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부채 디플레이션 습격 우려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전 금융감독원 조사연구국장)
부동산 거래가 단절되는 징후가 뚜렷해지며 부동산 담보와 연계된 가계부채 상환 불능 위험이 우려되고 있다. 경기 침체로 가계수입은 줄어들고 세금은 늘어 이래저래 빚을 감당하기 힘들어 자산을 헐값에라도 처분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 경제를 경착륙시킬지도 모를 부채 디플레이션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출금리 상대적 수준은 2019년 현재, 거시경제 여건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취·등록세, 양도세 같은 부동산 거래비용 또한 과거 고성장 시대 못지 않게 높다. 경기 침체에 채무상환 능력에 맞게 집을 줄여서 그 차액으로 빚을 상환하는 ‘집 갈아타기’가 사실상 어려워졌다.

일반적으로 금리는 경제활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부동산 세금은 부동산 거래와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금 한국 경제는 경기 후퇴기에 기준금리 인상으로 무차별 사격을 받고 부동산 시장은 거래까지 실종시키는 취·등록세, 양도세 중과와 함께 보유세 급등으로 집중사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경기는 후퇴에서 불황으로 그리고 부동산 가격도 내리막으로 전환하려는 국면에서 받은 타격이라 충격은 쉽사리 벗어나기 어려운 모양새다.

9·13 부동산 대책과 2018년 11월 기준금리 인상은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어라’는 속담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점증하고 있는 국면에서 받은 충격이라 얼어붙은 경제심리 회복을 바라는 것은 당분간 무리라고 판단된다. 경제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와 같아서 특정 부분만을 위한 대책을 세우다가는 그 부작용으로 전체가 어려워지는 구성의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생필품도 그렇지만 특히 자산 가격은 오르다가도 내리고, 내리다가도 오른다. 그런 과정에서 시장은 균형과 불균형 상태를 수시로 오가면서 시장 스스로 적정가격을 찾아간다. 자산 가격이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금리가 낮아서 오르고 내린다는 편견은 시장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무릇 세상 일이 그렇듯이 기본을 무시한 냉탕 온탕 처방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게 마련이다. 설사약과 변비약을 자주 번갈아 처방하다가는 어느덧 기력이 쇠잔해진다.

경기 침체로 가계수입은 줄어드는 데다 실질 고금리 대출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채무상환 능력보다 커지면, 담보자산을 처분해 부채를 상환해야 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정말 문제는 부동산 거래비용이 매우 높은 현실에서 빚을 갚기 위해 현재 사는 집보다 싼 집으로 줄여가는, 이른바 ‘집 갈아타기’가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GDP) 수준을 사실상 초과한 상태에서 부동산 시장 거래 실종 상태가 오래가면 복잡하게 얽힌 가계부채 뇌관이 터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한국 경제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 특히 채무자들이 미래를 어둡게 보고 너도나도 소유 부동산을 처분하려 들기 시작하면 부동산 가격이 줄줄이 하락해 매도 희망자만 있고 매수자는 사라지는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지만 부동산 시장도 시장심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경기가 침체에서 불황으로 진행될 경우, 신용경색 사태가 벌어져 돈의 흐름이 더 막혀 자금이 필요한 곳으로 흐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GDP증가율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는 경제심리지수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로 내려가는 상황에서 부동산 담보대출과 전세보증금을 감안할 때, 채무상환 능력이 저하되면 보유자산을 더욱 헐값에라도 처분하려 들 것이다. 그럴 경우, 자산 가격을 더욱 하락시키는 (부채) 디플레이션 함정(deflation trap)이 소비를 급락시켜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하고 다시 디플레이션을 심화시키는 디플레이션 소용돌이(deflation spiral)에 빠질 우려가 없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인플레이션은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 경제를 과열시키지만 디플레이션은 ‘자산 가격’을 떨어뜨려 경제를 얼어붙게 만든다. 인플레이션은 사람들을 갈증 나게 하고 지치게 하지만 디플레이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절망에 이르는 병’으로 이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내려 사람들이 돈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착각하는 그 순간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기업은 도산하는 사태를 발생하게 만든다. 서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20세기 초 일자리를 잃은 가장들이 가족과 함께 떠돌았던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비극을 생각해보자.

사실 한국 경제는 돈이 돌지 않는 불확실성에 쌓여 있는지 이미 오래됐다. 금리는 뭉쳐 있는 돈을 돌게 하는 수준으로 가야 한다. 호황이었던 미국이 금리를 인상한다고, 경기가 후퇴하고 있었던 우리나라도 따라 금리를 인상하다가 돈이 더 돌지 않게 됐다. 부동산 시장의 경우, 거래까지 실종시키는 과잉 대책은 시장 기능을 훼손시키고 나아가 부채 디플레이션이라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초가 삼간 다 태워도 빈대 잡아 좋다’고 하다가는 민생은 그야말로 도탄에 빠지게 된다.

만약 부채 디플레이션 사태가 닥치면 정치권에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다시 부동산 경기 부양에 힘을 기울이고, 밤을 세워가며 유동성을 팽창시키려 야단법석을 떨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5년마다 새 정권이 새로운 캐치플레이즈를 내걸어야 하기 때문에 정책목표가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에 있다. 디플레이션이 지나간 다음에는 유동성 소나기가 오래도록 이어지고 하이퍼인플레이션 악령이 다시 서민층과 중산층을 괴롭힐 것이다.

평생을 두고 장만한 집을 부채 디플레이션의 습격을 견디지 못하고 헐값에 넘겼다가는 훗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닥쳤을 때 ‘영구 빈곤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부유층은 자산 디플레이션으로 헐값이 된 부동산을 사들여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기다린다면 더욱 부자가 될 수 있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빈부격차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우리나라 가계자산의 60% 비중을 차지한다는 부동산의 거래 실종사태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해봤는지 의문이다.

사실이지 절대빈곤을 넘어서면 의식주 중에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사치스럽지만 않다면, 누구나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의 보금자리는 빈부귀천 없이 쾌적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부동산은 끝났다’고 가정한다면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다 같이 못사는 나라’로 추락할 수도 있다. 집값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의지는 선하더라도, 경기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거래까지 실종시키다가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2007년 미국의 주택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을 때 소비수요 감소를 통한 성장 둔화를 경고했지만, 금융위기로 이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블랜차드(O. Blanchard)가 “비관주의자들조차 충분히 비관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하듯이 ‘어어’ 하다가 세계 금융위기로 번져갔다.

2019년 현재 한국 경제도 고단한 데다 글로벌 불확실성의 검은 먹구름이 군데군데 어른거리고 있어 어디선가 사건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면 경제 전반으로 충격이 번질 우려가 크다. 부채 디플레이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도록 긴 안목에서 냉정하게 진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서민층·중산층은 이럴 때일수록 우왕좌왕하지 말고 허리띠를 졸라 매야 낭떠러지를 피해갈 수 있다. 우리 모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엄정한 사실은 ‘이 땅은 나만 아니라 내 자식들도 계속 살아가야 할 곳’이라는 것이다.

1477호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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