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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7)] '춘향전'과 어사 박문수 ‘진주 야담’의 공통점 

목숨 걸고 수절하는 여자들 복이 있나니 

조선 후기 상공업 발달로 중·하층 신분 상승 욕구 거세져
절개·의리 지킨 기생·여종, 인생 반전 이루는 판타지 탄생


▎영화 [춘향전]에서 각각 이 도령과 성춘향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이민우(오른쪽)와 김희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 내 간간 내 사랑이로구나. 여봐라 춘향아,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 빵긋 웃고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도 보자.”(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

춘향이가 금침 속으로 달려든다. 이도령 왈칵 쫓아 들어가 둘이 안고 마주 누우니 그대로 잘 리가 있나. 하루 이틀 지나 열여섯 어린 남녀는 이제 부끄럼도 타지 않는다. 실없는 말로 서로 놀리기도 하고, 우스운 말에 빵긋 터지기도 한다. ‘사랑가’가 절로 흘러나온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똑 이 모양으로 놀았다.

간간하다. 간질간질 깨가 쏟아진다. 이거 좀 곤란하다. 욕망을 억누르고 절의를 좇는 게 조선의 법도요, 풍속이지 않은가. 남녀의 내밀한 애정 행각을 백일하에 드러내다니 남사스럽다. 얄궂은 게 소설이라도 그렇지, 어디 낯뜨거워서 읽겠는가. 광대놀음 판소리일 뿐인데 귓불은 왜 달아오르고, 소피는 어째서 마려운가 말이다.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는 19세기 후반에 전주에서 목판으로 찍은 [춘향전]의 이본(異本)이다. 춘향 이야기는 당시 소설과 판소리로 널리 퍼져 있었다. 춘향의 신분은 원래 기생이었는데 이 무렵에는 성 참판의 서녀(庶女)로 올라선다. 퇴기 월매가 창기 행실을 버리고 몸가짐을 바로 하여 나이 마흔 줄에 얻은 귀한 딸이란다.

춘향이 단옷날 장림 숲에서 그네를 탄다. 그녀를 하늘 높이 밀어 올리는 굴림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천출 서녀의 약동하는 몸짓이다. 봄바람에 물결치는 저고리와 치맛자락의 굴곡은 미색을 타고난 여인의 은밀한 유혹이다. 춘향은 경계의 사람이다. 규중과 교방, 절의와 욕망의 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광한루에 봄놀이 나온 이 도령의 시선이 뜨겁다. 천상의 광한궁, 곧 월궁 이름을 딴 곳에서 달의 여신 항아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상의 광한루는 남원 수령들이 기생과 악공을 데리고 나와 풍류를 즐기는 유흥장이다. 사또 자제도 퇴기의 딸에게 풋풋한 수작을 건다. 어라, 밀고 당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음양의 결합은 오묘하다. (춘향의) 음기가 서린 장림 숲과 (이 도령의) 양기가 솟은 광한루 사이를 남원 오작교가 이어준다. 춘흥(春興)에 사무친 이팔청춘 남녀가 수작을 걸고 합궁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대담하고 자세하다.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사랑에 몰입하는 두 사람이다. 이 대목에 소설과 판소리를 후원하고 당대의 유흥문화를 주도한 ‘왈짜’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금고옥적은 요순 시절이요, 의관문물은 우탕(禹湯)의 버금이라.”(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

[춘향전]은 18~19세기에 각양각색의 판본이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 ‘숙종대왕 즉위 초’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요순(堯舜)과 우탕(禹湯),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들에 빗대 조선 후기 숙종의 치세(1674~1720년)를 찬양한다. 의례적인 표현이지만 춘향 이야기와 관련해서 곱씹어볼 만한 대목도 있다.

하층민에 흘러든 양반 문화


▎한국화가 이당(以堂) 김은호의 작품 ‘춘향’.
숙종이 즉위하던 무렵인 17세기 후반에 조선은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3분의 1까지 줄었던 토지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고,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이 늘어났다. 농업생산량이 증가하자 상품 거래가 활발해졌다. 대동법 전국 시행과 상평통보의 유통은 시전·장시·수공업을 키웠다. 농업국가 조선에 상공업이 미친 듯이 번져나갔다.

18세기에는 상품경제 발달과 함께 다양한 계층이 출현해 신분제 사회에 도전장을 던졌다. 넓은 땅을 경작하거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평민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개중에는 몰락한 양반가의 족보를 사들여 내로라 행세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 서얼 유생들은 양반처럼 출세할 기회를 얻고자 조정의 청요직, 곧 언관과 낭관에 등용해 달라고 국왕에게 촉구했다. 숙종의 아들이자 모친이 무수리 출신인 ‘서얼 임금’ 영조라면 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 세월 숨죽여온 신분 상승의 욕망이 도처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 변화와 욕망의 한복판에 중인(中人)들이 있었다. 중인은 엄밀히 따지면 법적인 신분이 아니었다. 직업에 따라 관습적으로 형성된 계층이었다. 역관·의관·일관·율관 등 전문직 관리와 아전·별감·포교·화원 같은 하급 관원들이 중인에 속했다. 그들은 자신의 직능과 자리를 가업으로 삼아 자손들에게 대물림했다.

그런데 하급 관원들에게 녹봉이 제대로 책정되지 않았다. 세수가 부족하니 알아서 먹고살라는 것이었다. 궁궐과 관아의 실무를 담당하는 자들이었다. 적당히 뇌물을 받거나 이권에 개입하면 됐다(조선 후기에 아전과 지방관과 세도가로 이어진 망국적인 부정부패 고리가 어쩌면 녹봉 체계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술집을 운영하거나 그 뒤를 봐주기도 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화에 노상 나오는 궁중 별감들이 그랬다. 붉은 옷에 초립을 쓰고 기둥서방 노릇을 도맡았다. 기생·악공·광대 등을 불러 모아 놀이판을 열기도 했다. 관아의 서리들은 유흥과 향락의 달인이 돼갔다. 세상은 이런 자들을 ‘왈짜’라고 불렀다.

중인 가운데는 학식 있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 능력과 전문성은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더욱 각광받았다. 시대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중인들이었다. 그런데도 양반들에게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감히 함께 앉지 못했고, 자신을 ‘소인’이라 칭했으며, 잘못하면 매를 맞기도 하였다(이보, [경옥선생유집]).

중인들의 신분 상승 욕구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지만, 신분제의 견고한 벽을 허물기에는 힘이 부쳤다. 그들은 우회로를 택했다. 양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류 사회와 교유하는 길이었다. 한시·서화 같은 문예 활동은 좋은 방법이었다. 낙하시사·송석원시사 등 문예 단체가 성황을 이뤘다. 양반문화를 즐기며 신분 상승 욕구를 정신적으로 충족한 것이다.

중인들이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양반 특유의 윤리가 위항(委巷)으로 흘러들었다. 위항은 꼬불꼬불하고 좁은 골목길로 일반 백성이 모여 사는 곳을 말한다. 18~19세기 위항 문화는 신분과 계층을 아우르는 문화의 용광로였다. 전기수들이 떠드는 이야기와 광대들이 부르는 노래에 양반 문화인 ‘수절(守節)’이 안착했다. 절개를 지키는 여성상이 하층민의 삶에 스며들었다. ‘열녀 춘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신분 질서 무시하고 양반 법도 따르겠다는 기생


▎전북 남원 광한루를 찾은 관광객들이 오작교를 건너고 있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 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 봤으니/ 부모 봉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여인 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는가/ 손가락에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 그려볼까/ 옥중 원혼 되거드면/ 무덤 근처 섰는 나무/ 상사목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니.”(김연수 창본 ‘쑥대머리’)

쑥대머리는 두발이 마구 흐트러진 상태를 말한다. ‘사랑가’의 여주인공이 어쩌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차디찬 감옥에 갇혔을까? 전임 사또가 도성으로 발령받자 이 도령 또한 남원을 떠나야 했다. 백년가약 맺은 낭군을 춘향은 고이 보내줬다.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정식 부부가 되겠다는 약속을 믿었다. 신분의 벽이 엄연했지만 이미 그이를 서방으로 받아들인 그녀다. 낭군과 재회하는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개를 지키리라.

기생 수절이라니 신관 사또는 가소로웠다. 남원에 당도하자마자 사또는 기생 점고(點考)에 나섰다. 풍문으로 들은 남원의 미색 춘향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관아의 기생 명부인 기적(妓籍)에 춘향의 이름이 없었다. 퇴기 월매가 일찍이 대비정속(代婢定贖)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기생이 양반 첩이 되거나 관아에 재물을 바치면 자기 대신 계집종을 기적에 올리고 양인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었다. 월매도, 딸도 이제 기생이 아니었다.

남원부사는 막무가내였다. 반강제로 춘향을 관아에 불러 기생 수청을 요구했다. 자신은 기생이 아니라 양반의 서녀이며, 백년가약을 맺은 서방이 있다고 춘향이 조곤조곤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또에게 한 번 기생은 영원한 기생이었으며, 기생 딸도 별수 없는 기생이었다. 기생은 관아에 매인 존재다. 지방관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수청 들라 하면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한다.

신관 사또는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조선의 지방관은 행정권·사법권·조세권 등 고을의 실권을 모두 틀어쥐었다. 고을에서는 사또가 임금이었다. 지방관이 명하면 따라야 했다. 그런데 이 요망한 것이 기생 주제에 감히 반기를 든 것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며 오히려 훈계질이다. 수청은 아니 들고 수절을 하겠단다. 기생과 양반의 법도가 뒤바뀌다니, 문란한 신분 질서에 그는 분개했다.

사또는 군기를 확실히 잡기로 했다. 춘향은 머리채를 잡혀 마당에 뒹굴었다. 매질은 가혹했다. 볼기가 터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춘향이 매 맞았다는 소식은 이 마을 저 마을 짜하게 퍼져나갔다. 신관 사또 수청을 거부하고 이 도령 수절을 택했다는 미담이다. 안타깝다 춘향이! 장하다 춘향이! 왁자지껄 동정과 칭찬이 쏟아졌다.

남원 왈짜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평소 월매를 장모라고 부르며 농을 걸던 자들이다. 전직 아전이요, 포교여서 관아를 제집처럼 드나든다. 춘향은 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눈이 폭 꺼졌다. 왈짜들은 청심환을 갈아먹이고 부축해 옥으로 데려갔다. 위로한답시고 노래도 불러주고 소설도 읽어주며 옥문 앞에서 소일했다. 이러다 사또에게 들키면 다 죽는다고 옥사장이 뭐라 하자 왈짜 하나가 버럭 타박한다.

“기생이 옥에 갇히면 우리네 출입이 당연한 것을 웬 걱정이니?” (경판본 [남원고사])

춘향의 심정은 옥중가 ‘쑥대머리’에 애절하게 흐른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서방을 그리워하고 또 원망한다. 피눈물로 편지를 쓰고 초상화라도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을 각오한 수절의 결기 속에는 어느새 상사목이 자라고 망부석이 들어선다. 자, 이제 어사또가 등장할 차례다.

수절 여부로 여성 심판한 암행어사 박문수


▎전북 남원 광한루에 있는 월매의 집 전경.
춘향과 이 도령의 재회에 앞서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짚고 넘어가자. 암행어사는 왕명을 받아 은밀히 지방관을 감찰하고 민심을 살피는 관직이었다. 백성에겐 탐관오리의 비리를 밝히는 정의의 사도이자,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는 고충 해결사였다. 어사들은 먹고사는 문제부터 사회 윤리 규범까지 삶과 직결된 온갖 사안들을 다뤘다.

조선 후기에는 그래서 어사또의 종횡무진 활약상이 담긴 야담(野談)이 인기를 얻었다. 19세기에 편찬된 [청구야담]에는 [춘향전]과 흡사한 일화가 눈길을 끈다. 남주인공은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요, 여주인공은 기생과 여종 두 사람이며, 무대는 경상도 진주다. 어사 박문수는 여성의 수절을 설파하며 ‘사랑의 심판자’로 나섰다.

이야기는 박문수가 출사하기 전에 사또로 부임한 외숙부를 따라 진주에 갔다가 아리따운 기생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책방 도령이 되어 현지에 눌러앉았다. 관아에 매인 기생도 사또의 조카가 싫지 않았다. 청춘남녀는 사랑에 푹 빠지고 말았다. 같은 날 죽기로 맹세할 만큼 관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에 있던 박문수는 물 긷는 여종을 두고 여러 사람이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여종이 너무 못생겨서 서른이 다 되도록 음양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가까이하면 적선(積善)하는 셈이니 복을 받는다고도 했다. 그 말에 솔깃해진 책방 도령은 한밤중에 여종을 불러 잠자리를 가졌다.

박문수는 얼마 후 상경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아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속에 진주와의 연통은 끊겼다. 그가 다시 이 고을을 찾은 것은 10년 후의 일이었다. 임금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경상우도 암행어사가 돼 잠행에 들어갔다. 진주에 당도하자 어사는 인지상정으로 한때 죽고 못 살던 그 기생이 보고 싶어졌다.

박문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거지 행색으로 꾸며 기생집을 찾아갔다. 문밖에 서서 밥을 구걸하니 기생 어미가 알아보고 방으로 불러들였다. 거지꼴을 불쌍히 여겨 따뜻한 밥이라도 먹이려 한 것이다. 반면 기생은 옛 정인의 초라한 행색에 기겁해 화를 내고 냉대했다. 다음 날 병마절도사의 생신 잔치가 있다면서 눈길도 주지 않고 옷만 챙겨 집을 나갔다.

수절 대신 수청 받아들인 진주 기생의 운명


▎민속명절 단오를 기념해 열린 행사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이 그네뛰기를 하고 있다.
씁쓸하게 기생집을 나선 박문수는 문득 물 긷는 여종이 떠올라 일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여종은 꿈에 그리던 책방 도령과 재회하자 반갑고 놀라워 울음을 터뜨렸다. 거지 행색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박문수를 제 오두막집으로 데려갔다. 손님을 앉히고 벽장에서 상자를 꺼냈는데 안에 비단옷 한 벌이들어 있었다. 여종은 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간곡히 권했다.

“저는 서방님이 크게 현달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어찌 이지경이 되리라 짐작했겠습니까? 이 옷은 제가 여러 해 동안 물길은 삯으로 마련했습니다. 돈을 모아 비단을 사고 사람을 써서 지어두었지요. 혹시라도 서방님을 다시 만나면 고운 비단옷으로 마음을 표하려 했습니다. 누추하지만 제집에서 머무십시오. 곧 따뜻한 밥을 차리겠습니다.”([청구야담] 권7)

흥미롭다. 여종이 정체를 감춘 암행어사에게 일편단심 절개를 지킨다. [춘향전]으로 치면 춘향이 아니라 향단이 수절한 것이다. 반대로 춘향에 해당하는 기생은 본관 사또가 베푸는 병마사의 생신 잔치에 나아간다. 술을 따르고 교태를 부리며 수청 당번을 마다치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춘향이다.

박문수는 잔치가 열리는 진주 촉석루로 향했다. 암행어사가 심판한 것은 본관 사또도, 병마사도 아니었다. 그는 수청든 기생을 심판대에 올렸다. 거지 행색의 옛 정인을 외면한 죄로 기생은 매를 맞고 물 긷는 여종으로 떨어졌다. 수절한 여종에게는 두둑이 보상했다. 고운 비단옷 한 벌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베푼 덕분에 상금 200냥을 받고 관아의 행수가 되었다. 사랑을 심판하고 수절을 권하는 어사또였다. 그럼 [춘향전]의 이 도령은 어땠을까?

“그때 올라가서 벼슬길 끊기고 가산 탕진하여 부친께선 학장질 가시고 모친은 친가로 가시고 다 각기 갈리었소. 나는 춘향에게 내려와서 돈 천이나 얻어갈까 하였거늘 와서 보니 양가 이력 말 아닐세.”

“이 무정한 사람아, 일차 이별 후로 소식이 없었으니 그런 인사가 있으며, 뒷날 기약을 바랐더니 이리 잘 되었소. 쏘아놓은 살이 되고 엎질러진 물이 돼 수원수구 할까마는 내 딸 춘향이는 어쩌나.”(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

월매는 홧김에 이 도령에게 달려들어 코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사위는 백년지객”이라며 뻔뻔스레 나타났지만, 촛불 앞에 앉혀보니 걸인 중의 상걸인이라…. 춘향이는 저 때문에 매 맞고 옥에 갇혔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벼슬길 끊기고 가산 탕진해 돈이나 좀 얻으러 내려왔다고? 장모 운운하는 그 입이 원망스럽고 미워죽겠다.

[춘향전]에서 월매는 독자 마음을 대변한다. 춘향이와 이도령과 신관 사또가 현실보다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라면, 월매는 시대상을 이야기에 투영해 현실과의 접점 노릇을 한다. 이 서방인지 삼 서방인지 춘향 두고 한양 간다기에 차라리 죽이고 가라고 떼쓰기도 했다. 과거 급제해서 돌아오겠다는 선비 치고 약속 지키는 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또인지 오또인지 모진 매질에 춘향이 죽을까 봐 그깟 수청 들어주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남 보기에 우세스러워도 내가 욕먹으면 그만, 딸만 살릴 수 있다면 엄마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신분 상승 꿈 이룬 월매 “이 배가 정렬부인 낳은 배”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 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 정치가였다.
결국 암행어사 출두와 함께 수청을 강요한 사또는 탐관오리로 전락했고, 목숨 걸고 수절한 춘향은 정렬부인(貞烈夫人)에 올랐다. 거지 사위 구박한 월매는 면목이 없다가 온 세상이 춘향의 절개를 칭송하니 의기양양하다. “이 배가 정렬부인 낳은 배”라며 뻐기고 다니기 바쁘다. 신분제가 흔들리는 사회에서 그녀는 신분 상승 욕구를 한껏 드러냈다.

대비정속(代婢定贖)해 기생 신분을 벗고, 딸에게 수신서를 읽힌 게 이야기 안에서는 달콤한 열매를 맺었다. 중인·서얼·부민 등 양반 문화를 선망하는 계층도 신분 상승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남원 고을의 열녀 춘향이도, 진주로 간 어사 박문수도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수절하는 여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세상의 찬양을 받을 것이라! 그럼 조선 남자들은 어째서 수절하지 않았을까? 왜 기생과 여종에게 한눈팔았을까? 대체 뭘 믿고 허구한 날 축첩(畜妾)에 열을 올렸을까?

그것을 좋은 말로 풍류(風流)라고 한다. ‘풍류’라 쓰고 ‘바람’으로 읽으면 된다. 바람 부는 세월 속에 수절 여인들의 한(恨)은 깊어갔다.

열녀를 발굴하는 사업은 조선 시대 내내 이어졌다. 실록에만 모두 합쳐 1120여 명에 이른다. 18~19세기에 이르면 양반가뿐만 아니라 하층민 가운데서도 열녀가 나왔다. 주인이 여종을 재가시키려고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가 본받아야 할 미담으로 회자했다. 평생 재가하지 않는 것은 열녀 축에도 끼지 못했다. 조선 후기 열녀의 상당수는 죽은 남편 뒤를 따라 자결했다. 수절이 조선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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