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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31) 기업인이 본 CEO 칭기즈칸 

 

별 볼 일 없던 테무친이 어떻게 칭기즈칸이 되었을까? 칭기즈칸도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이었다. 몽골 비사에서는 칭기즈칸이 핏덩이를 손에 쥐고 태어나서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이었다고 하지만, 잘나가는 칭기즈칸 후손들이 조상을 미화하려고 만들어놓은 신화에 불과하다.

칭기즈칸은 어렸을 때부터 영웅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개를 무서워했고 잘 울었다. 부족들이 이사를 갈 때 그를 깜빡 잊고 놔두고 간 일이 있을 정도로 주목받는 자식도 아니었다. 그가 8, 9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예수 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하자 여자와 아이들만 남은 칭기즈칸 집안은 같은 부족에서도 버림받고 쫓겨났다. 부족에게 버림받은 여자 2명과 아이 7명은 부르칸 칼둔 산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며 짐승처럼 살아갔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페르시아 역사가 아타 말릭 주베이니는 저서 『세계정복자의 역사』에서 이 가족은 “개와 쥐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음식 역시 그런 짐승과 다른 죽은 짐승의 고기였다”라고 기록했다. 그의 가족은 야생 마늘과 양파, 작은 화살로 잡은 새, 조그만 낚시 도구로 잡은 물고기 등을 먹으며 연명했다. 이 무렵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굶어 죽었다. 칭기즈칸도 굶어 죽을 뻔했을 것이다. 다른 남동생은 그보다 힘도 셌고 활도 잘 쏘았고 씨름도 잘했다. 배다른 형 벡테르가 그를 부려먹고 괴롭히며 음식을 독차지하자 동생과 같이 화살로 쏴 죽였다. 배다른 형을 죽인 칭기즈칸은 부족들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해 산속으로 도망가 살기도 했다. 그가 싸움을 잘하고 활을 잘 쐈다는 기록은 없다. 게다가 평생 일자무식이었다. 칭기즈칸은 중국이나 페르시아의 학자들 앞에서 자신은 글도 못 읽는 무식쟁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조언을 구했다. 실수했을 때는 아랫사람에게도 즉시 미안하다고 했다.

가장 빈곤했던 몽골


▎칭기즈칸이 주웠던 황금 채찍을 크게 만들어놓은 조형물이 칭기즈칸 마동상 건물 로비에 놓여 있다.
당시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저명한 사학자 잭 웨더포드에 따르면, “쇠로 된 등자 하나만 있어도” 가장 높은 지배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등자란 말에 오른 사람의 발을 받쳐주는 받침대를 뜻한다. 훗날 칭기즈칸이 된 테무친은 자신의 의형제인 ‘자무카’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귀한 선물이란 게 겨우 양의 복사뼈에 조그만 놋쇠 조각을 박아 넣은 물건이었다.

그 당시 고려에서는 시장통마다 놋쇠그릇이 굴러다녔음을 생각해보면, 이게 선물할 만한 물건으로 통용된 초원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중국 북부쯤에서 매매되거나 약탈된 놋쇠 물건 하나가 칭기즈칸이 사는 몽골고원 북동쪽 외진 동네로 흘러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원래의 형체를 잃고 해체되고 조각났을 것이다. 그 찌그러진 쇳조각 하나를 박아 넣어서 귀해진 복사뼈였을 것이다. 참고로, 몽골 아이들은 짐승의 복사뼈를 주사위나 공깃돌로 쓴다. 칭기즈칸은 1203년 41세 때 타타르를 정복하고 금나라에서 100명을 이끄는 대장인 백부장 직위를 받고 기뻐서 열광했다. 그는 툭하면 울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 카리스마의 화신도 아니었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제국을 침공하기 직전에 중국의 한 도교 승려에게 보낸 편지에는 칭기즈칸 자신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칭기즈칸의 목소리는 소박하고, 명료하며, 상식적이다. 그는 적들이 망한 것을 자신의 우월한 힘이 아니라 적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소.” 그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오만과 지나친 사치” 때문에 주변의 문명을 벌했다고 말했다. 칭기즈칸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계속 소박하게 살았다. “나는 소 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그는 자신의 이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나는 사치를 싫어하오. 또 나는 절제를 하고 있소.” 그는 백성을 자식처럼 대접하려고 노력했으며, 재능 있는 사람들을 출신에 관계없이 형제처럼 대했다. 그는 자신과 관리들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고 또 존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소.”

800년 전 몽골고원 동북쪽 산림과 초원이 맞닿은 곳에서 지구상 가장 극빈층으로 살았던 칭기즈칸이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20년 이상 기업경영을 해온 필자는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칭기즈칸이 어떻게 스스로 오랜 기간 동기부여를 해왔을까?”를 오랫동안 연구했다. 그도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성장 동력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결핍’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칭기즈칸은 성장기에 겪은 혹독한 결핍을 자기발전과 조직원리, 세계전략으로 승화해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정복활동.
칭기즈칸의 성장사를 보면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이 고난을 겪으면서 강철같이 강인한 세계사적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감동이 느껴진다. 그는 어린 시절, 청년 시절에 처했던 가혹한 생존 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결핍을 극복할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서로 살인을 하고, 납치를 하고, 노예로 삼았던 몽골초원의 혹독한 환경에서 칭기즈칸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욕망, 야망, 잔혹 등 극한적인 인간 감정을 경험했다. 그는 이렇게 살벌한 환경에서 강렬한 생존본능을 보여줬으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바꾸었다. 굶주림, 갖은 수모, 납치, 노예생활이라는 처절한 환경에서 그는 권력을 향한 긴 계단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개인적인 목표, 욕망, 공포는 유라시아 대륙을 삼켜버렸다.

정복자 칭기즈칸


▎칭기즈칸 마동상 건물 로비에 전시된 부츠, 모전으로 안감을 댄 두꺼운 겨울용 가죽부츠는 표준 품목이었다. 말 등자에 늘 발을 걸치고 생활하는 몽골족의 신발에 굽이 없다는 것은 좀 특이하다.
칭기즈칸은 처음부터 세계 정복의 야망을 가진 정복자가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지내고 싶었겠지만 몽골초원의 혼탁한 정세는 여유 있는 목가적 삶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12~13세기, 물도 나무도 없는 황량한 몽골 땅을 떠도는 유목민에 불과했던 칭기즈칸은 세상이 허용하는 모든 악조건과 고난을 극복하고, 오랜 전란과 분열에 시달리던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그 바탕에는 죽을 때까지 문맹이었고 유목과 약탈, 전쟁이 삶의 전부였던 그가 이룩한 혁신적 조직 모델이 자리했다. 자기 부족과 친척에게도 외면당하고, 쥐를 잡아먹으면서 가족을 부양하면서 컸던 이 남자는 자기 식구, 부족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목수, 대장장이, 양치기, 노비를 데리고 정복전쟁에 나섰다. 그는 해마다 자기보다 센 적들을 물리쳐 결국 몽골초원의 모든 부족을 정복했다.

대부분의 정복자가 전쟁터에서 물러나는 오십 나이에 그는 수백 년 동안 유목민족을 괴롭히고 노예로 부려온 문명의 군대와 다시 맞섰다. 고비사막과 황하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의 땅을 통과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지르는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에 이르는 동안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운 조직과 질서로 몽골이라는 민족공동체를 창조해낸 칭기즈칸이 정복한 영역은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끝인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유럽의 폴란드, 헝가리까지 이어졌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그의 정복지는 면적으로 따지면 777만㎢에 달했다. 이것은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었다. 당시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인은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서 유교와 이슬람, 기독교 등 다양한 문명권에 속하는 2억 명을 지배했다.

사람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칭기즈칸의 탁월한 능력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40년 넘게 계속된 전쟁을 치르면서 현장에서 배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고 치밀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전쟁을 수행하는 천재적 능력,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리더십, 세계적인 규모의 조직을 꾸려나가는 시스템 등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공식 교육에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도 도교의 도사 등 석학들을 일부러 초대해 대화를 하며 배우기도 했지만 그의 공부는 40여 년 넘게 철저히 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열린 마음으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문제해결 의지와 실용적 학습, 꾸준한 피드백과 수정, 냉철한 반성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험난한 삶에서 단련해온 강인한 정신력과 집중력을 잃지 않는 의지가 있었다. 한국 재벌 2~3세들의 양성과정을 보면 정해진 패턴이 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한국으로 돌아와 글로벌 컨설팅 회사, 투자회사 등 이름 있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아버지 회사의 기획실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다가 회장님이 되는 과정이다. 이 재벌 후계자들이 현장에서 피 터지게 영업을 하거나 생산, R&D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별로 없다. 송월타올 회장은 자식에게 베트남 오지에 있는 공장에서 3년간 생산부장으로 일하게 했다는데 이런 현장 경험이 하버드 MBA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교육일 것이다.

1203년 칭기즈칸의 몽골족이 타타르라는 큰 부족을 물리친 후에 칭기즈칸은 자신의 무리를 ‘모전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전벽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그가 타타르 부족과 통합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41세 칭기즈칸이 초원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작은 부족의 수장 칭기즈칸이 아니라 몽골초원 전체의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같은 해인 1203년에 일어난 ‘발주나 맹약’은 칭기즈칸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이 양아버지 옹칸의 배반으로 전쟁에서 패하고 굶주리며 도망한 끝에 도착한 곳이 진흙탕이었던 발주나 호수였다. 그때 남은 병사는 겨우 19명이었고, 그들 앞에서 칭기즈칸은 이렇게 연설했다. “나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룩하도록 도와주소서.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이 모든 사람을 기억하소서. 만일 내가 이 말을 어기면 이 흙탕물처럼 되게 하소서”라고 하자 병사들은 ‘신의와 충성’을 맹세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19명은 무슬림, 불교도, 기독교인으로 종교도 서로 달랐고, 몽골족이라고는 친동생 카사르뿐이었다. 종교와 부족도 다르지만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된 것이다. 텡그리를 믿는 샤먼(무속)신앙과 불교, 기독교(네스토리우스), 이슬람교를 제각기 믿었으며, 언어조차도 몽골어, 타타르어, 투르크어, 위그르어, 아랍어 등 다양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당시 기준으로 가장 세계화된 집단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창건 초기부터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를 포용하고 세계적 통합을 가능케 하는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발주나 맹약 후 19명으로 탄생한 결사체는 친족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해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결사체에 가까웠다. 이 결사체는 칭기즈칸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였으며, 이 결사체가 결국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정복하는 데 기초가 됐다.

※ 김정웅 대표는… -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211호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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