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9)] 일본 불교계와 결탁한 이용구, 통합 종단 ‘원종’ 창설 막후 조종 

근대 한국 불교 태동시킨 유신 운동 촉발 

천도교 손병희와 고종이 손잡으면서 ‘통합 일진회’ 계획 실패로
우치다, 식민정책에 불교 이용 새 구상… 젊은 승려들 반발 불러


▎'통합 일진회’의 송병준(왼쪽)과 이용구는 일본 불교와 결탁해 조선 시대 핍박받은 조선 불교의 친일화를 시도하며 일본 총독부의 한반도 식민지화를 가속화했다. / 사진:권태균
1906년 2월 20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도쿄를 출발해 이세신궁(伊勢神宮)으로 향했다. 이세신궁은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신체(神體)가 모셔진 신성한 성전이었다. 이토는 대한제국으로 부임하기 전에 아마테라스에게 참배하기 위해 이세신궁으로 갔던 것이다. 그 정도로 초대통감 이토의 임무가 막중했다. 이세신궁에서 아마테라를 참배한 이토는 수행원들과 함께 오사카, 부산을 거쳐 1906년 3월 2일 한양에 도착했다. 뒤이어 3월 9일 고종을 알현했다. 이로써 초대통감 이토의 보호통치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이토를 수행한 참모 중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동아주의(大東亞主義)를 내세우는 흑룡회(黑龍會) 주간(主幹)으로서,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우치다 료헤이는 ‘한국국상조사촉탁(韓國國狀調査囑託)’이라는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해 한국으로 왔다. ‘대한제국의 국가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직책’이라는 명칭 그대로, 우치다는 대한제국의 상황을 조사하여 통감 이토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같은 우치다의 보고를 토대로 이토의 보호 통치가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우치다는 통감부의 막후 실세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우치다가 주간으로 있던 흑룡회는 일본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조직이었다. 우치다 역시 일본 군부의 강력한 추천으로 ‘한국국상조사촉탁’이 될 수 있었다. 흑룡회는 일본의 낭인 검객들 중심으로 1901년 조직되었다. 흑룡회 회원들은 대륙팽창을 주장하며 한반도, 만주, 연해주, 중국 등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들을 통칭 대륙 낭인이라고 불렀는데, 세분하여 조선 낭인, 만주 낭인, 시베리아 낭인, 중국 낭인 등으로도 불렀다. 흑룡회란 명칭은 대륙 낭인들이 일본 제국을 만주 흑룡강까지 팽창시켜 대동아주의를 실현하자는 취지에서 붙인 것이었다.

흑룡회는 1893년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가 쓴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사상적 기반으로 했다. [대동합방론]은 서양 열강에 대항해 동양이 자립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제국 등이 ‘합방’을 통해 미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 같은 강력한 연방 국가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었는데, 특히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에서부터 ‘합방’이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인접국으로서 역사와 문화를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요충지에 자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대동합방론]은 일본 우익은 물론 조선 지식인,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양계초는 1898년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제목으로 다루이의 책을 중국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이용구·송병준, 일본 흑룡회와 이해관계 맞닿아


▎친일단체 일진회는 당시 조선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를 환영한다며 아치를 세웠다. 아울러 일본 황족이 조선의 상징물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이유로 당시 숭례문의 오른쪽 성곽을 허물었다. 사진은 1907년에 촬영한 숭례문.
[대동합방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흑룡회는 겉으로 동양 평화를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아 합방’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에서 대한제국을 보호국 또는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핵심 세력 역시 흑룡회였다. 대한제국을 보호국 또는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곧 대동아주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흑룡회는 동양 평화라는 가면을 쓴 침략주의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토를 수행해 한양에 온 우치다는 통합 일진회를 이용해 대한제국을 신속하게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치다는 통합 일진회의 고문이 됐다. 당시 통합 일진회의 이용구와 송병준 역시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에 깊이 공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의 민권을 향상하고, 나아가 농민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동합방’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고조선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한국사에서 농민을 수탈하고 탄압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왕과 지배세력이 그들 아닌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양반세력 역시 농민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자들 아닌가? 하지만 농민의 독자 힘만으로는 고종황제와 양반세력을 제압할 수 없었다. 1894년의 동학 농민 봉기가 처절하게 실패했던 사실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따라서 이용구와 송병준은 왕과 양반세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앞장서서 ‘대동합방’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즉 고종황제의 통치권을 무력화시키면서 농민의 민권을 향상한 후, 일본제국과 ‘대동합방’을 실현해 형식적인 고종황제의 통치권은 일본제국에 양여하고, 그 대신 실제적인 자치권을 동학 농민이 확보한다면 그것이 바로 농민 권익을 극대화하는 길일뿐만 아니라 동양 평화를 확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수천 년 동안 수탈과 탄압을 받아온 농민을 위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또 서양 열강에 맞서 동양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국권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보호청원선언서’를 앞장서서 추진한 것 역시 이런 생각에서였다. 이 같은 이용구와 송병준의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책이 바로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이었다.

그런데 이용구, 송병준의 통합 일진회와 결탁한 우치다의 계획, 즉 통합 일진회를 이용해 대한제국을 신속하게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던 계획은 손병희 때문에 실패 위기로 몰렸다.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혁하고 고종 황제와 협력했기 때문이다. 고종 황제의 인가로 합법화된 천도교는 날로 강화됐다. 고종 황제를 따라 양반세력들 역시 천도교에 협조했다. 자연스럽게 고종 황제와 양반세력 그리고 농민세력이 대동단결하는 형세가 됐다. 반면 통합 일진회는 매국 조직으로 지탄받으면서 수세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치다가 통합 일진회를 내세워 식민정책을 밀어붙이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우치다는 새로운 대안을 구상했다. 농민보다 더 탄압받고 더 차별받은 세력들과 결탁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농민보다 더 탄압받고 더 차별받은 세력으로는 노비와 불교가 있었다. 하지만 노비는 아직 의식화되지도 않았고, 조직화 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불교는 조선왕조 이전 1000년간 국가종교로 군림하던 저력을 가진 종교였다. 비록 조선왕조 들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온갖 탄압과 차별을 받았지만, 대한제국 당시에도 불교는 전국에 걸쳐 1000여 개 사찰과 수만 명의 스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불교 신도는 훨씬 더 많았다. 이런 불교 세력을 통합해 친일 불교로 만든다면 그들은 통합 일진회보다 더 강력하게 고종 황제와 양반세력을 상대로 투쟁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일본, 보호통치 강화하고자 탄압받은 조선 불교 ‘타깃’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왼쪽), 다케다 한시(가운데), 일진회장 이용구. 1907년 송병준의 정계 진출 이후에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자 이듬해 우치다와 다케다는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가 일본 정계의 유력인사에게 일진회의 손을 들어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불교는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본 불교를 대표하던 정토종(淨土宗), 일련종(日蓮宗), 조동종(曹洞宗)이 적극적이었는데, 그들은 정부권력에 탄압받는 조선 불교를 보호한다는 이유, 즉 호법(護法) 명목으로 한반도에 진출했다.

일본 정토종은 서방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교종(敎宗)의 일파였다. 일본 정토종은 1877년 9월 동본원사(東本願寺)의 오쿠무라 엔심(奧村圓心)을 부산으로 파견해 포교하기 시작했다. 한일관계사에서 오쿠무라의 부산 포교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졌다. 원래 일본 불교는 538년 백제를 통해 전래하였다. 그렇게 한반도를 통해 수용된 일본 불교가 1339년이 지난 후 거꾸로 조선에 포교하게 됐다. 이는 문화교류라는 면에서 완전한 역전이었다. 특히 오쿠무라의 정토종은 개화승(開化僧) 이동인과 연결되면서 개화파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일본 정토종에 뒤이어 1895년 4월에는 일련종의 사노 젠레이(佐野前勵) 스님이 한양에 들어왔다. 일본 일련종은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즉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교종의 일파였다. 그들은 ‘나무 묘법연화경(南無 妙法蓮華經)’을 주문처럼 외우는데, 그것이 일본어로는 ‘남묘 호렌게쿄’로 발음되어 한국인들은 ‘남녀 호랑교’로 알아듣곤 했다. 그래서 일본 일련종은 한국에서 ‘남녀 호랑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일련종의 사노 스님이 1895년 4월 한양에 와서 조선왕조의 억불 정책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승도입성금지(僧徒入城禁止)’를 완화했다. 이로써 한국 불교계는 일본 불교계에 크나큰 호감을 갖게 됐다.

마지막으로 일본 조동종은 선종의 일파였다. 조선 시대부터 한국 불교는 교종 대신 선종의 일파인 조계종(曹溪宗)이 주류였다. 특히 한국의 조계종은 선(禪)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을 중시하는 임제종(臨濟宗) 계통이었는데 반해 일본의 조동종은 간화선이 아니라 묵조선(黙照禪)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한국 조계종과 구별됐다. 이 같은 일본 조동종의 스님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바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였다.

다케다 한시는 1863년 니가타현(新潟縣)에서 태어났고, 21세 되던 해에 조동종을 대표하는 현성사(顯聖寺)로 출가했다. 그런데 다케다는 서른 살이 되던 해 갑자기 부산으로 건너와 조선 낭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케다는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발발하자, 부산 지역의 조선 낭인들과 함께 천우협(天佑俠)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천우협이 바로 흑룡회의 전신이었다. 당시 천우협의 중심인물은 이토의 참모로 온 우치다 료헤이 그리고 다케다 한시 등이었다.

‘낭인’ 출신 스님 다케다, 한국 불교 ‘친일화’ 선봉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조동종 신자였다. 그는 일본 흑룡회, 불교, 통합 일진회를 활용해 한반도 식민지화를 가속화했다. 중앙포토
1894년 당시 우치다와 다케다는 천우협 낭인들을 거느리고 전라도의 전봉준을 찾아가 협상하기까지 했다. 목표는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운 전봉준의 동학을 개화조직으로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 1895년 1월에 전봉준에게 쓴 편지에서 다케다는 전봉준을 근대 일본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같은 영웅으로 치켜세우면서, 사이고 같은 비극적 영웅이 되지 말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같은 개화 영웅이 되라고 설득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유신의 3대 거두로서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척양(斥洋) 정책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반면 이와쿠라 도모미는 메이지 천황의 측근으로서 처음에는 척양을 주장하다가 직접 미국과 유럽을 돌아본 후 개화로 전향한 인물이다. 다케다는 조선의 전봉준이 이와쿠라 도모미처럼 개화정책으로 전향하지 않는다면 전봉준 자신은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비극을 맞이할 것이고, 조선 역시 망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속히 개화정책으로 전향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편지는 전봉준이 처형됨으로써 전달되지 못했다. 이 편지를 1909년에 읽어본 이용구는 ‘그 당시(1894년) 전봉준은 한 명의 영수에 불과했고, 나 또한 그 당시 삼남(三南)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 편지가 그 당시 내 손에 들어왔다면 한국의 사정을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을까?’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동학 지도자들이 1894년부터 척양척왜가 아닌 개화정책을 추진했더라면 대한제국이 식민지 위기로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이었다.

한편 1894년 전봉준과 협상한 다케다는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1895년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을미사변에 가담했다. 그 때문에 다케다는 일본으로 강제 송환됐지만 곧 사면됐고, 1901년에는 현성사의 주지 스님이 됐다. 일본 조동종을 대표하는 현성사 주지로서 다케다는 불교 활동에 전념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1906년 연말에 다케다 한시는 다시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토의 참모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간곡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치다 료헤이가 다케다 한시를 초청한 이유는 한국 불교를 친일 불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케다 같은 인물이 없었다. 우선 다케다는 1890년대부터 우치다와 생사를 함께한 낭인 동지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조동종의 대표 사찰인 현성사의 주지 스님으로서 일본 불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게다가 당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 역시 조동종 신자였다. 이런 점에서 다케다는 우치다 자신은 물론 조선의 불교 지도자들 그리고 통감 이토와도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다케다 한시는 죽기 전에 [오해구현(鰲海鉤玄)]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오해(鰲海)’는 전라도 앞바다 즉 서해를 의미하고, ‘구현(鉤玄)’이란 선(禪)을 닦는다는 의미이다. 즉 다케다는 자신이 한반도에서 했던 온갖 활동들을 [오해구현]이라는 글로 남겼다. 이 글에 의하면 다케다는 1906년 12월 17일 밤 흑룡회 회원들이 마련한 송별회에 참여했다. 다음 날 일본을 떠난 다케다는 부산을 거쳐 12월 26일 한양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다케다는 우치다의 거처인 거후당(居候堂)에서 함께 생활했다. 당시 다케다는 일본 조동종의 한국포교사(韓國布敎師)라는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이용구·다케다, 흑룡회 주간 우치다 집에서 첫 만남


▎일본 불교를 대표하던 정토종, 일련종, 조동종은 정부 권력에 탄압받는 조선불교를 보호한다는 이유, 즉 호법(護法) 명목으로 한반도에 진출했다. 사진은 일본 정토종 사찰.
한양에 도착한 다케다는 우선 대한제국의 종교 현황을 확인했다. 확인 결과 1906년 연말 당시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는 기독교로 나타났다. 기독교 신자 중에서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람이 20여 명이나 됐다. 그들은 서구 열강을 배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반면 유교와 불교는 거의 유명무실이었다. 일부 유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켰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입을 닫고 있었으며, 불교도들은 죽은 듯 조용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한다면 대한제국의 종교계는 기독교가 장악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케다는 이런 상황을 막고자 했다. 방법은 이용구의 시천교와 결탁해 조선 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오해구현]의 ‘초여이봉암견(初與李鳳庵見)’이라는 글에서 다케다는 이용구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봉암(鳳庵)은 이용구의 호이다. 이 글에 의하면 다케다와 이용구는 삼원(三元)에 처음 만났다. 삼원이란 정월 초하루이다. 따라서 다케다와 이용구는 1907년 1월 1일 처음 만났다는 뜻이 된다. 장소는 우치다의 거처 즉 한양의 거후당(居候堂)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이용구에게 다케다를 소개한 사람은 우치다였음을 알 수 있다.

다케다는 처음 만난 이용구에게 시천교의 주문을 외워 보였다. 시천교의 주문이란 동학 주문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다케다는 1894년 전봉준을 만났을 때부터 이 주문을 알았을 것이다.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1906년 9월에 출교당한 이용구와 송병준은 1906년 12월 13일 시천교를 창립했다. 하지만 시천교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또 통합 일진회는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때에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동학에 관심을 가진 일본 고승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이용구는 매우 놀랐다. 보통 인연이 아니라 판단한 이용구는 다케다와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용구와 다케다는 진탕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눈보라가 격심해졌다.

일본에 포섭된 ‘원종’ 종단 매국조직 평가 못 면해


▎일진회와 일본 불교가 결탁해 공략하면서 한국 불교는 친일화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사진은 1944년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전국 사찰과 스님들의 헌금을 모아 일본 해군 및 육군에 헌납한 97식 전투기 조선불교호.
먼저 다케다가 이용구에게 시를 건넸다. 이런 내용이었다. “바람도 거칠고 눈도 심한데 (風饕而雪虐)/ 이렇게 어둑한 것은 어째서일꼬. (如此晦冥何)/ 슬픈 노래 번갈아 일어나더니 (悲歌互相發)/ 눈발들이 조화롭게 서로 화답하네. (霏霏調相和)/” 이 시의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하겠지만, 다케다는 어두운 밤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눈발들이 조화롭게 서로 화답하는 모습을 강조했다. 그것은 복잡하게 꼬인 대한제국의 내부 사정, 나아가 얽히고설킨 한일 관계를 다케다와 이용구가 합심해 잘 풀어나가자는 뜻으로 읽힐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다케다는 이용구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껏 돕겠다고 제안한 것과 같았다.

이에 대한 이용구의 화답 시는 다음과 같았다. “백설이 내 마음과 함께 하더니. (白雪與我心)/ 푸른 술통이 벗과 더불어 자리했네. (靑樽媒友臨)/ 무궁하고 무한한 뜻이여 (無窮無限意)/ 말과 침묵 간에 깊고 깊도다. (言不言間深)” 이용구는 첫 만남에서 다케다를 벗으로 부르며 깊은 우정을 느낀다고 응답했는데, 다케다에게 그 정도로 매혹됐다고 할 수 있다. 다케다는 곧 통합 일진회의 고문이 됐다.

이렇게 이용구를 포섭한 다케다는 1907년 3월 12일 ‘여이봉암권불교재흥서(與李鳳庵勸佛敎再興書)’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용구에게 보내 불교 재흥을 권하는 편지’라는 제목 그대로 불교 재흥을 권하는 편지였다. 이 편지에서 다케다는 조선 불교를 단기간에 재흥하기 위한 방책으로, 한양에 불교통합조직을 창설하고, 그 불교통합조직을 일본 불교가 지도편달 할 것을 제안하면서, 그렇게 부흥시킨 불교를 시천교의 우익으로 삼는다면 시천교와 불교가 주류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 같은 다케다의 제안에 이용구는 적극 찬동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과 양반 관료들에게 탄압받은 불교 세력에 이용구는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이용구는 그런 불교 세력과 합력해 농민과 불교도가 주도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나라를 건설할 수만 있다면 일본 불교계와의 결탁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용구와 다케다에게 포섭된 해인사의 이회광 주지 스님이 1907년 6월 불교연구회 회장과 현 동국대학교 전신 명진학교 교장으로 추대돼 불교계 주도권을 장악했다. 뒤이어 1908년 3월, 이회광은 불교 통합 조직인 원종(圓宗) 종단을 창설하고 종정(宗正)에 추대됐다. 이 같은 원종(圓宗) 종단을 통해 한국 불교는 수백 년 만에 역사의 주류무대에 등장했고, 이용구의 시천교는 다시 강력해졌다. 그러나 이용구와 다케다의 조종을 받았기에 원종(圓宗) 종단은 통합 일진회와 같은 매국조직이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원종 종단에 반발하는 젊은 승려들이 등장해 불교 유신운동을 일으키면서 근대 한국 불교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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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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