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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3)] 망가(漫画)의 성지, 도쿄 토키와 아파트 

1020세대가 열광하는 일본 만화의 세계관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식지 않는 반일감정 속에 개봉한 ‘귀멸의 칼날’ 소리 없이 200만 관객몰이
1인 영웅보다 집단의 협력 강조하는 세계관으로 청년세대 호기심 붙잡아


▎일본 도쿄 외곽에 있는 토키와 아파트는 ‘망가’로 고유명사화한 일본 만화의 산실이었다. 1959년 토키와 주변의 모습. / 사진:유민호
일본 영화 ‘귀멸(鬼滅)의 칼날’이 연일 신기록 행진이라고 한다. 전염병 장기화로 모두가 불안해하는 시대라지만, 귀멸의 칼날을 보려는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이 글이 나갈 때쯤이면 200만 관객 동원 소식도 들릴 듯하다. 1990년 이후 태어난 1020세대가 주 관객이라고 한다. 200만 관객 동원은 1월 27일 개봉 이래 넉 달 만의 기록이다. 1월 20일 개봉한 아카데미상 2관왕 작품인 픽사(Pixar)의 애니메이션 ‘소울(Soul)’도 추월해 2021년 최다 관객·최장기 흥행 영화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국인을 들뜨게 한 영화 ‘미나리’ 열풍도 있겠지만, 지금 보면 귀멸의 칼날이 훨씬 더 강하고 오래 뜰 듯하다.

귀멸의 칼날은 귀신을 멸(滅)하는 칼, 즉 ‘귀신 때려잡는’ 얘기다. 가족을 해친 귀신과, 귀신으로 변해가는 누이를 되살리기 위한 복수극이 중심 스토리다. 일본 영화답게 집단 차원의 우정, 희생, 단결이 눈에 띈다. 일본인은 전체 인구 10명 중 3명이 봤다. 본 사람의 절반 정도는 관람 중 눈시울을 적신다고 한다. 귀멸의 칼날이 금시초문인 사람도 많을 듯하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꼰대’ 인생 어딘가에서 헤매거나, 젊은이와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보면 된다.

기성세대에게는 낯설기만 한 ‘귀멸의 칼날’ 열풍


▎‘귀멸의 칼날’ 개봉일인 지난 1월 27일 메가박스 홍대점에 영화 팬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귀멸의 칼날 원작 만화는 한국어로도 출간돼 1020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학산문화사
귀멸의 칼날은 애니메이션 영화로, 한국 1020세대라면 예외 없이 통하는 청춘 엔터테인먼트의 상징물이다. 주변에 1020 아니, 초등학생이 있다면 귀멸의 칼날에 관해 물어보기 바란다. 인터넷 시대라지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지 실감할 것이다. 한국 신문방송은 귀멸의 칼날 열풍에 무심하다. 반일 정서, 토착왜구 논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귀멸의 칼날에 관한 보도 자체가 드물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벌어진 해외토픽처럼 간헐적으로 전할 뿐, 본격적인 차원의 보도를 본 적이 없다. 해외에서 벌어지는 한국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 특집보도 열기와 전혀 다르다.

‘왜 한국 1020은 귀멸의 칼날에 빠져 있을까?’ 독립군 후손조차 친일파로 넘어가는 판국에, ‘왜색(倭色)’으로 도배한 만화영화에 왜 한국 청년들이 열광할까? 신기록 행진을 접한 필자의 기본적인 의문이다. 기사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겠지만, 귀멸의 칼날 열기에 대한 분석이나 평론도 극히 드물다. 부분적·간헐적 차원의 댓글 수준 얘기가 전부다. 드물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로 ‘게임(Game)’과 ‘판타지(Fantasy)’가 키워드로 등장한다. 박진감 넘치는 격투게임식 화면, 귀신과 사무라이 칼싸움으로 이어지는 판타지 세계가 귀멸의 칼날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들이라 분석한다. 결국 한국 1020의 세계관인 ‘게임·판타지’와 맞아 떨어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분석 평가를 접하는 순간, 뭔가 순서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기의 중심을 전적으로 한국의 1020세대에만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급자로서 일본 영화 자체의 매력이나 장점에 관한 부분은 도외시하고 있다. 사실 21세기 글로벌 시대 선진국치고 ‘게임·판타지’와 무관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무게중심을 한국 1020세대가 아니라, 귀멸의 칼날에 둔 평가 분석은 어떨까? 한국 1020세대의 취향인 ‘게임·판타지’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귀멸의 칼날에 드리워진 좀 더 큰 그림을 살펴보자.

결론부터 얘기하자. ‘왜 한국 1020세대는 귀멸의 칼날에 빠져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수십년간 이어온 망가(漫画·일본만화)에 대한 열기가 귀멸의 칼날 대흥행의 근본적 배경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망가 열기는 1020세대만이 아닌 3040세대 나아가 꼰대 50대까지 반세기 이상 걸쳐진 트렌드다.

같은 열기이지만, 1020세대와 그 이상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1020세대 대부분은 태어나는 시점에서부터 인터넷을 상용화한 세대다. 간헐적으로 아날로그로 전해졌던 30대 이후의 경험과 다르다. 1020세대는 어릴 때부터 망가를 언제 어디서든 ‘빠르고 간단하고도 많이’ 접한 세대다. 50대인 필자의 경우 일본 만화인지도 모른 채 접했다. 성인이 되어 일본에 가서 처음 놀란 것 중 하나가 로봇 태권브이나 아톰의 정체를 알고 나서다. 국산이라 믿었던 만화의 출발점 대부분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1020세대는 다르다. 아예 처음부터 일본발이란 걸 알면서 ‘국뽕’을 배제한 상태에서 망가를 접한다. 물론, 한일 국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디지털 세계가 주된 무대다. 영화 귀멸의 칼날은 무려 20권이 넘는 만화 시리즈 가운데 일부분만 추려서 제작됐다. 한국의 1020세대는 이미 만화 시리즈 전체를 잘 알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영화가 아닌 시리즈 만화에 대한 한국 독자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출간 즉시 완판에다, 항상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일본에서 화제가 된 만화라면 곧바로 1020세대에 전달된다.

한국의 1020세대가 일본어를 어떻게 알고 그토록 빨리 습득하느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요즘 텍스트 동시번역은 기본이다. 앱을 쓰면 ‘식은 죽 먹기’다. 조금만 머리를 쓰면 대화로 이뤄지는 동시통역 소프트웨어도 간단히 활용할 수 있다. 일본 여고생 인기가수가 발표한 신곡이 출시 후 불과 한 시간 만에 한글로 번역돼 유튜브에 뜨기도 했다. 필자의 개인적 판단이지만, 청년문화 가운데 일본에서 성공한 것이 있다면 한국 1020세대에게도 곧바로 먹힐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한국에서 뜰 경우 일본의 1020세대에게도 호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국뽕’이 아닌 냉정한 시각에서 말한다면 한국 1020세대에 미치는 일본 청년문화의 영향력이 한층 더 크고 강하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세계 각국에 문화교류 명목으로 망가 전파


▎전후 일본은 문화 우호교류 명목으로 세계 각국에 자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제공했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폭력성이 덜하고 협동을 강조하는 내용의 일본 만화는 거부감 없이 일본 문화를 확산한 일등공신이었다.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보물섬’ 스틸컷.
4~5년 전부터지만, ‘커버(Cover) 가수’ 전성시대다. 원곡 가수 뺨치게 잘 부르는 가수를 ‘커버 가수’라 부른다. 한국 연예계에 전혀 소개 안 된 한국인으로, 유튜브 조회 수 1억 건을 눈앞에 둔 커버 여가수가 있다. 무려 7만7000개에 달하는 댓글을 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진 글로벌 커버 가수다. 부르는 노래는 망가나루토(ナルト)의 음악이다. 물론 일본어로 부른다. 유튜브에서 곧바로 찾을 수 있겠지만, 한국 1020세대에게는 상식이자 대세로서의 본보기 중 하나다. 1020세대를 중심으로 한 귀멸의 칼날 흥행 신기록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다.

‘타타미제(Tatamiser)’. 3년 전 파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30대 프랑스인이 자기 소개 중 하나로 언급한 말이다. 일본 타타미(畳)에서 유래한 프랑스어로, 간단히 말해 일본 서브 컬처(Sub-Culture)에 빠진 오타쿠(オタク)를 지칭하는 말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 일본 문화에 정통한 프랑스인을 의미한다. 만화는 프랑스 문화의 핵심 중 하나다. 건축·조각·회화·음악·문학·무대예술·영화·미디어예술·비디오게임을 잇는 제9의 예술(LeNeuvieme Art)로 꼽는다. 이른바 ‘방드 데시네(BandeDessinee·이하 BD)’라 불리는 프랑스판 만화다. 오락 픽션도 있지만, 수준 높은 교육용 만화도 많다. 책 한 권 가격도 보통 19유로(약 2만6000원)에서 출발한다. 놀랍게도 프랑스에서 통하는 망가의 위상은 BD와 어깨를 겨눌 정도로 높다. 보통 BD 코너에 가보면 특별히 장식된 망가 코너가 따로 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에서도 망가의 위상은 매우 높다. 드래곤볼(ドラゴンボール), 나루토, 원피스(ワンピース)와 같은 만화의 고정 독자가 수백만에 달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망가의 유럽 무대 데뷔에 관련된 얘기다. 유럽에 망가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초다. 만화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즉 텔레비전을 통한 만화영화가 출발점이다. 당시 유럽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이 필요했지만, 예산 문제로 미국산이 아닌 일본산을 사들였다고 한다. 유럽 자체 제작비의 10분의 1 가격이고 저작권 없이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망가 영화가 대량 직수입된다. 유럽 여행 중 오후 5시쯤 흑백필름 시대를 연상케 하는 일본 고전 만화영화가 방영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부 1970년대에 수입된 저작권 제로의 만화영화다. 당시 망가를 보고 자란 유럽인은 현재 60대 나이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물론, 이들의 아들과 주변이 유럽 내 망가 성장의 기반이 된 것이다.

망가는 미국에서도 돌풍을 일으킨다. 미국 자체의 카툰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유럽 정도는 아니지만, 21세기 들어 급 팽창하고 있다. 주인공은 마이너리티 이민가족들이다. 20세기 후반 망가 영화는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도 거의 공짜로 뿌려졌다. 문화교류 차원에서 망가를 무상 제공했다. 모국에서 망가를 경험한 마이너리티 이민자들은 할리우드 카툰보다 망가를 선호한다. 추억 회상 측면도 있지만, 자식 교육용으로도 활용한다. 폭력에 기초한 미국 카툰보다 우정, 집단을 앞세운 망가가 자식에게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귀멸의 칼날은 4월 22일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흥행 신기록 행진을 벌이는 중이다. 전국 1500여 극장에서 상영하는 즉시 미국의 1020들로 미어터진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만화나 만화를 기초로 한 애니메이션은 영상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상에 이은 갖가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황금거위’ 역할을 하는 게 만화다. 최하 10달러 선에서 출발하는 캐릭터 인형에서부터 코스프레 패션쇼, SNS를 활용한 동호인 이벤트가 이어진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지만, 만화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고가의 게임 소프트웨어도 곧바로 출시된다. 짝퉁을 막기 위해 소니(Sony)나 특정 회사의 하드를 이용한 소프트웨어가 최하 50달러 선에 팔린다. 지명도가 높아질 경우 게임 소프트 후속타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만화 하나가 낳는 부가가치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아톰, 도라에몽이 탄생한 망가의 원류 ‘토키와 아파트’


▎60여년 전 가난한 만화가 지망생들이 자주 찾았던 토키와 인근 중국식당 마쯔바는 아직도 영업 중이다. 당시 만화가들이 그려준 만화 캐릭터가 걸려 있어서 만화 팬들의 성지로 꼽힌다. / 사진:유민호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최초, 즉 원조나 원류를 통한 분석이 답안 중 하나일 듯하다. 예를 들어 도자기를 연구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토기부터 알아보는 방식이다. 인류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하류의 진흙을 만지면서 7000여 년 전 수메르인 토기부터 연구할 수 있다. 원조·원류를 알게 되면 종적·횡적으로 보는 3차원의 눈이 생기게 된다. 우물 안에서 큰소리를 치는 식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세계관이 아니라 보다 가시적이고 총체적 차원의 맥(脈)을 통한 이해다. 망가도 마찬가지다. 망가의 원조·원류를 살펴보면 왜 21세기 청년들에게 돌풍을 일으키는지, 나아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화할지도 가늠해볼 수 있다.

망가의 원류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250여 년 전 에도(江戸)시대 우끼요에(浮世絵)의 대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까지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세계는 그림으로서만이 아닌 스토리와 상상력에 기초한 원조와 원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표현의 자유에 기초한 만화의 원조와 원류에 관한 부분이다. 일본인 만화 오타쿠라면 누구나 공감할 테지만, 정답은 ‘토키와 아파트(トキワ荘: 이하 토키와)’다. 21세기 들어 전 세계 부동의 청년 문화로 자리 잡은 망가의 출발점으로서 토키와다. 원조 원류로서의 토키와는 아파트에 거주했던 10여 명의 청년 만화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시기적으로 1950년대 토키와에서 집단생활하면서 만화 인생에 모든 것을 걸었던 당시 1020세대 인물들이다. 망가계의 대부로 통하는 철권 아톰의 테츠야 오사무(手塚治虫)를 시작으로, 도라에몽(ドラえもん)의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스포츠맨 킨타로(金太郎)의 테라다 히로오(寺田ヒロオ), 소녀 만화의 붐을 일으킨 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 도라에몽의 전신에 해당하는 오소마츠군(おそ松くん)의 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 등 10여 명이 토키와 거주 만화가들이다.

망가 스토리의 특성이지만, 어디에나 빠지지 않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귀멸의 칼날에서도 볼 수 있는 ‘집단의 미학’이다. 망가에 1인 영웅 이야기는 거의 없다. 포켓몬(ポケモン)의 경우 800여 캐릭터 가운데 최고 황제로 군림하는 1인 주인공은 없다. 강점이 많다면 반드시 약점도 많다.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죽이면서 서로에게 배워가며 정신적·육체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이 포켓몬 스토리에 깔린 배경이다.

‘집단 이데올로기’를 추억으로 각인시키는 망가의 위력


▎한국의 중년 세대에게도 익숙한 ‘아톰’의 아버지 테츠야 오사무는 일본 만화계의 대부로 추앙받는다. 테츠야는 토키와 아파트에서 젊은 만화가 지망생들의 롤모델이자 멘토였다. / 사진:유민호
토키와 만화가 후지코 후지오가 만든 도라에몽도 마찬가지다. 고정 등장인물은 4차원 미래 세계에서 온 ‘만능 도구’ 도라에몽과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다. 공부와 운동은 물론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노비타(のび太)의 실패담이 중심이지만,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하고 출연진 6명 전원이 화해하며 끝난다. 집단의 미학이다.

주목할 부분은 도라에몽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기다. 2001년 7월 MBC를 통해 전국으로 주 2~3회 방영됐다. 지금의 1020세대의 어린 시절을 차지한 추억인 셈이다. 귀신과 싸우던 중 친구를 위해 장렬하게 숨지는 부분은 귀멸의 칼날 하이라이트 장면 중 하나다. 집단이 가져다주는 고통이나 부정적인 면보다 아름답고도 긍정적인 부분에 주목하는 훈련이 한국 1020세대의 머릿속에 각인된 셈이다.

집단의 미학은 망가의 원조·원류인 토키와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10여 명의 젊은 만화가들이 모여 서로 배우고 경쟁하면서 실력을 다진 공동생활 집단연구소가 토키와였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1953년 테츠야 오사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의 출생률은 수직으로 치솟는다. 싸고 간단한 스토리의 만화는 당시 변변한 오락거리 하나 없던 일본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이었다. 만화를 통해 외국의 풍물도 접하고 우주로 날아가 지구를 지키는 용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21세기 유튜브 이상의 열기와 관심이 만화에 집중됐다.

테츠야 오사무는 그 같은 어린이 영혼을 만족시켜준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 만화가였다. 당시 출간된 만화의 대부분은 영세출판사를 통해 나왔다. 베스트셀러 만화가라고 해서 전후 일본인의 가난한 생활과 무관할 수 없었다. 방값이 싸다는 장점이 테츠야 오사무가 토키와로 옮긴 가장 큰 이유였다. 더불어 24시간 출입 가능한 집이란 장점도 작용했다. 당시 만화가는 매일 원고 마감에 쫓기며 살아가는, 육체노동자보다 더 바쁘고 힘든 직업이었다. 심야 작업은 당연하다. 주변에 폐를 안 끼치면서 24시간 자유 출입이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도쿄 중심 긴자(銀座)에서 북서쪽으로 13㎞ 떨어진, 그때만 해도 거의 도쿄 바깥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먼 토요시마구(豊島区) 미나미 나가사키(南長崎)의 2층 목조 아파트가 토키와의 주소다. 1층은 생활공간, 2층은 숙소 겸 일터로 사용하는 식이다. 1인당 공간이 한국의 고시원 정도 크기에 화장실과 식당은 공용이었다. 테츠야 오사무가 입실하자 출판사를 통해 다른 만화가들도 따라 들어오게 된다. 값싸고 24시간 작업이 가능하며 ‘협업(協業)’이 가능한 공간이란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시간에 쫓겨 만화를 미처 다 그리지 못하면 보조 만화가가 대신 그려주는 협업 체제가 토키와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전문 만화가로 나서지 못한 아마추어 만화가 입장에서 토키와는 생활비도 벌고, 만화가도 될 수 있는 취직 훈련소나 다름없었다.

테츠야 오사무는 입실 당시 34살로 최연장자이자 이미 만화가로 생활을 이어나가던 최고 선배였다. 그러나 이후 찾아온 만화가들이나 지망생은 10~20대였다. 테츠야 오사무가 이들 1020세대 청춘 만화가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만화 지도에서부터 스토리 구성에 이르는 전수 과정이 밤마다 토키와 2층 작은 술자리에서 이뤄졌다. 이들 10여 명의 만화가는 이후 결혼과 함께 하나둘 토키와를 떠났다. 대부분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가로 성장해 196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어린이와 어른의 동심을 사로잡았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20세기 망가를 대표하는 원조·원류 만화의 출발점이 바로 습작 만화가 시절의 토키와에서 시작된 것이다.

토키와의 세계관에 1020세대 상식 깃들어 있어


▎1950~1960년대 일본 만화의 산실이었던 토키와 아파트의 원형을 축소한 청동 모형. 토키와 순례의 출발점이다. / 사진:유민호
2년 전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 토키와에 들린 적이 있다. 토키와 건물은 이미 1982년 철거됐고, 당시의 흔적과 스토리를 알려주는 공간과 기념물들이 거리 곳곳에 남아 있었다. 축소판 토키와 건물도 만들어져 당시의 생활 풍경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에어컨 히터도 없고, 좁은 화장실과 목욕탕 하나로 어떻게 청년 10명의 집단생활이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토키와 주변은 20세기 이후 망가의 성지(聖地)로 일본인은 물론 전 세계 만화 오타쿠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어디서 밥을 먹었고, 어떤 신사(神社)에 들러 기도를 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만든 자작(自作) 사탕 맛이 어땠을지에 대한 얘기가 거리 곳곳에 넘실댄다.

토키와 출신 만화가의 대부분은 작고했다. 놀랍게도 토키와 근처에서 만난 할머니는 어릴 때 접했던 만화가들과의 교류 스토리를 마치 어제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전해준다. 토키와 만화가들이 만든 자작 사탕을 200엔에 파는 가게 주인 할머니다. 좁은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사인과 함께 남겨진 만화 캐릭터가 줄줄이 걸려 있다. 어릴 때 토키와 만화가들이 할머니에게 준 선물이다. 외국인인 필자에게는 낯선 캐릭터들이지만, 무려 60여 년 전 할머니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시간 여행의 흔적으로 비친다.

프로게이머·연예인·유튜버·운동선수·교사…. 지난해 조사한 한·일 어린이의 장래희망 ‘톱10’에 든 공통분모다. 한·일간 차이점도 있다. 한국은 법률전문가와 경찰이 10위 안에 들어있다. 일본에만 있고 한국에 없는 것도 있다. 만화가, 학자 그리고 연구원이다. 공통점도 많지만, 서로 다른 10위권 희망 직업을 보면서 한·일 어린이의 세계관을 비교 분석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을 통한 한국의 1020세대, 나아가 현재 초등학생의 일본에 대한 관심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듯 한국은 만화가 아닌 웹툰의 나라다. 만화는 집단에 기초한 장편 스토리, 웹툰은 1인 주인공의 짧은 댓글 수준으로 이어가는 세계다. 우열과 무관하게 각각 장단점이 있는 세계다. ‘붉은 피’의 역사보다 ‘맑은 피’에 기초한 서로 배우고 익히는 미래의 세계가 21세기, 1020세대의 상식이자 대세다. 왜 귀멸의 칼날이 인기인지 ‘맑은 피’로 채워진 정신세계와 함께 언젠가 토키와에 들러 답을 구하기 바란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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