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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1) 우드로 윌슨, 내부의 의견통일] 내부자를 먼저 설득하라 

 

외부보다 내부 반대가 걸림돌... 주변부터 아군으로 만들어야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민하면서 근엄해 보이는 얼굴, 차분한 말투, 품격 있는 몸가짐. 정치학 박사로 프린스턴대 총장까지 역임한 학벌의 끝판왕. 미국 제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913~1921년)에 관한 설명이다. 우리에게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자로 잘 알려진 윌슨은 정치학자로서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다가 민주당에게 영입돼 1910년 뉴저지주 주지사가 됐고, 이어 191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당시 공화당은 현 대통령인 윌리엄 태프트와 전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는데,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그리하여 루스벨트가 탈당하고 진보당을 창당해 출마하면서 윌슨이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

대통령이 된 윌슨은 ‘신자유(New Freedom)’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철강·양모·식료품 등의 관세를 철폐했고, 다른 상품들에 대한 관세도 대폭 인하했다. 보호무역에서 자유무역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조치였다. 이밖에도 독점금지법 개정안을 상정해 통과시켰으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운영의 근거가 되는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마련했다. 독과점과 불공정거래를 규제하는 연방거래위원회(FTC)도 윌슨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외교는 어땠을까? 일반적인 평가는 윌슨이 도덕과 명분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미국의 국익과 힘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외교 분야에서도 다양한 업적을 이루었는데,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뼈아픈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동맹 영국과 의견 엇갈려 멕시코 내정 개입 실패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이 1917년 4월 2일 미국 의회에서 독일에 선전포고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 / 사진:키피디아
먼저 멕시코 문제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는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불리며 30여 년간 독재 정치를 휘두른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은 심각한 부패와 빈부격차를 낳았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 디아스가 실각했지만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가 1913년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의 반란을 초래했다. 마데로도 살해당한다.

같은 해 대통령에 취임한 윌슨은 우에르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합법 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 정권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우에르타에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고 요구했는데, 동맹국 영국이 뒤통수를 친다. 중남미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영국은 우에르타를 지지했고, 결국 우에르타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미국으로서는 체면이 크게 깎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멕시코는 판초 비야,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에밀리아노 사파타 세력이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혼란이 계속됐다. 윌슨은 4년에 걸쳐 멕시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여기서 윌슨의 개입이 옳았냐 아니냐는 논의할 사안이 아니다. 윌슨은 멕시코의 안정과 질서를 도모한다는 좋은 목적이 있었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선의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각자의 가치 기준에 따라 이 문제를 판단하면 된다. 다만 일의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윌슨이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영국이 미국과 다른 입장에 선 것이다. 당시, 영국은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의 하나로 미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이런 영국을 설득하지 못하고 행동을 통일하지 못함으로써 미국의 구상이 어그러져 버린 것이다.

윌슨의 야심작이었던 ‘국제연맹(國際聯盟)’도 마찬가지다. 윌슨은 1917년 4월,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전후의 세계질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심했다. 그는 미국의 석학들을 모아 ‘14개 조항(Fourteen Points)’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각 나라가 지켜야 할 외교의 일반 원칙(비밀외교 배제, 공해상에서 항해의 절대적 자유 보장, 경제적 장벽 제거, 군비 축소, 식민지들의 요구를 공평하게 조정)과 전쟁이 끝나는 대로 처리해야 할 사항들이 나열돼 있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14항으로, ‘강대국과 약소국 모두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상호 보장하기 위해, 특별한 협약에 따라 국가 간의 연합기구를 설립한다’는 내용이다. 국가 간의 합의와 협력 기반의 집단안보체제, 즉 국제연맹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윌슨의 이상이 담겨있다.

야당인 공화당 배제로 전후 국제연맹 추진 좌절

윌슨은 1919년 1월,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도 국제연맹 창설을 핵심 의제로 올렸다. 막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다른 승전국들과 직접 담판을 벌이며 그들의 욕심을 억제했고, 패전국에 대한 가혹한 조처를 완화했다. 그러면서 모든 나라가 동의하는 연맹규약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기를 수십 차례, 윌슨은 마침내 연맹규약을 완성했고 1919년 4월 11일, 국제연맹위원회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베르사유조약에도 공식적으로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윌슨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는데, 그 공로로 19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이처럼 윌슨의 원대한 꿈이 실현되려던 찰나, 문제가 터진다. 미국 의회가 국제연맹규약에 대한 비준을 거부한 것이다. 상·하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은 국제연맹 규약이 그동안 미국이 지켜온 외교적 전통에 배치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윌슨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이를 통해 의회를 압박하려고 시도했는데, 의회의 권위를 위협하는 처사라며 역효과만 냈다. (이 와중에 윌슨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까지 한다) 결국, 1919년 11월 19일 미국 상원은 국제연맹규약을 최종 부결시켰다.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한 나라가 정작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못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미국이 빠짐에 따라 국제연맹도 허울뿐인 기구로 전락해버렸다.

이러한 실패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뿌리 깊은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 192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윌슨이 세계 평화의 영웅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공화당 지도부의 몽니 등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큰 실수는 윌슨에게서 나왔다. 윌슨은 14개 조항을 만들고 국제연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회, 특히 야당인 공화당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전후 처리회담의 대표단에 공화당을 포함시키라는 참모들의 건의도 거절했다. 그가 공화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국제연맹규약이 제정되고, 의회에 비준을 요청한 이후의 일이다. 만약 그가 준비 단계에서부터 공화당에게 이 문제를 설득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3년이란 시간이 있었으니 분명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아울러, 멕시코와 국제연맹 문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내부, 혹은 같은 편 간에 의견통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뜻에서 좋은 일을 추진하더라도 내부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면 일의 추동력을 얻기 어렵다. 외부의 반대보다 내부의 반대가 일을 성공시키는데 더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31호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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