투숙객들에게는 50%의 할인을 해주었는데, 도시락을 싸서 온 가족동반 손님이 많았다. 1971년에는 타워호텔의 야외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국제규격보다 긴 77m의 길이에 폭 22m였고, 어린이용 풀을 별도로 갖추고 있었으며, 높이 8m 길이 20m의 미끄럼틀도 있었다. 다른 호텔들에 비해 위치가 가까운 타워호텔 야외수영장은 인기가 많았다. 1974년 8월 11일에는 오전 11시쯤 입장객이 정원인 540명을 넘어섰으며, 오후 2시에는 4000여 명이나 입장해 초만원을 이루어 수영장의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호텔수영장에 이용객이 만원이었던 이유는 한강이 오염되고, 익사자가 늘어나 수영이 금지되는 구역과 기간이 계속 증가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에도 대장균이 들끓어 한강에서의 수영이 금지됐다. 서울 시내 수영장은 시립과 사립, 호텔 수영장을 모두 합쳐도 20개 밖에 되지 않아 수영장에는 방학 중인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서울시내 풀장에 약 2억원의 돈이 몰려들고 식비와 교통비 등을 더하면 4억원의 돈이 거래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1975년 요금을 살펴보면 이 세 호텔은 모두 어른 700원, 어린이 500원이었다. 당시 서울운동장 수영장은 어른 100원, 어린이 50원이었으며, 어린이대공원 수영장은 어른 300원, 어린이 200원이었고, YMCA 수영장은 어른 400원, 어린이 300원이었다. 이를 비교하면, 호텔 수영장은 서울운동장 수영장에 비해서는 7~10배, 다른 수영장과 비교해서는 2배가량 비싼 요금이었는데,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이 15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다소 비싼 편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투숙객들 위한 서비스로 활용1970년 긴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연 조선호텔에도 야외수영장이 있었다. 이 수영장은 위의 다른 호텔 수영장과 달리 수영장 내에 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였다. 주로 호텔에 묵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았다. 1974년 11월 한국을 찾은 미국 포드 대통령의 투숙을 기념해 ‘제럴드 포드관’으로 이름 붙여지기도 한 이곳은 1일 이용객들이 아닌 투숙객을 위한 공간이었으며, 도심 속 휴가를 상징하는 호텔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됐었다. 요금도 가장 비쌌는데, 1975년을 기준으로 평일 1000원, 공휴일 1500원을 받았다. 이후 새로 지어지는 호텔들의 수영장은 점차 투숙객들, 그리고 호텔 스포츠클럽 유료회원들에게 개방하는 공간으로만 활용됐다. 여름철 일일 이용객들은 늘어난 공사립 수영장들과 서울 근교의 대규모 위락 시설에서 나누어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