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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한가위’ 11인의 시선 | 조지선-식습관] 천고마비 계절의 ‘슬기로운 음식 생활’ 

 

식습관 결정하는 것은 의지 아닌 환경… ‘거리’가 ‘선호도’를 이긴다

명절 후유증 리스트에서 육체적·정신적 피로감, 업무 복귀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빠지지 않는 단골 항목이 체중 증가다. 연휴가 끝나면 어김없이 허리둘레가 늘어나 있다. 추석 밥상 위엔 한국인의 입맛에 최적화된 음식이 가득하다. 기름으로 반짝반짝 코팅된 각종 전과 갈비찜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으랴. 송편으로 추석다운 식사를 마무리하면 한 끼 권장 열량의 두 배 섭취하게 된다.

체중 관리에 힘쓰는 사람에게 추석은 최대 위협이다. 평소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의지력을 발휘하면 명절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 한 가지 나쁜 소식은 음식 섭취량이 결심이나 의도보다 나를 둘러싼 ‘음식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절제를 위해 쓸 수 있는 의지력의 총량은 제한적이다. 추석처럼 하루 종일 먹는 분위기에서 버티다 보면 저녁 즈음엔 ‘에잇, 한 끼 쯤이야~’가 된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꾸로 보면 좋은 소식이기도 하다. ‘음식 환경’을 슬기롭게 조성하는 것만으로도 과식을 방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의지박약인 나도 환경만 잘 만들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섭식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보자. 물론 이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추석 이후의 일상에 훨씬 더 중요하다.

집과 야채가게는 몇 미터 거리에 있나요?

건강한 식습관을 갖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동네는 트리플 역세권이 아니라 야채가게가 즐비한 곳이다.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면 새 동네의 식품점 인프라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출퇴근 동선 상에 위치한 가게들의 면면을 살피면 앞으로 내가 어떤 음식을 섭취할지 대충 알 수 있다. UCLA 의대 연구팀 보고에 따르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과일·야채 섭취량은 신선한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마트가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는 곳에서 시장이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신선 식품의 섭취량이 줄어든다. 경제적 수준과 건강한 식습관에 대한 지식, 교육 수준과 성별, 나이 등을 통제한 후에도 주거지와 시장 사이의 거리 정보를 통해 건강에 좋은 음식을 얼마나 먹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집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뚱뚱한지 궁금하다면 그 집과 야채 가게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면 된다. 피츠버그 의대의 사나에 이나가미 연구팀은 LA 카운티에 사는 2600여명이 시장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얼마나 멀리 이동하는지 살펴보았는데 이동거리가 길수록 신체질량지수(BMI, body mass index)가 높았다. BMI는 신장과 체중의 비율을 사용한 비만지수다.

나의 식습관과 건강 상태가 오로지 나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가? 착각이다. 편의점과 패스트푸드 음식점이 골목마다 있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신선한 식재료를 파는 수퍼마켓과 일반음식점이 흔한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비만일 확률이 높다. 지역보건과학 전문가인 토마스 팔리가 이끄는 연구팀은 다양한 유형의 마트에서, 야채나 과일이 선반을 차지하는 공간과 정크 푸드가 차지하는 공간의 비율을 계산했다. 가장 낮은 곳이 편의점(0.1)이었다. 작은 식료품점(0.18~0.30), 중간 크기의 마트(0.40~0.61), 대형 슈퍼마켓(0.55~0.72)의 순서로 비율이 높아졌다. 자주 들르는 가게의 ‘신선식품 비율 지수’를 챙길 필요가 있다.

환경이 섭식을 지배하는 영향은 식당이나 마트 내부에서도 지속된다. 심리학자 플로어 크로세 연구팀은 기차역에 있는 몇몇 스낵가게들에서 음식 진열 방식을 바꿔보았다. 계산대 옆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건강한 음식을 놓았고 정크푸드는 매장 안쪽 다른 곳에 두었는데, 그 결과 건강한 음식의 판매량이 늘었다.

구내식당에서 학생들이나 직원들이 야채와 과일을 더 많이 먹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렬로 배치된 음식의 앞줄에 놓으면 된다. 사람들은 앞에 놓인 음식을 중간에 놓인 음식보다 더 많이 퍼간다. 심리학자 폴 로진이 이끄는 펜실베니아대학 연구진은 야채를 손수 담을 수 있는 샐러드 바 유형의 식당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종류에 상관없이, 앞줄에 놓인 야채들이 뒷줄에 놓인 야채들에 비해 인기가 많았다. 앞줄과 뒷줄 사이의 거리는 25.4㎝. 의미 없어 보이는 이 작은 거리가 섭취량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음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예민하게 살펴보자. 아보카도와 견과류, 고구마, 오트밀은 싱크대 상판에 자랑스럽게 전시해 놓는다. 연구에 의하면 과일을 보이는 곳에 놓아두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날씬하다. 탄수화물과 지방의 찰떡궁합인 감자 칩은 아예 구매하지 않는 게 좋지만 어쩌다 집에 들였다면 싱크대 수납장 안에 넣어 놓는다.

당신의 식습관을 바꾸는 거리 ‘25.4㎝’

많은 회사들이 공짜 간식거리를 제공하지만 과연 옳은 선택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구글은 직원들에게 공짜 음식을 후하게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경영학자 어네스트 바스킨 연구팀이 이곳에서 현장실험을 진행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르는 음료수 냉장고 옆에 스낵바가 자리하고 있을 때 직원들의 간식 섭취량이 늘어났다. 스낵바에서 멀리 떨어진 냉장고를 이용한 직원들과 비교했을 때를 보니 여성은 13%에서 17%로, 남성은 12%에서 23%으로 증가했다.

뇌의 보상센터를 환하게 밝히는 취향 저격 메뉴가 추석상에서 나를 유혹할 때 이를 거부하고 가을 햇사과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심리학자 그레고리 프리비테라와 패리스 주레캇의 연구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강한 중독성을 뽐내는 팝콘(미시간 대학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중독성 높은 음식 14위)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나 간단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사과(중독성이 낮은 음식 4위)를 더 많이 먹을 수 있다. 저쪽으로 스윽 밀어놓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나와 음식 사이의 거리다. 다양한 음식을 활용한 연구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거리’가 선호도를 이긴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음식 생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팁은 다음과 같다.

1. 추석상에서 고칼로리 음식은 멀리, 저칼로리 음식은 가까이 놓는다. 25.4㎝의 거리가 차이를 만든다.
2. 한 끼에 먹을 음식을 한 접시에 담아 양을 확인한다. 섭취한 음식량을 계산해서 알려주는 우리의 뱃속 저울이 영 신통치 않다는 게 다양한 연구들의 공통적 결론이다
3. 하루 종일 먹는 친척과 한 공간에 있지 않는다. 성적을 잘 받으려면 공부 잘하는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부도 비만도 전염된다. 가족이나 친구의 체중이 불어나고 있을 때 내 체중도 증가할 가능성이 커진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심리과학이노베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이다.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1553호 (20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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