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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3)] 근대 중국의 일본에 대한 인식 

본받아야 할 대상, 배타적 침략성은 경계 

서구화 뒤진 청나라, 개방 모델 배우려 유학생 대거 파견
일본 이웃나라 차별·멸시 여전, 영토·과거사 화해 멀어져


▎중국 화베이(華北)의 항일 벽화, 일본 귀(鬼)의 잔혹성이란 내용이다.
현대 일본인은 중국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는 언론의 부정적 이미지 보도가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일본 언론은 중국의 대기 오염, 인터넷 규제,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에 중국 선박 진입 문제 등을 보도한다. 일본 언론이 ‘중국은 무서운 나라’ ‘위험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일본 언론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일본의 여론조사기관인 ‘겐론(言論) NPO’는 2020년 11월 17일 제16회 일·중 공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인 가운데 중국에 비호감인 사람은 전년 조사보다 5%p 증가한 89.7%였다. 반면 중국에 호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인은 10%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45.2%로, 조사 시작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이 중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영토 문제와 공산당 체제 등이다. 중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는 역사 문제, 조어도 국유화 등이었다.

과거 동아시아의 주변국이었던 일본은 중국을 ‘스승의 나라’로 삼고 중국을 연구해왔다.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은 일본에 거의 흥미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정반대다. 일본은 중국을 백안시하다시피 하는 반면 중국은 일본을 짝사랑하고 있다.

과거와 현대의 상반된 현상은 문명의 흐름과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일본의 여론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 무관심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중국을 문명이 정체돼 있을 뿐 아니라 돈만 아는 천박한 ‘깡패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중국을 무시하고 있다.

중국이 일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메이지유신의 성공과 청일전쟁 후 중국의 현실 자각에서 비롯한다. 양국의 상호 관심의 시기를 거친 뒤로는 중국의 일방적인 일본 배우기가 시작된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도 이 시기 일본 유학생 대열에 오른다. 중국도 서양과 직접 접촉하긴 했지만, 근대에는 일본을 통한 서양의 수용이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중국인이 쓴 일본론(論)의 명저가 속속 등장한다. 황쭌센(黃遵憲)의 [일본잡사시(日本雜事詩)](1879), 다이지타오(戴季陶)의 [일본론(日本論)](1928), 저우쭤런(周作人)의 [일본관규(日本管窺)](1935~37) 등이 일본인들이 대체로 인정하는 일본론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중국인들의 일본 인식을 살펴보자.

초기에 일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도 낯설지 않은 당시 주일 청국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쭌센이다. 1880년(고종 17)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은 황쭌센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기증받아 귀국한 뒤 고종에게 바친다. 당시 동아시아의 생존 전략을 담은 이 책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의 외교 방향을 충고한 내용이다. 황쭌센은 책에서 조선 자강책으로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제시했다.

중국과 일본은 동문·동종(同文同種)의 나라?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루쉰.
얼핏 보면 그럴싸한 것 같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인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내용이 많다. 청 왕조와 조선과의 종속관계 강화, 일본·미국과의 연계, 그리고 그를 위해서 미국과 하루빨리 조약을 체결할 것, 통상을 확대하고 서구로부터 군사·공업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것 등이다. 조선의 부국강병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속국으로서, 화이질서(華夷秩序)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황쭌센의 주장이다.

황쭌센은 아편전쟁 발발 6년 후인 1948년에 태어났다. 태평천국의 난은 그가 2세일 때 일어났다. 그가 성장한 시대는 리훙장(李鴻章)과 정궈판(曾國藩) 등이 주도한 양무운동으로 인해 청나라가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온존(溫存)하면서 서양식 군사·공업 기술을 수용하던 때였다.

황쭌센은 1877년(메이지 10년) 일본에 참찬관으로 부임한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였다. 정치적으로 헌법과 의회가 제대로 체제를 갖추지 못하던 때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미국에 녹차가 수출되고 생사(生絲)가 개발되던 시대였다.

황쭌센은 일본에 체재하던 5년 동안 일본 여러 방면에 관한 자료를 대량으로 수집했다. 200수에 이르는 시가를 모아 [일본잡시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일본인들과 필담(筆談)을 나누며 정보를 취득했다. 황쭌센은 일본 한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서양 학문의 일방적 수용에는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또 메이지 유신의 긍정적 측면을 간과하기도 했다.

황쭌센의 호기심은 일본의 신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토(神道) 의식, 결혼과 장의(葬儀), 고단(講談, 이야기 낭송), 라쿠고(落語, 골계미 있는 이야기), 다도(茶道) 등 일상생활 속 사소한 것들까지 세심하게 관찰했다.

황쭌센은 문화적 친근감을 가지고 일본을 바라봤다. 황쭌센이 처음 일본에 왔을 때 히라도(平戶)의 정경을 기록한 글은 그 친근감을 잘 대변해준다. “석양이 붉게 물들 무렵, 논두렁 길을 따라 걷는데 보리 싹이 새파랗게 보였다. 민가 주변에 감자가 있길래 그걸 사려고 돈을 내밀었는데 받지 않았다. 민풍이 소박한 게 마치 도원(桃園)에 들어온 것 같았다.”

황쭌센은 근대 일본에는 당대(唐代)의 유풍(遺風)이 많이 남아 있다고 느꼈다. 그는 진나라의 서복(徐福)이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우기는 등 무리한 논지를 펴기도 했다. 하지만 도작(稻作) 문화의 원향(原鄕)은 중국 강남이며, 일본인과 중국인은 같은 한자를 쓰는 동종이라고 주장했다. 황쭌센은 중국인 최초의 메이지 유신의 세심한 관찰자인 동시에 일본과 중국은 ‘동종의 나라’라는 표현의 제창자다.

중국인 일본 유학생 10년 새 13명 → 1만2000명


▎주일 청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조선책략]을 쓴 황쭌센.
아편전쟁이 마무리뒨 뒤 양무운동이 일어난다. 중국의 정신에 서구의 기술·문명을 융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 양무운동의 핵심이다. 청조는 유학생 120여 명을 선발해 미국에 보낸다. 1872년 ‘유미유동(留美幼童)’이라 불리던 조기 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이다. 그러나 청조는 과도한 서화(西化)를 통한 오랑캐 사상의 주입이라 판단하고 10년 만에 이 프로그램을 폐지한다.

19세기 후반 청나라와 일본은 각자 서양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부가 가려진다.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을 개혁 모델로 삼아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근대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1896년 청나라 정부는 최초의 중국인 유학생 13명을 일본에 파견한다. 중국인의 일본 유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매년 유학생 수가 증가해 루쉰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해에는 600명에 이르렀고, 1906년에는 1만2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당시 일본에 온 중국인 유학생은 다양한 지식과 사상을 익혔다. 그들은 1911년 신해혁명 때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 서적을 번역해 청나라에 소개했다.

유학생들은 일본 생활에서 정신적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의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중국인에 대한 멸시가 점차 심해졌다. 청나라의 상징이라 할 유학생들의 변발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됐다.

루쉰은 1902년 일본에 유학해 고분학원(弘文學院)에서 2년간 일본어 등을 배운 뒤 센다이 의학전문학교(현 도후쿠대 의학부)에 진학했으나 1년 반 후 중퇴했다. 그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도쿄에서 [문예평론]을 집필하고 서구 문학을 번역했다. 루쉰은 소설 [후지노 선생(藤野先生)](1926)에서 자신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의학에서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후지노 선생은 매주 루쉰에게 강의 노트를 제출받은 뒤, 붉은색 잉크로 일일이 오류를 정정했다. 내용은 물론이고 세세한 문법적 오류까지 정성껏 지도해줬다. 루쉰은 크게 감동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학생들의 전 학기 성적이 발표됐다. 루쉰은 142명 중 68번째,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성적이 공개되자 동급생들은 후지노 선생이 첨삭지도를 해주면서 시험 문제를 루쉰에게 몰래 가르쳐준 건 아닌지 의심했다.

루쉰 “중국은 약소국, 중국인은 저능아” 탄식


▎일본 개화기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1만엔권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소문은 삽시간에 반 전체로 퍼졌고, 결국 반장은 루쉰의 노트를 검사했다. 그 후로도 반장은 익명으로 루쉰에게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다. 루쉰은 이를 민족 차별로 받아들였다. 뤼쉰은 “중국은 약소국, 중국인은 저능아”라며 “점수가 60점 이상인 건 내 능력이 아니다. 그들이 이렇게 의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며 울음을 삼켰다.

얼마 뒤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환등기 사건’이었다. 세균학 교수는 수업시간 도중 환등기로 러일전쟁과 관련한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그중 러시아 간첩 혐의를 받은 중국인이 일본군의 손에 목이 잘리려 하는 장면이 있었다. 화면 속 중국인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처형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순간 루쉰은 중국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술보다 문학이 더 중요하다고 깨닫게 됐다. 문학으로 민족정신을 고칠 수 있을 거라 확신한 것이다.

이처럼 센다이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있었지만, 평생의 스승으로 우러렀던 후지노 선생에 대한 추억은 루쉰의 일본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쉰은 후지노 선생을 통해 일본인의 ‘일과 학문’에 대한 열정과 근면함을 배웠다. 훗날 중일전쟁 때도 루쉰은 “일본을 배척하더라도 그들의 진면목,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만년에는 매국노(漢奸)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루쉰은 일본을 사랑하는 동시에 일본의 중국 침략은 증오했다.

중국인이 쓴 일본론 가운데 가장 체계적이라고 평가되는 책은 다이지타오의 [일본론]이다. 다이지타오는 쑨원(孫文)이 일본에서 활약할 때 그의 비서로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다. 다이지타오는 15세 때 일본에 유학한 이래 8년 이상 일본 체제를 경험했다. 그의 일본어 연설은 일본인보다 더 훌륭했다고 평가됐다.

다이지타오는 쑨원과 ‘국민혁명’을 함께했으며, 중국으로 귀국한 후 [일본론]을 저술, 1928년 출간했다. 이 책의 저술 의도는 명확했다. 중국인들에게 선진국 일본을 바라보며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의 일본론을 관통하는 기저에는 무사도와 상인 근성(町人根性)이 있다. 그는 “현대 일본 상류·중류계급의 기질은 ‘상인 근성’의 골격에 ‘무사도’의 옷을 걸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언했다. 메이지 유신이나 러일전쟁에서 나타난 일본인들의 무사적 자신감을 중국이 본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이지타오는 “구미는 숭배하면서 중국은 멸시하는 언행을 볼 때면 일본인들의 공도 정신(公道情神)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된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다이지타오의 일본론은 자신의 조국을 각성시키기 위한 외침이었다. 그는 중국과 비교해 일본이 우위에 있는 점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설명한다. 신앙심, 미적 관념, 조합의 능력, 남녀평등이다.

다이지타오에 의하면 사상은 생명과 합체해 비로소 신앙이 된다. 할복이나 동반자살인 ‘신쥬(心中)’에 나타나는 일본의 독특한 자살 관념마저도 이 신앙의 순수함 가운데 하나로 봤다. 그는 중국은 이익만을 말하며 계산만 따지는 국민이라고 자탄(自嘆)했다. 다이지타오는 신앙 없이 민족의 소생은 없다고 일갈하며 신앙의 진실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인들은 중국인들과 비교했을 때 대체로 미적 정서가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다이지타오는 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도덕의 진보를 바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인의 상무(尙武)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것은 평화와 조화를 이뤘을 때 비로소 때 돋보인다. 다이지타오는 일본 사회의 상무 정신이 평화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고 봤다. 평화가 상무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줌으로써 상무 정신이 일본 전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무와 평화이 두 가지 요소의 일체화는 신도와 불교(또는 중국 문화)의 융합, 신앙심과 미를 사랑하는 마음의 조화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뛰어난 조합의 재능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약자 보호하던 무사도 정신, 호전성으로 변질


▎일본과 중국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에 한창이던 2012년 8월 중국 베이징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반일 시위대가 일장기를 불태우고 있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무사 정신은 남녀 관계에도 적용된다.” 일본 역시 남존여비 사상이 있긴 하지만, 중국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일본에서는 강자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중국처럼 가장이 자신의 책무를 회피함에 따라 발생하는 가정고(家庭苦)가 드물다고 다이지타오는 진단했다.

그러나 다이지타오는 일본 민족의 특징이었던 윤리성과 무사도에 나타난 상무 정신이, 그가 일본을 방문했던 1927년 무렵에는 몹시 황폐화됐다고 개탄했다. 그는 평화에서 비평화로, 신앙심에서 미신으로 일본 민심이 변했다며 탄식했다. 원래 상무 정신과 평화는 ‘한 몸’과도 같았다. 그런데 평화가 이탈함에 따라 상무 정신이 호전성(好戰性)으로 변질했다고 다이지타오는 본 것이다.

[일본관규]를 지은 저우쭤런은 루쉰의 동생이다. 루쉰과 비슷한 시기에 6년간 일본에서 유학했는데, 도쿄에서 ‘완전한’ 일본식 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일본어·영어·그리스어 등을 공부했으며 일본 문학과 일본 문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의식주를 포함한 일본의 생활, 문화의 간결함·청결함·세밀함 그리고 일본인 특유의 인정을 체험했다.


▎2012년 8월 중국 선전(深圳)에서 반일 시위대가 혼다가 만든 경찰차를 부수고 있다.
저우쭤런이 일본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된 건 도쿄 생활에서 비롯됐다. 아내가 일본인이었던 것도 그를 한층 더 일본 문화에 친숙하게 만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훗날 저우쭤런은 도쿄 유학 시절을 회고하면서 “도쿄에 대한 그리움이 일본에 대한 내 생각의 거의 전부”라고 말할 정도였다. 저우쭤런의 일본 유학 그리고 일본에 대한 애정은 사람들이 그를 ‘친일파’로 여기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문필가로서 활약했다. 그렇지만 중일전쟁 때 일본 괴뢰정권에서 요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전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저우쭤런은 중국 내에서는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됐다. 반면 일본 문학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누구보다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중국인으로도 평가되기도 했다.

그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환관(당나라)·전족(송나라)·팔고문(八股文[과거 시험이 엄격하게 요구했던 여덟 가지 형식], 명나라)·아편(청나라)의 ‘악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 깊이 감명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인의 미(美) 사랑은 문학·예술부터도 일상의 의식주 형태까지 한결같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멸시는 도를 넘었다”고 비판했다. 일본의 도발을 지켜보면서 저우쭤런의 일본관도 흔들리게 된 것이다.

중국의 시 vs 일본의 우치·소토


▎2020년 11월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오른쪽)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회담 전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는 중국인에게는 없는, 일본인 특유의 요소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됐다. 저우쭤런은 그것을 일본인의 ‘종교적 성격’ 속에서 발견하려 했다. 그는 마쓰리(祭り, 신을 받들고 신에게 봉사하는 것에서 유래) 날 가마를 메는 젊은이 사이에 ‘접신’ ‘신인화융(神人和融)’의 현상에 주목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이성을 초월한 신내림을 실제적·공리적인 중국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신도 정신으로 대변되는 일본인의 종교성이야말로 일본 이해의 열쇠라는 결론을 얻었다.

중일전쟁 발발 90년이 다 됐지만 여전히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현안이 산적해 있다. 서로 자신만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속을 알기 어려운 중국인들에게는 시(關係)라는 ‘체인’이 있다. 시는 우리 말로 특별한 관계나 친분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다른 나라 같으면 불공정 시비가 일겠지만, 중국에서는 ‘나랑 시가 있어서 혜택을 줬어’라는 말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

중국이 시라면 일본은 우치(內)와 소토(外)다. 안과 밖을 나누는 차별의식은 상대방 멸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치는 한국의 ‘우리’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일상 속 공동체 감각으로서는 다른 점이 많다. 한국의 우리는 사적인 친근감에 방점이 찍히지만, 일본의 우치는 공동체 뉘앙스가 강하다. 우치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 중에서 소토는 사회적으로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는 상대를 의미한다.

현재 양국 관계는 껄끄럽기만 하다. 한자를 공유하는 동아시아인이라는 동문(同文)·동종(同種) 의식은 희미해지고 있다. 상호 이해는 멀리한 채 자신의 주장만 편다면 양국 간 화해는 요원한 일이다.

중·일은 역사 문제, 영토 문제로 얽혀 있지만, 우리와 달리 전쟁 배상청구권 문제는 비켜나 있다.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1972년 국교 정상화 때 중국은 배상청구권 대신 공적개발원조(ODA) 형식으로 일본에서 원조를 받았다. 중국답게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긴 것이다.

근대 일본을 따라 배웠던 중국인들, 그들은 일본이라는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봤다. 일본의 장점은 곧 자신들의 약점이었다.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미를 사랑하고 상무 정신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정이 많고 근면 성실하다고 봤다. 모든 일에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정성을 들이는 점도 높게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까닭 모를 일본의 중국에 대한 멸시와 침략 본성을 염려스러워했다.

세계는 지금 상극의 시대에 돌입한 듯 곳곳이 소란스럽고 불안하다. 한국을 둘러싼 주변국들은 대결의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천하대세란 오랫동안 나뉘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다면 반드시 나뉘게 된다.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본의 대표적 군기(軍記) 소설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도 성자필쇠(盛者必衰, 흥한 자는 반드시 쇠한다)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하며 교만의 위험을 경고한다. 또다시 선택의 강요를 받는 시절에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변화의 시대에 위기는 기회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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