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경성대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월간중앙 공동기획 | ‘한자어 진검승부’(9)] 속도(速度): 시간과 공간 함께 고려할 때 비로소 사유 가능 

속도 앞세워 정복하려 하기보다 코로나19와 뒤섞여 살아갈 준비해야 

마침내 4차 대유행 도래… 팬데믹이란 단어 익숙해질 정도로 지쳐
종식은 꿈일 뿐,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당처(當處)로 바뀌었을지도


▎강원도 원주 ‘뮤지엄산’ 명상관에서 한 관람객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다. 최근 우울감이나 무기력증·불안감·고립감 같은 ‘코로나 블루’ 증상을 극복하기 위한 명상 콘텐트가 인기다. / 사진:박종근 기자
1. 4차 대유행

마침내 ‘4차 대유행’의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최근 한 달이 넘는 동안 1000명 이상을 기록하더니 2000명도 넘어섰다. 이 대유행은 이른바 ‘팬데믹(pandemic)’이란 말로도 그 심각함과 엄중함의 정도를 다 표현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상황이다. 그 말만 들어도 지친 한숨을 내쉴 만큼, 어쩌면 우린 그 말 한마디에 익숙해지다 못해 엄청난 피로까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익숙함 또는 피로감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지난해 말 [머니투데이]에 실린 한 기사 ‘팬데믹·록다운… 코로나가 삼킨 올해의 단어’를 보면, 미국의 저명한 사전 발행사 중 하나인 [메리엄-웹스터]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바로 ‘팬데믹’이란 사실, 마찬가지로 독일언어학회(GfdS) 역시 같은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엄선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후자는 ‘록다운(lockdown)’을 두 번째로 꼽기도 했는데 보통 ‘봉쇄(封鎖)’ 또는 더 구체적으로 ‘도시 봉쇄’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말을 영국의 [콜린스(Collins)] 사전에서는 또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록다운’을 ‘도시 봉쇄’로 국한해서 볼 경우 한국의 상황과는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오히려 그 반대로 도시 간 ‘개방(開放)’을 지속함으로써 이 사태가 시민의 일상생활에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그래서 가급적이면 시민의 일상생활이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다름없이 영위될 수 있도록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은 두말할 것도 없고 QR(Quick Response) 코드 등록 및 안심콜 출입 관리처럼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기술’을 적극 활용한 세부 ‘방역’ 지침까지도 시민이 자발적으로 준수한다는 전제가 충족돼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지리적 규모를 전 지구로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이 봉쇄라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 역시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라는 데 딱히 이견은 없을 듯 보인다. 백신 접종이 한창 이뤄지고 있는 이때, 어떤 이유에서든 그 봉쇄의 해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한테 ‘변종·변이’의 발생 및 확산은 또다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청천벽력의 소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가오는 소식과 함께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은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일 것이다. 섣부른 감이 있다는 우려에도 사회 일각에서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 심지어는 그것의 종식 불가능성에 따른 영속화를 얘기한다. 따라서 코로나19의 박멸보다는 그것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팬데믹과 속도는 불가분의 관계

이렇게 보면 한때 포스트 코로나라는 ‘미래’의 빛깔은 어쩌면 장밋빛에서 잿빛으로, 그러니까 낙관론에서 비관론으로 바뀌었다가 어느새 갖가지 색깔의 ‘현실’로, 달리 말해서 ‘시민 각자가 코로나19와 함께 그냥 살아가야만 하는 당처(當處)’로 한 번 더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토대로 해서 지금부터는 여태껏 한 얘기 모두를 한층 더 자세하게 풀어볼 텐데, 그 핵심은 바로 ‘속도(速度)’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두 가지만 미리 언급해 둬야 할 듯싶다. ‘속도’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고려할 때 비로소 사유 가능하다는 점, 아울러 그 둘은 이미 이 지면을 통해 심도 있게 다뤄진 바 있다는 점이다. 얘기의 시작은 죽 거슬러 올라가 보면 눈에 들어오는 ‘팬데믹’에서 이뤄진다.

2. 팬데믹(pandemic)과 속도


▎서울 중구 덕수궁길에 설치된 ‘온기 우편함. 이곳에 사연을 넣으면 자원봉사자가 직접 답장을 써서 보내준다. 코로나19 여파로 온기 우편함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 사진:김성룡 기자
‘팬데믹’을 ‘대유행’으로 번역할 때, 어근인 ‘유행’의 기본 의미가 한국 언중이 일반적으로 알거나 쓰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 그러니까 전자에는 “전염병이 널리 퍼져 돌아다님”의 뜻이, 후자에는 사회적 맥락에서 “특정한 행동 양식이나 사상 따위가 일시적으로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아서 널리 퍼짐. 또는 그런 사회적 동조 현상이나 경향”의 뜻이 있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표준국어대사전]). 굳이 영어로 바꿔 그 차이를 한 번 더 확인해 보자면, 전자는 ‘spread’나 ‘prevalence’로 후자는 ‘vogue’나 ‘trend’ 정도가 될 텐데 이는 의술이나 의학이라는, 기존의 전문적이고도 특수한 맥락에서 사회 전반의 보편적 맥락으로 그 의미가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 확장의 유사성은 ‘pandemic’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pandemic’은 그리스어 pandemos, 곧 ‘빠지는 데 없이 골고루’, ‘두루’의 뜻을 지닌 pan(πᾶν, 汎, 넓음 범)과 ‘무리’, ‘백성’을 뜻하는 demos(δῆμος, 衆, 무리 중)가 결합한 ‘질병 관련’ 단어로서, 1660년대에는 “모든 사람 또는 지역에서 발병하기 쉬운”이란 형용사로 쓰였고, 1853년 즈음에는 그것에서 파생한 명사, ‘대유행병’으로도 쓰이기 시작했다([온라인 영어어원사전], Online Etymology Dictionary, 이하 OED).

사실 ‘pandemic’이 그 같은 명사적 용법을 획득한 1850년대는 인류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서구 근대 질병사(疾病史)의 맥락에서는 상당히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기인데, 바로 콜레라 3차 대유행의 발발 때문이다. 온라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당시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3차 대유행은 보통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1852년 인도에서 발발한 것으로 간주되며, 거기서 페르시아(이란)를 거쳐 유럽으로, 미국으로, 그러고 나서는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했다. 아프리카는 가혹한 피해를 봤다. 콜레라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에티오피아와 우간다로 퍼져나갔다. 최악의 한 해는 1854년으로 영국에서만 2만3000명이 사망했다.”

지금껏 기술한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을 봐도 ‘pandemic’이 ‘속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 양상을 ‘흐름(流)’으로 보든, ‘흩어져 널리 퍼지는 것(擴散)’으로 보든, 그것엔 반드시 공간과 시간이 상정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유행으로서 pandemic’의 양상을 모종의 흐름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갈 때 발생하는 ‘공시간적 확장(擴張) 및 연장(延長)’은 물론, 그것을 다 함께 숙고할 때 비로소 파악할 수 있는 ‘유속(流速)’까지도 함께 고려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봉쇄’는 일차적으로는 그 유속에 마찰력을 제공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흐름 자체를 차단해 그것이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하도록 아예 한곳, 이를테면 한 도시에 가둬버린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코로나19의 빠른 유속, 심지어는 그 흐름의 가속화(加速化, acceleration)에 맞선 21세기판 ‘도시 인클로저(Urban Enclosure)’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록다운’인 것이다.

‘빠름’은 기술 전반 물론 모바일 기술의 덕목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전개된 국내 상황이 판이하다는 점,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서구 여러 사회에서 속행(速行)한 도시 중심의 봉쇄 조치가 국내에서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기존의 개방적 태도를 지금까지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 중심에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기술’이 있다. 이 ‘기술’의 문제, 사실 씨름하기가 절대 만만치는 않지만 그래도 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3. 속도·기술·방역


▎광주광역시청 내 구내식당. 코로나19 확산 이후 대부분의 식당에는 투명 가림막이 설치됐다. / 사진:연합뉴스
우선 ‘速’의 풀이부터 보면 다음과 같다. “速(빠를 속)… 형성. 辵(쉬엄쉬엄 갈 착)이 의미부고 束(묶을 속)이 소리부로, ‘빠르다’는 뜻인데, 헐렁한 옷 등을 묶으면(束) 빨리 갈(辵) 수 있다는 의미를 그렸다. 이후 속도를 높이다, 성정이 급하다, 매우 급하다, 재촉하다, 불러오다 등의 뜻이 나왔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

이 풀이에서 특별히 ‘束’을 단지 그것의 성부(聲部) 기능에 국한하지 않고 의미의 측면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일단은 다음과 같은 물음, 예컨대 ‘헐렁한 옷, 예컨대 헐렁한 소맷자락이나 바짓단을 묶는 행위의 목적이 오직 빨리 걷기만 하려는 데 있었을까? 혹시라도 다른 목적은 전혀 없었을까?’ 하는 의문부터 퍼뜩 들 수도 있을 텐데, 그럴 경우의 대답은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이를테면 말타기 같은 구체적 사례로도 제시될 수 있다.

‘速’은 비단 인간 자신의 몸뿐 아니라 인간이 수립한 특정 목적(目的, ends)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 자신이 마련한 수단(手段, means)은 물론 그 수단으로 동원된 구체적 사물(事物, things)·도구(道具, instruments)·장치(裝置, devices) 모두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度’는 또 어떨까? ‘速度’의 ‘度’란 글자가 단지 빠름의 ‘정도(程度)’만 뜻하는 걸까? 한번 봐 보도록 하자. “도(법도 도; 잴 탁)… 형성. 又(또 우)가 의미부이고 庶(여러 서)의 생략된 모습이 소리부로, 손(又)으로 길이를 재다는 뜻으로부터 ‘재다’의 뜻이, 재는 기준이 된다는 뜻에서 표준과 尺度(척도)의 뜻이 나왔다. 又(우)는 寸(마디 촌), 尺(자 척), 尋(찾을 심) 등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들이 모두 又로 구성됐듯, 길이와 양을 재는 표준이자 법도였다. 다만 ‘재다’는 동사적 의미로 쓰일 때는 ‘탁’으로 구분해 읽는다.”([한자어원사전])

이로써 ‘度’는 ‘정도’보다는 오히려 ‘표준’이나 ‘척도’를 의미하는 글자임이, 그렇기에 ‘速度’는 단순히 ‘빠름의 정도’, 곧 “(빠르거나 느리거나 하는) 운동이나 진행의 속도(rate)”를 뜻하는 ‘speed’보다는 ‘표준이자 척도로서 빠름’을 함의하는 단어임이 드러난다. 아울러 이 모두를 기술 전반 또는 현시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 돼 있는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기술’에 적용해서 해석해본다면, 그것의 표준이자 척도는 오직 ‘빠름’뿐이라는 점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 요컨대 빠르지 않은 ‘기술’이란 것 자체를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빠름’(速)은 기술 전반은 물론 현시대 모바일 기술의 덕목(德目, virtue)으로도 아주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변종·변이의 무차별적 인류 습격

‘빠름’이 기술의 덕목으로 비치는 까닭은 그토록 빨라지기만 하는 기술이 ‘무한한 수량화’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거나 심지어는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기술 또는 그것의 저변에는 예측 가능한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통제 가능한 것을 통제하지 못해서 기술의 무용성만 폭로하게끔 되는 ‘사후 약방문(死後 藥方文)’이 되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예측을 토대로 통제 불가능한 것까지도 ‘앞질러’ 통제함으로써 선제적(先制的, preemtive) 유용성을 입증하려는 욕망, 굳이 말하자면 ‘사전(死前) 약방문’이 되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코로나 시국이란 특정 맥락에서 이른바 ‘방역’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같은 욕망의 사회적 발현 및 그것과 관련한 사회적 행위 전반을 통틀어 일컫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 방역의 변위(變位)는 다시 봉쇄 해제의 변위와 만나 ‘이 끔찍하기 그지없는 코로나 사태의 종식’이라는, 어떻게 보면 낙관적이기 이를 데 없는 벡터를 형성하게 된다.

4. 변종과 변이: 사고와 속도의 양면적 상관관계


▎7월 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1 서울국제주류박람회’에서 참관객들이 혼자 또는 일행과 칸막이 안에서 시음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앞서 언급한 그 벡터의 형성 또는 그 형성의 완결은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최근의 알파와 델타에서 현재의 람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변종·변이가 현시대 인류를 상대로 불의의 습격을,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감행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현재 접종 대상으로 지정된 모든 백신의 효용 가치를 폭락시키면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고(事故)’를 유발하고 있다. 이런 급박한 상황, 뭔가를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여유조차 허락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잠시나마 골몰해봐야 하는 문제는 있다. 바로 ‘사고’, 그리고 ‘사고와 속도의 양면적 상관관계’다.

인간과 자연 관계, 총체적 조망·반추 필요

사건을 일컬을 때 ‘대재앙(catastrophe)’보다는 ‘사고(accident)’란 말을 곧잘 쓰는 비릴리오(Paul Virilio)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라는 말은 철학적인 면에서 실체와 대조적으로 쓰이는 장점을 지닌다. 대재앙이라는 말은 나에게는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탈선은 철도공사 현장 감독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니며 열차의 운전사에 의해 계획된 것도 아니다. 사고는 예고 없이 발생한다. 실체가 필연적인 데 반해, 사고는 상대적이고 우발적이다.”(배영달, [폴 비릴리오: 속도, 기술, 사고])

이 설명을 현재 변이 감염자 수의 급증 추이와 함께 고려해 볼 때 기술 발전은 물론 그 발전의 속도나 가속화마저도 변이 감염이라는 상대적·우발적 사고의 예측이나 통제에는 별 쓰임새가 없다는, 달리 말해서 그것들이 변이의 확산 속도에 대해 일정량의 마찰력으로 작용하기란 무리일 수밖에 없다는 잠정적 결론이 도출된다. 요컨대 사고는 기술 발전과 그것의 속도 및 가속화 모두를 저해하거나 그것들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모든 계획과 노력을 수포로 만들기도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고의 한 측면만 분석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고야말로 이른바 진보라고 하는 것, 달리 말해서 기술 발전의 가속화로 대변되기도 하는 그 진보를 추동하는 결정적이면서도 숨은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고와 속도의 양면적 상관관계를 두고 비릴리오는 얘기를 이어간다. “사고는 진보의 숨겨진 면이다. 완전한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 영역에서든 과학적· 기술적 영역에서든 진보는 상대적일 뿐이다. 자신의 환영(幻影)을 갖지 않는 진보란 없다. 사고는 진보의 환영이다” (배영달, [폴 비릴리오: 속도, 기술, 사고])

이 설명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기술 발전-진보-역사적 필연성’의 한 쌍과 ‘사고-환영-역사적 우연성’의 다른 한 쌍이 맺고 있는 상관관계이며, 이 관계는 다시 ‘인간과 자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손에 정복된 자연과 순수한 자연’, ‘자연을 또 노동을 통해 충족되는 인간의 욕구와 그 욕구를 발전적으로 대신하게 되는 욕망’ 간의 ‘다중변증법적 관계’로 확장한다.

5. 인간과 자연: 다중변증법적 관계


▎6월 13일 전남 구례군 화엄사 각황전 앞마당에서 요가 축제 ‘천 년의 숨결과의 만남’ 행사가 열리고 있다. / 사진:구례군청
코로나 사태가 발발한 지 곧 2년이 다 돼가는 이때,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가급적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일은 어쩌면 현재를 반추함과 동시에 미래를 가능한 것으로 개방하는 일과 직결할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에 쓰인 글의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자신의 1962년 작업, ‘Introduction a la modernité - Préludes’에서 선보인 통찰이다. 좀 길긴 하지만 이대로 묵혀두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 또 곱씹어 읽으면 읽을수록 음미할 만하다.

“인간의 손길이나 눈, 혹은 도구가 순수한 자연에 미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자연’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순수한 자연이 ‘존재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광대한 바다와 별들 사이의 공간. 말하자면 자연이란 인간이 없어지는 장소이며 지속(공간과 시간)이다. (…) 인간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단체를 이루거나 혹은 고립돼) 부족함을 부인하게 될 때, 그리고 자연적인 생물학적 욕구가 사라지게 될 때, 욕망은 성립하지 않는다. 욕망은 추상적이고 인공적인 것이 된다.”([전주곡 9: 자연과 정복된 자연], ‘모더니티 입문’, 이종민 옮김)

인간의 손길·시선과 인간이 제작한 도구가 한 번이라도 가닿는 순간, 자연은 그것 고유의 순수함을 상실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실 또는 그 상실의 와중에 발생하는 모순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자연의 존재 양식은 새롭게 규명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자리는 부재한다. 그 순수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은 존재하면서도 부재하게 되는, 또 다른 모순의 발생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같은 부재의 환영(phantasme)은 순간적인 역능(puissance)으로 개입하면서 인간이 형성해온 기존의 실재(réalité)에 틈을 내고 다시금 인간의 자리를 새롭게 마련해준다.

미래 진단하고 귀 기울이는 일에 소홀함 없어야

그러나 그 순간, 그렇게 마련된 새로운 자리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거기서 인간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거기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그렇듯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에 대한 인간의 자각이야말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능이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일부이기도 한 인간은 자연과 함께하는 신진대사를 통해 욕구는 물론 그 욕구가 역사·사회적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욕망까지도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간의 철저한 자기 인식이 수반될 때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비로소 구체적인 것이 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들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코로나 사태와 우리가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 및 그것의 설정 또한 한층 더 분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6. 속도·리듬·당처

사건, 또는 앞서 언급한 사고란 것은 어쩌면 인과율을 벗어나 있는, 이유를 해명하기가 퍽 곤란한, 그래서 예측 불가능할뿐더러 통제마저도 불가능한, 우발성으로 똘똘 뭉쳐 있는 현상 그 자체의 현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사태가 그런 사건·사고는 아닐까? 만약 이 질문이 일리 있는 것으로 들린다면 다양한 변이를 포함한 코로나19 전부의 박멸이나 이 사태의 종식 또한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그것이 가능해 보인다면 그 까닭에는 기술 발전은 물론 그 발전의 속도 및 가속화에 대한 일종의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을 공산이 크다.

이 같은 낙관론에 비판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꼭 불필요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과감하든 조심스럽든, 미래에 대한 진단을 내려보는 일과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도 소홀함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에 경도돼서도 안 될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시민 각자가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는 일, 또 그럼으로써 속도를 앞세워 그것을 정복하려 애쓰거나 그 노력에 지지를 보내기보다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리듬의 모순적 선순환과 그것을 통해 힘겹게 한 발씩 내딛는 인류의 역사를 매 순간 체감하고 목격하는 일일 터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와 뒤섞여 사는 일에 집중하는 일, 그 뒤섞임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상생활의 당처에서 체험하는 일, 시작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을 듯싶다.

- 전국조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연구교수 gukjoje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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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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