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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16) 위앙의 한계] 국정의 전권 쥐었지만 독선적·가혹한 태도로 불행 자초 

 

강력한 법·제도 시행으로 부국강병 기초 닦아…주변의 조언 듣지 않고 자만에 빠져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위(魏)나라의 재상 공숙좌가 깊은 병이 들었다. 걱정이 된 왕은 직접 공숙좌의 집으로 문병을 갔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야 하오. 그대가 없으면 내가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무래도 신은 틀린 것 같사옵니다.” 한참 눈물을 흘리던 왕이 물었다. “만에 하나 그대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장차 누구에게 나랏일을 맡겨야 하겠소?” 공숙좌가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신의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위앙이 적임자입니다. 나이는 비록 젊지만 정말 뛰어난 인재이니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시옵소서.” 순간 왕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숙좌가 “전하께서 위앙을 등용할 뜻이 없으시다면 반드시 그를 죽이십시오. 그가 다른 나라로 간다면 장차 위나라에 큰 화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성의 없는 목소리로 “알겠소”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위앙을 재상에 등용하거나 죽이시라”

왕이 궁궐로 돌아가자 공숙좌는 위앙을 불렀다 “미안하네. 오늘 왕께서 재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물으시기에 내가 그대를 추천했네. 하지만 표정을 보니 들어주실 것 같지 않더군. 나는 이 나라 사직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대를 쓰지 않을 거라면 죽여야 한다고 했으이. 그러니 어서 떠나게. 이곳에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걸세.” 그러자 위앙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왕께서 저를 기용하라는 건의를 듣지 않았으니 저를 죽이라는 말 또한 듣지 않으실 겁니다.” 실제로 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숙좌가 병이 들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군. 과인에게 위앙을 재상에 앉히라니, 게다가 쓰지 않을 거라면 죽여 버리라고 하지 뭔가. 위앙 같은 놈이 뭐라고. 공숙좌 같은 신하가 그런 헛소리를 하더니 참으로 슬픈 일이야.”

얼마 후, 공숙좌가 죽고 공숙좌의 장례를 치른 위앙은 서쪽 진(秦)나라로 떠났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위나라에 미련이 없을뿐더러 진나라 군주 효공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렵사리 효공을 만난 위앙은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하며 효공의 불만을 샀다.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의 도를 논하다가 ‘허황된 사람’이라며 면박을 받았고,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의 왕도(王道)를 설명하다가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는 볼멘소리를 들었다. 이 모습을 본 진나라의 신하가 답답해하며 묻는다. “지금 임금이 인재를 구하는 뜻은 사냥꾼이 좋은 그물을 구하는 것과 같소. 자나 깨나 날짐승을 잡겠다는 생각뿐이란 말이오. 그대는 어째서 즉시 이익이 될 일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고 제도(帝道, 성군의 정도)나 왕도 따위만 아뢰는 것이오?”

위앙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임금의 뜻이 어느 정도 높은지 모르니 여러모로 그 뜻을 살펴봐야 할 것 아니오? 내 이제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았소.” 임금의 생각과 관심사를 헤아려보기 위해서 뜸을 들인 것이다. 리더의 성향에 맞춰 대응을 했다는 점에서 현명하다고 볼 수 있지만, 본인의 신념 없이 리더에게 영합했다는 의미도 된다. 아무튼 위앙은 드디어 효공의 흥미를 끌 만한 방책을 내놓았는데 바로 ‘패도’, ‘강국지술(强國之術,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나고 민심에 역행하더라도 부국강병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시대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던 효공에게 꼭 맞는 방법이었다.

위앙이 제시한 국가 개조 전략에 흠뻑 빠진 효공은 사흘 밤낮으로 대화한 끝에 그를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정사는 좌서장의 명령대로 시행한다.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역적으로 취급할 것이다”라고 명을 내린다. 위앙은 이러한 효공의 후원을 등에 업고 국정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우선 지리적 여건이 훌륭한 함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각 지역의 행정단위를 현(縣)으로 재편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했고 세법을 개정하여 국가의 세수를 늘렸다. 도로를 제외한 모든 토지를 개간하여 유휴지를 없앴으며 산업을 장려하고 상벌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다섯 집이 서로 보호하고 열 집이 서로 감시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신분증이 없는 사람을 재워주지 못하게 했으며 강력한 연좌제를 도입,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지으면 가족 전체를 나라의 노비로 삼았다. 위에서 아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국가체제를 추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앙은 먼저 한 가지 조치를 취한다. 궁궐 남문에 작은 나무 기둥을 하나 세워 놓고 다음과 같은 게시문을 붙인 것이다. “누구든지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세우는 자가 있으면 10금(金)의 상을 줄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속셈이지?’ ‘괜히 나섰다가 화를 당하는 거 아냐?’ 며칠 후 위앙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세우는 자에게 50금(金)의 상을 내린다.” ‘도대체 나무 하나 옮긴다고 왜 저렇게 큰 상금을 준단 말인가?’ 사람들은 더욱 의심을 품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서서 나무를 옮기자 위앙은 크게 칭찬하며 약속대로 50금의 상을 준다. 오늘날에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국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핵심 조건이다. 위앙은 허무맹랑해 보이는 약속까지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새로 개혁한 법과 정책에 대한 신뢰를 높인 것이다. 법을 어길 경우 ‘반드시’ 엄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인식시켜줌으로써 복종을 유도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러한 위앙의 노력으로 진나라는 몇 년 사이에 ‘천하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열국지]에 따르면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는 자가 없었고 도둑이 사라졌으며 창고마다 곡식과 재물이 가득 쌓였다. 또한 모두가 전쟁에 나가 용감했다. 감히 서로 싸우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다.

오만하게 자신의 정치 밀어붙여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위앙은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냉혹하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는 사람은 가차 없이 가두었고 매일 같이 죄수 700여 명을 처형했다. “법이 어찌나 강하고 무서웠던지 백성들은 악몽에 시달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서는 온 몸을 벌벌 떨었으며” “진나라 방방곡곡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세자가 법에 대해 불평하자 그의 스승들을 체포해 코를 베어버리고 얼굴에 먹물로 죄인임을 새기는 벌을 내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공포의 시대였다. 원로 중신들이 우려를 전달했지만 위앙은 몽매한 소리라며 듣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에 의심이 따르면 명성을 이룰 수 없고 일을 의심하면 공을 세울 수 없다. 뛰어난 사람의 행동은 세상의 비난을 만나기 마련이고 남다른 사람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의 비방을 듣게 마련이다”라며 오만하게 자신의 정치를 더욱 강하게 추진해 나갔다.

위앙은 국제적으로도 인심을 잃었는데 한 때 자신이 몸 담았던 위(魏)나라를 가차 없이 몰아붙였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다른 나라로 옮겨가 일하는 일이 흔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사무친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전까지 섬겼던 나라에 대해 예의를 지켜주는 것이 암묵적 관례였다. 그러나 위앙은 자신을 믿고 아껴줬던 위나라 사령관을 속여 포로로 삼고 위나라의 국토를 유린했다. 위나라 사신이 “신하는 옛 주인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지난날에 위왕이 비록 그대를 등용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대가 어찌 부모의 나라를 아주 없애버린단 말이오? 너무 무정한 것이 아니오?”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성과로 위앙의 힘은 더욱 커져갔다. 진나라 효공은 위앙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후작의 작위를 내렸고 상어(商於) 등 열 다섯 고을을 그의 식읍으로 하사했다. 위앙을 ‘상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상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부귀와 권력이 집중될수록 조심하고 겸손해야 하지만 위앙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랑하길 좋아했다. 옆에 아첨꾼들로 가득했지만 아첨에 취해 이들을 물리치지 않았다. 조양(趙良)이라는 이가 “대감께서 진나라 재상이 된 지 8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대감의 법령은 철저하게 시행되었지만 무서운 형벌이 그치지 않았고 무수한 사람이 참혹하게 학살당했습니다. 백성들은 대감의 위엄만 보았을 뿐 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오. 지금 진나라 백성들은 이익만 알 뿐 의리를 모릅니다. 더구나 오래 전부터 대감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임금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대감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감께서는 어찌 부귀를 탐하며 스스로 대장부라고 자랑하십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모든 벼슬과 재물을 내려놓으시고 시골에 가서 밭이나 갈며 여생을 마치십시오”라고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공이 죽으면서 조양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세자 시절 자신의 스승들이 형벌을 받은 데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새 임금은 위앙의 재상직을 박탈하고 상어 땅으로 물러나게 했다. 위앙은 이 때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다. 호화찬란한 수레를 타고 함양을 나선 것이다. 위앙을 뒤따르는 의전 행렬의 규모가 임금이나 다름이 없었고 문무백관이 모두 나가 그를 전송했다고 한다. 임금으로서는 당연히 불쾌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위앙을 죽이고 싶었지만 선왕 때 세운 공을 생각하여 목숨을 거두지 않았더니, 자만에 취해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임금은 위앙이 역모를 도모했다며 체포령을 내렸는데 가까스로 도망친 위앙이 어느 여인숙에 묵으려 하자 주인은 신분증을 요구했다. 위앙이 “깜빡 잊고서 가지고 오지 않았다”라며 사정했지만 주인은 단호히 거절한다. “그대는 위앙의 법을 모르시오? 신분증이 없는 사람을 재우면 재워준 사람까지 참형을 당하게 되어 있소. 썩 떠나시오. 자칫하다간 나도 당신 때문에 죽게 될지 모르오.” 위앙은 탄식했다고 한다. “내가 만든 법에 내가 죽게 되었구나.” 결국 위앙은 체포되었고 오우분시(五牛分屍, 죄인의 머리와 팔, 다리를 다섯 마리의 소에 묶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로 처형당했다. 이를 구경하던 백성들이 몰려들어 분풀이를 했고 그의 시신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사마천의 경고 “각박함을 조심하라”

이상 위앙의 일생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역사 속에서 수많은 개혁가가 좌절하고, 기득권에 막혀 목숨을 잃었듯이 위앙 또한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위앙의 처지는 분명히 달랐다. 그는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과 후원 속에서 국정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기득권의 저항을 뚫고 자신의 의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고 충분한 힘이 있었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위앙은 공동체의 여건을 고려하며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병행했어야 했다. 면밀하게 살피며 차근하게 일을 추진했어야 했다. 구성원의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독이며 공동체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위앙은 독선적인 태도로 정책을 밀어붙였고 가혹한 태도로 일관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일은 모든 것이 옳다는 오만함으로 구성원들의 인심을 잃었다. 그 결과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졌음에도, 나름의 성과를 거뒀음에도 나라에 혼란을 가져오고 본인 역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위앙을 두고 “각박함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마천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 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64호 (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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