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에너빌리티는 미국의 유력 SMR 기업 3곳과 기자재 제작 관련 협약을 맺는 등 ‘SMR 파운드리’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형 원전 시공 경험을 토대로 1:1 맞춤형 설계 컨설팅 서비스를 마련해 SMR 시장에 접근한 것이 주효했다. 설계 용역에서 시제품 생산, 기자재 제작으로 이어지는 시장 공략 전략이 통한 것이다. 김종우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BG 상무에게서 앞으로의 청사진을 들었다.

▎체코 원전 수주 승리를 이끈 ‘팀코리아’ 멤버인 김종우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BG 상무는 대형 원전에 이어 SMR 시장에 도전한다. / 사진:두산에너빌리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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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무렵 글로벌 소형모듈원자로(SMR·Small Modular Reactor) 시장이 활성화될 전망이지만 아직까지 실제로 SMR이 상용화된 사례는 전무하다. 인공지능(AI) 업계에서 엔비디아가 가지는 존재감만큼 SMR 업계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기업도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뉴스케일파워, 홀텍, 웨스팅하우스 등과 영국의 롤스로이스, 스웨덴 칸풀넥스트 등이 이른바 ‘SMR 춘추전국시대’를 이끌고 있다.SMR 건설을 눈앞에 두고 실패한 사례도 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SMR 설계 인증을 받은 뉴스케일파워는 기술력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지만 2023년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당시 뉴스케일파워는 미국 유타주에서 SMR 실증 사업을 추진하던 중 투입 비용이 예상보다 늘어나면서 결국 사업을 취소했다. 높은 기술력에 걸맞은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었다. SMR 선두 주자로 통하던 뉴스케일 파워가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프로젝트를 정해진 예산으로 예정대로 완료)’이란 난제를 극복하지 못하자, 이해관계에 따라 SMR 기업들의 연합이 강화되는 추세다.합종연횡이 거센 가운데 해외 SMR 기업이 한국 대형 건설사에 러브콜을 보내는 사례도 늘고 있다. 그중 두산에너빌리티는 이미 미국의 주요 SMR 기업 3곳(뉴스케일파워, 엑스에너지, 테라파워)과 기자재 공급 관련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지난 2022년 두산에너빌리티는 뉴스케일파워와 SMR 소재 제작 계약을 맺었고 2023년에는 엑스에너지와 핵심 기자재 공급 협약을 체결했다. 엑스에너지와의 협약은 앞서 2021년 두산에너빌리티의 설계 용역 계약에서 진전된 것이다. 김종우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BG(사업부문) 상무는 “SMR 개발사가 설계에 전념하고 제작과 관련한 모든 것은 두산에너빌리티(이하 두산)가 전담하겠다는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이라고 설명했다.“SMR 산업을 살펴보니 대다수 SMR 개발사는 제작 전문성이 부족한 스타트업이었어요. 두산은 이들에게 제작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SMR 제작사(Fabricator)로서 시장에 접근했습니다. SMR 개발사에 1:1 맞춤형 제작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SMR 시제품을 생산하면서 두산의 제작 능력을 입증하는 데 주력해왔습니다.”두산의 시장 공략 전략은 지난해 12월에도 빛났다. 두산은 빌 게이츠가 설립한 SMR 기업 테라파워와 SMR 주(主)기기 제작 관련 계약을 체결했다. 테라파워 초도호기 SMR 기자재의 제작 가능성을 검토하고 설계를 지원한다는 것이 계약의 골자다. 이로써 두산에너빌리티가 테라파워의 주기기 3종(원자로보호용기, 원자로지지구조물, 노심동체구조물)을 제작할 가능성도 높아졌다.업계 주목도가 높아진 두산에너빌리티는 지난 2월 진행된 기업설명(IR) 콘퍼런스콜에서 SMR 기자재 시장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회사 측은 IR 보고서에서 “다수의 SMR 개발·설계사와 협력함으로써 향후 5년간 SMR 60기 이상을 수주할 전망”이라며 “최근 SMR 시장의 강력한 가속화 모멘텀을 고려할 경우 수주 규모가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설계 용역으로 시장 접근…주기기 제작 계약 달성
▎경상남도 창원에 자리한 두산에너빌리티 주·단조 공장은 SMR 핵심 기자재와 소재를 모두 생산한다. / 사진:두산에너빌리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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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무는 지난해 체코 원전 수주전에서 승리를 거둔 ‘팀코리아’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성과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SMR 협력을 위해 전 세계를 동분서주했다. 체코 수주전만큼 기대가 큰 분야가 SMR 시장이기 때문이다. 김 상무는 “업계에서는 2030년 무렵 SMR 시장이 개황할 것으로 보지만 시장은 올해나 내년부터 활황을 보일 전망”이라며 “2030년 SMR로 전기를 생산하려면 늦어도 내년부터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다양한 형태의 프로젝트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는 만큼 두산은 SMR 기자재 제작사로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라며 “시장 수요에 발맞춰 공급 물량을 점진적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김 상무는 두산의 최대 강점으로 고객의 다양한 요구 사항에 부합하는 SMR 제품 생산력과 첨단기술, 축적된 노하우 등을 꼽았다.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5만4840㎡(약 1만6600평) 규모 생산공장은 두산의 보배와도 같다. 이곳에는 기자재를 제작하는 주·단조 공장과 핵심 소재를 생산하는 단조(금속 가공) 공장이 모여 있다. 김 상무는 “단조 공장과 주조 공장을 한곳에 구축한 회사는 전 세계에서 두산이 유일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신기술 확보에도 매진한 결과, 두산은 약 5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나선형 증기발생기 튜브 제작 기술과 양면 클래딩(Cladding, 양면에 다른 금속을 접합하는 용접) 기술, 로봇 검사기술 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김 상무는 “두산은 첨단 제작 기술로 경쟁사와의 초격차를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금속분말 열간등방압성형(PM-HIP)과 전자빔 용접 등 최첨단 기술 상용화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PM-HIP는 금속 분말 소재를 고압·고온으로 등방압축(압력을 균일하게 가함)해 성형하는 기술을 말한다. 김 상무는 “기술 상용화에 성공하면 품질을 고도화할 뿐 아니라 제작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약 40년간 원전 주기기를 공급해온 두산은 탄탄한 시공 역량과 나름의 노하우를 쌓아왔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김 상무는 “국내에서 대형 원전과 SMR 주기기 모두 제작할 수 있는 회사는 두산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능력은 협력사 덕분이기도 하다”며 “여러 협력사가 협조해준 덕분에 제작 물량을 확대하고 공정을 최적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협력사를 비롯한 원전 중소기업을 위해 정부를 향한 당부의 말도 남겼다.“글로벌 SMR 시장에서 한국이 막강한 입지를 구축하려면 중소기업이 잘돼야 합니다. 이들이 일감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부가 정책적인 지원을 지속해야 해요. SMR 제작 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해 이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길 바랍니다. 투자와 고용이 선순환을 이룬다면 SMR 생태계가 더욱 활성화되리라 봅니다.”두산의 목표는 글로벌 SMR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김 상무는 “SMR 파운드리라는 모토를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회사가 두산”이라며 “두산은 다양한 강점을 살려 전 세계 1위 SMR 파운드리라는 위상에 부합하도록 부단히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