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SMR 산업을 선도하는 해외 기업 다수가 한국의 원전 기술 노하우에 주목하고 있다. 기업 간 합종연횡이 빈번한 가운데 국내 기업의 활약이 기대된다. 국내 SMR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정부의 일관된 원전 정책과 지원 방안, 지역 경제 활성화 계획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6월 테라파워는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4세대 SMR 실증단지 공사를 시작했다. 착공식에는 테라파워 창업자 빌 게이츠(가운데)와 크리스 르베크 CEO(왼쪽 다섯째), 마크 고든 와이오밍 주지사(왼쪽 셋째)가 참석했다. / 사진:SK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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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전력 공급원이다”.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소형모듈원자로(SMR·Small Modular Reactor)의 장점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 경영 일선에서 떠난 이래 기후변화 대응에 앞장서온 빌 게이츠는 지난 2008년 SMR 스타트업 테라파워를 설립했다. 이 밖에도 빅테크(거대 기술 기업)의 SMR 노크 사례는 많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2014년부터 오클로에 투자해 현재 이 회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빅테크 최초로 SMR 전력 구매 계약을 체결한 곳은 구글이다. 지난 2023년 구글은 미국 SMR 기업 카이로스파워가 개발 중인 SMR로부터 2039년까지 5GWe 규모 전력을 공급받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아마존과 메타도 SMR 전력 확보에 나섰다. 지난해 아마존은 엑스에너지를 비롯한 SMR 관련 기업 3곳에 투자를 단행했고 메타는 SMR 전력공급 계약을 위한 입찰 검토에 들어갔다.빅테크와 협력 계약을 맺었거나 논의 중인 SMR 기업은 전 세계 SMR 선두 주자로 꼽힌다. 이들은 각 정부의 지원 정책에 힘입어 SMR 첫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뉴스케일파워, 엑스에너지, 테라파워, 카이로스파워, 오클로 등 SMR 기업과 홀텍, 웨스팅하우스 등 대형 원전사가 SMR 산업을 이끈다. 영국에서는 롤스로이스와 코어파워가 선두 주자로 꼽히며, 스웨덴 칸풀넥스트와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OKBM, 덴마크 시보그 등도 SMR 산업을 주름잡고 있다.
韓 원전 생산 노하우와 해외 SMR 첨단기술의 결합
▎미국 SMR 기업 뉴스케일파워는 글로벌 SMR 선도 기업으로 통한다. / 사진:뉴스케일파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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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강자가 없는 SMR 산업 판도에서 관련 기업의 합종연횡은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이들은 고난도 원전 기술력을 갖춘 한국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HD현대(현대건설, HD현대중공업)와 두산에너빌리티, 삼성물산, DL이앤씨 등 국내 대형 건설사가 이들과 손을 잡았다. 2021년 일찌감치 미국 홀텍과 SMR 협력 계약을 체결한 현대건설은 지난 2월 300MWe급 SMR 2기 건설을 본격화한다고 밝혔다. 양사는 올 2분기 안에 설계를 끝내고 연말쯤 착공해 2030년 상업운전을 시작할 계획이다. 또 HD현대중공업은 테라파워의 4세대 SMR 나트륨(소듐) 원자로에 들어가는 핵심 설비 제작을 맡았다.SMR 주(主)기기를 생산하는 두산에너빌리티도 테라파워, 뉴스케일파워, 엑스에너지 등 미국 SMR 기업 3곳과 기자재 제작 관련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지난 1월에는 자회사 두산스코다파워가 체코 증시에서 기업공개(IPO)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두산에너빌리티는 SMR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으로 도약할 방침이다. 삼성물산은 미국 뉴스케일파워, 스웨덴 칸풀넥스트 등과 협력 중이다. 특히 빅테크 다수가 스웨덴을 데이터센터 확충 부지로 점찍으면서 지난해 스웨덴 정부는 2050년까지 SMR을 포함한 대규모 원전 건설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원자력 로드맵’을 발표했다. DL이앤씨는 엑스에너지가 개발 중인 원자로 ‘Xe-100’을 적용한 SMR 플랜트를 운영·유지·보수하는 기술 확보에 힘쓰고 있다.국내 유수 건설사들이 해외에서 SMR 파트너로 불리지만 업계에서 한국은 SMR 선도국에서 제외되는 분위기다. 원자로 노형 때문이다. 원자로는 노심에서 핵분열을 일으켜 발생한 열을 냉각해 전력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때 냉각재가 물일 경우 원자로 노형은 경수(산소와 수소가 결합한 물)로와 중수(산소와 중수소가 결합한 물)로 등으로 나뉜다. 이미 대형 원전에 적용된 바 있는 경수로와 중수로는 3세대 또는 3+(플러스) 세대 노형으로 불린다. 한국은 3세대 기술력이 높다는 평이다.이후 2020년대 들어 안전성과 경제성, 효율성(핵연료 활용성), 지속가능성(친환경성) 측면에서 더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는 4세대 원자로 개념이 등장했다. 고온가스로(HTGR)와 소듐냉각고속로(SFR), 용융염원자로(MSR) 등이 4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연료 활용률이 높고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은 4세대 개발에 뒤늦게 진입했다는 이유에서 SMR 후발 주자로 불린다. 하지만 사실상 전 세계 어디에도 3세대와 4세대 SMR을 상용화한 사례는 없다. 정홍화 한국원자력협력재단 정책기획 실장은 “4세대를 진보적 기술이라 본다면 한국이 뒤처졌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3세대 또는 3+세대 SMR의 안정성이 더 높다는 평이 우세하다”고 설명했다.한국은 이미 3세대 SMR 기술력을 입증한 바 있다. 지난 2012년 한국의 가압경수형 SMR ‘SMART’는 한국원자력안전위원회(NSSC, Nuclear Safety and Security Commission)의 표준설계 인가를 받았다. 지난해에는 완전피동형 기술이 적용된 SMART100에 대한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했다. 피동형은 외부 전원 없이도 안전설비가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을 말한다. 조진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진원자로연구소 소장은 “SMART는 두 번이나 표준설계인가를 받을 정도로 완성형에 가깝다”며 “건설 즉시 가동 가능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수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SMR 사업실장은 “1997년부터 SMART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력은 한국의 최대 강점”이라며 “대형 원전 건설 경험을 토대로 탁월한 기반 기술과 탄탄한 기자재 공급망을 마련한 점도 한국의 SMR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정부는 한국만의 차별화된 3+세대 노하우를 살려 한국형 SMR을 ‘혁신형 SMR(i-SMR, Innovative SMR)’이라고 명명하고 2023년 i-SMR기술개발사업단(이하 i-SMR사업단)을 출범시켰다. i-SMR사업단이 개발 중인 노형은 모듈형 가압경수로로, 1개 모듈당 전기 출력은 170MWe(4개 모듈 합쳐 700MWe가량이 발전 목표)다. 상용화 예상 시점은 2035년쯤이다. 김 실장은 “해외 선도 기업과 비교해 상용화가 2~3년 정도 늦을 것으로 판단한다”면서도 “한국의 강점을 토대로 해외 기업과 격차를 빠른 속도로 줄여나갈 것”이라고 관측했다.한수원은 4세대 SMR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김 실장은 “장기적으로 4세대 SMR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SMR 포트폴리오를 확장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물 이외 냉각재를 사용하는 4세대 SMR의 경우 국내 규제 체계가 미비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조 소장은 “현재 4세대 설계 준비 단계에 있는 만큼 이에 발맞춰 국가 규제기관도 인허가를 포함한 규제 체계 연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지역 강소기업과 함께 뛰는 원전 강국경상남도는 국내 원전 강소기업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유명현 경상남도 산업국장은 “경남은 원전 주기기 제조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를 중심으로 우수한 원전 중소·중견기업이 밀집해 있다”며 “국내 원전 관련 기업 321개사 중 79개사가 경남에 자리한다”고 설명했다. 경남도는 SMR 시장 활성화가 지역 경제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지난해 한수원은 지역의 SMR 기업을 독려하기 위해 푸드트럭 ‘행복충전소’를 마련했다. 첫 방문 지역은 경남 창원으로, 한수원은 원전 부품 제조기업 삼홍기계를 찾았다. 삼홍기계는 정밀한 가공 기술과 특수 용접 기술을 바탕으로 대형 원전과 SMR, 핵융합 발전설비 등에 필요한 다양한 부품을 생산한다. 제조공정에 자동화 용접 로봇을 개발·활용하는 등 기술혁신을 거듭한다는 평이다. SMR 제조 공간은 대형 원전에 비해 협소하기 때문에 로봇을 활용하면 생산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김홍범 삼홍기계 대표는 “SMR 수출을 통해 한국은 미래 먹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며 “원전 제조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의 관심과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경남 함안에 있는 비에이치아이(BHI)도 SMR 중견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경남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경남 SMR 국제 콘퍼런스’에서 BHI가 발표자로 나섰다. 일반적으로 원전 설비는 크게 1차 계통과 2차 계통 등으로 나뉘는데 BHI는 두 계통 모두 다룬다. 주요 생산 제품은 스테인리스스틸 라이너(SSLW), 격납건물 철판(CLP)과 격납건물 배관 관통부(CPP), 급수가열기, 복수기 등 원전 관련 기자재다. 김원 BHI 차장은 “국내 원전 시장이 탈원전 정책 기조에 따라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BHI는 원전 관련 인증을 갱신하며 원전 기업으로서 역량을 유지해왔다”고 말했다.정부의 일관된 원전 정책과 지원 방안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지난 2월 확정된 산업통상자원부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처음으로 SMR이 반영됐다. 산업부는 2035~2036년쯤 SMR 상용화 실증 1기를 가동할 계획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SMR이 최초로 정부 계획에 명시된 만큼 산업부는 신속한 상용화를 위해 실증 지원과 사업화 기반 구축, 지속적인 지원 등에 임할 것”이라고 전했다.‘세계 최대 SMR 클러스터’를 자처하고 나선 경남에도 눈길이 쏠린다. 지난해 열린 ‘경남 SMR 국제 콘퍼런스’ 행사에는 뉴스케일파워, 테라파워, 시보그 등 해외 SMR 기업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원자력기구(NEA)도 참석했다. 경남도는 SMR 설계에서 제조, 시험검사, 상용화에 이르는 전 주기 지원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경남도 원전산업 육성 종합계획(2023~2032년)에 따르면 SMR 제조 클러스터를 조성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수출기업을 육성할 방침이다. 하지만 i-SMR사업단은 충북 대전에서 활동 중이다. 이에 대해 유 국장은 “i-SMR사업단은 설계 인증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라며 “2028년쯤으로 예정된 설계 인증이 완료되면 실제 제품은 경남도 내 원전 기업이 제작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유 국장은 해외 SMR 기업 두 곳이 경남을 SMR 파트너 지역으로 선택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 테라파워와 덴마크 시보그가 경남과 SMR 업무협약을 맺었다”며 “경남은 국내를 넘어 세계 최대 원전 클러스터로 발전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경남에는 우수한 원전 제조 생태계, 원전 사업과 연계 가능한 제조업(조선, 방산, 항공 등)이 밀집해 있다”며 “해외 SMR 기업이 협력 파트너로 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설명했다. 경남도는 앞으로 기업 간 협력을 확대하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