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포인트의 가을 단풍과 거대한 허드슨강 절벽 위에 전시된 대포. ‘책무·명예·조국’이라는 핵심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풍광이다. |
|
가을이 아름답게 깊어간다. 얼마 전 손흥민 선수가 코스타리카전에서 그림 같은 프리킥을 성공시켰다.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관중은 열광했다. 그런데 모두 마스크를 쓰고 함성을 질렀다. 이틀 후인 9월 26일부터는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전면 해제됐다.한편 9월 8일에는 70년 동안 영국 연방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이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에 있는 밸모럴성에서 서거했다. 스코틀랜드와 런던에서 거행된 영국의 국장 기간 동안 영국방송공사(BBC)의 종일 생중계 방송을 매일 여러 시간 시청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엄수된 국장에선 전 세계 수많은 정상이 조문했다. 장엄한 분위기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는데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드디어 코로나 엔데믹이 코앞에 와 있는 것일까? 전 세계 인류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후 거의 3년이 지난 후에야 엔데믹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19 실시간 상황판을 보면 2022년 10월 8일 현재 전 세계 확진자가 6억2100만 명을 돌파했고, 사망자는 656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도 확진자가 2500만 명이 넘고, 사망자는 2만8000명을 넘어섰다. 미국은 확진자 964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106만 명을 돌파했다. 인도는 확진자 4460만 명, 사망자는 552만9000명이 넘었다.2020년에는 새해 벽두인 1월 초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소비자가전전시회)를 참관했다.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수많은 기업이 신기술과 신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전시장 곳곳을 방문하며 많은 정보를 얻었다. 출장을 잘 마치고 귀국했는데, 직후인 1월 20일 국내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뒤 급격히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가 휘몰아쳤다. 전 세계에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움직임이나 행동에 제재(Lockdown)가 이어졌다.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등 거대 도시에서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는 텅 빈 거리가 뉴스로 보도됐다. 해외 출장이나 여행도 사라지는 듯했다. 이렇듯 무서웠던 팬데믹이 이제 거의 3년 가까이 지나면서 막을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포가 지배한 팬데믹 초기 출장
▎팬데믹이 확산되고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던 2020년 말 인천공항 출입국장의 분위기. |
|
팬데믹 기간 동안 세 차례 미국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 느낌을 기록과 사진으로 남겨놓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2020년 12월 마지막 주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했다. 당시는 코로나19 백신이 나오기 전이라서 여행객이 거의 없을 때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출국하는 여행객을 내려주는 곳에 자동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주차장처럼 차가 많던 곳이다. 체크인을 위해 공항 청사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건물이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사람을 찾기 어려운 건물은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다.출국수속과 보안 검색을 마치고 휴식을 위해 항공사 라운지를 찾았다. 평소 같으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항공기 탑승을 위해서 게이트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벼야 하는데,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이동하는 사람들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항공사 라운지도 사람이 없으니 한 장소로 통합해 운영하고, 제공하는 음식도 도시락뿐이었다. 마스크를 내리고 음식을 먹기가 여간 신경 쓰이지 않던 시기였다.기내에서 사용할 마스크 여러 개와 비닐장갑, 병원용 위생 고무장갑을 챙겨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항공기 승무원들은 방호복을 입고, 투명한 얼굴 가리개(face shield)를 쓰고, 비닐장갑을 착용한 채로 승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13시간 남짓 비행하는 동안, 출발 전의 긴장감이 조금은 풀려서 여유로운 느낌으로 식사도 하고 잠도 자며 시간을 보낸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마스크를 철저히 쓰고 비닐장갑도 계속 착용했다.드디어 창밖으로 뉴욕이 눈에 들어왔다. JFK공항에 내려서 입국수속을 하고 짐을 찾아서 나오는데 사람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금방 나왔다. 코로나가 심각한 시기인데도 뉴욕공항은 평소 출장 다닐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아 놀라웠다. 검역 절차도 까다롭지 않았고,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도, 특별한 확인 절차도 없었다. 격리 제한도 전혀 없었다. 그래도 코로나가 심각한 시기인지라 무척 긴장한 채 항상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을 씻으며 조심스럽게 일정을 소화했다.
백신도 없고 귀국 후 2주 동안이나 격리해야 했던 시절에 미국 출장을 시도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는 H마트 권 회장께서는 코로나 기간 동안 미국 및 한국 출장 횟수를 오히려 더 늘렸다고 했다. 공항이나 비행기는 방역이 잘되어서 안전하고 여행객이 없어서 출장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사전에 출장 사유를 신고하면 귀국 후에도 격리를 면제해주는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격리소에서 1박 후 PCR 검사에 이상이 없으면 됐다.
▎백신이 개발되고 오미크론 대유행이 오기 전인 2021년 가을,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는 절반 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 |
|
2021년 새해 벽두에 귀국하니 인천공항 분위기는 자못 살벌하다는 느낌마저 자아냈다. 방호복과 얼굴 가리개를 한 요원들이 까다로운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복잡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격리소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많은 외국인과 뒤섞여 탄 버스는 만원이라서 내심 그 안에서 감염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맨 앞에는 경찰관이 탑승해 함께 이동했다. 무척이나 춥고 캄캄한 겨울밤에 알지도 못하는 격리소(호텔)에 내려서 다시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수속을 마친 후에 방으로 올라갔다. 생수 2병과 컵라면을 나누어주면서 방에 올라가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방에 들어가 붉은색 비닐 쓰레기봉투를 보니 썰렁한 기분이 들고 마치 어딘 간에 감금된 듯한 느낌이었다.2시간 정도 대기하고 앉아 있으니 방호복으로 완전무장(?)한 간호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코와 목 두 곳을 면봉으로 찔러서 PCR 검사를 위한 표본을 채취해갔다. 기분이 그저 그런 상태로 웅크리고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을 맞았다. 아침식사로 도시락이 배달됐는데 내용물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거의 다 남겼다. 정오가 지나서 음성 판정을 받고 해방됐다. 그 후 앱을 설치하고 2주 동안 매일 보건소 전화를 받으며 점검받았다.
사회적 핵심 가치 재점검해야
▎허드슨강 건너 뉴저지에서 촬영한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풍경. 팬데믹 기간에도 많은 고층 건물이 새로 건설됐다. |
|
2021년이 되자 드디어 백신이 도입됐다. 6월과 8월에 1·2차 접종을 했다. 그리고 11월이 되어 다시 미국 뉴욕, 보스턴, 프로비던스에 출장을 다녀왔다. 출국 전후에 PCR 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출입국 절차는 격리 조치가 해제돼 많이 간소해졌다. 뉴욕 맨해튼 중심지인 타임스퀘어와 록펠러센터 스케이트장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20%도 안 돼 보였다. 보스턴 사무실에서는 ‘턱스크’를 한 사람이 몇몇 보일 뿐, 대부분 마스크를 벗은 채 회의했다. 프로비던스 공장을 방문했을 때는 생산직 직원들이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출장 온 필자는 유일하게 마스크를 쓰고 공장을 돌아봤다. 백신을 두 차례 접종한 탓에 지난해처럼 크게 긴장하지 않고 일정을 잘 마쳤다. 미국 동부의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미국에서 귀국하기 전날 반나절가량 여유가 생겨서 오랜만에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시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 미국에서는 육군사관학교를 일반적으로 ‘웨스트포인트’라고 부른다. 옛날 뉴욕에 주재할 때 종종 드라이브를 즐겼던 아름다운 팰리세이즈 파크웨이(Palisades Parkway)를 달리며 중간중간에 있는 전망대(Outlook)에 차를 세우고 허드슨강 변의 풍광도 가끔 내려다보았다. 울긋불긋 자연을 물들이며 불타는 듯한 단풍을 보며 웨스트포인트에 도착했다. 거대한 허드슨강이 휘감고 있고, 그 절벽 위에 자리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명승지다. 돌로 지은 학교 건물과 그 주위를 물들인 붉은 단풍이 밝은 가을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교정에는 수업을 마친 사관생도들이 다음 수업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고, 조깅하는 장교들도 보였다. 건장하고 패기 있는 생도들을 보니 태릉 사관생도 시절의 옛 추억이 가슴을 울리며 지나갔다. 웨스트포인트는 그랜트 대통령, 아이젠하워 대통령, 맥아더 장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날린 패튼 장군, 걸프전의 영웅 슈워츠코프 장군 등 걸출한 국가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사관생도들을 교육·훈련하고 영감을 주어서 각 졸업생이 책무, 명예, 조국이라는 핵심 가치에 헌신하고, 미국 육군 장교라는 경력을 통해 직업적 성장을 하고, 평생 국가를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는 사명(Mission)을 갖고 있다.
언덕 위에 오르니 가장 큰 석조건물인 교회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교회 안 중앙 통로로 걸어 들어가면 우측 맨 앞좌석 단상에 역대 육사 교장의 서명이 새겨진 은빛 명패들이 있는데, 유구한 학교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듯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최연소 교장으로 3년간 복무한 맥아더 장군이 서명한 명패도 그곳에 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행한 맥아더 장군의 ‘책무·명예·조국’에 관한 유명한 연설을 상기하며 그 깊은 의미를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하며 음미해보았다.
▎뉴욕 맨해튼에서 허드슨강을 가로질러 뉴저지주를 연결하는 조지워싱턴다리(George Washington Bridge). 팬데믹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에 서 있다. |
|
2021년 12월에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을 했다. 2022년 봄에는 오미크론 변이가 대유행했고 3월에 드디어 필자도 감염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이어 여름인 8월에 세 번째 뉴욕 출장을 떠났다. 이번에도 출국 전후 PCR 검사가 요구됐지만 격리는 없었다. 이제 백신도 많은 인구가 맞을 만큼 맞았고, 치료약까지 나와서 그런지 공항에도 여행객이 많았고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미국에 도착해보니 역시나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로소 코로나 상황이 엔데믹을 향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이라는 고난의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가 자신감을 찾아가는 것 같다.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비대면, 재택근무, 확진자, 격리 같은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졌다. 어떤 산업은 오히려 큰 기회를 맞았고, 어떤 산업은 엄청난 위기에 맞닥뜨렸다. 개인이 병치레를 심하게 하면 마음의 축이 흔들리고, 사회가 팬데믹과 같은 위기를 겪고 나면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온 사회가 전염병으로 인한 위기 상황을 지나오면서 흐트러질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핵심 가치를 재점검하고 재확립해야 할 때다.사람은 특히 주변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예(禮)’가 선진 국가의 사회적 규범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한다. 요즘 주변에서 종종 품격 없고 무례한 장면을 보면 공자께서 『논어』에서 말씀하신 문장이 떠오른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특히나 한국인은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해 팬데믹 위기를 지나온 기간이 ‘예’로써 선진적 질서를 굳건히 한 발전적 마감이었길 갈구한다. 그렇게 엔데믹이 안착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국방과 세무 등 책무(Duty)를 다하는 보통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 119 대원, 군인들과 함께 명예(Honor)로운 삶을 사는 국민이 존중받는 선진국이 되길 바란다.
※ 이강호 회장은…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덴마크에서 창립한 세계 최대 펌프제조기업 그런포스의 한국법인 CEO 등 37년간 글로벌기업의 CEO로 활동해왔다. 2014년 PI 인성경영 및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 2세 경영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 코칭을 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