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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8)] ‘대동여지도’ 김정호는 1인 출판사 사장님이었다? 

“능숙하게 그려내고 능란하게 새긴 것을 인쇄했다” 

민간 출판업자들 한글소설 등 시대에 부응한 방각본(坊刻本) 펴내
책이 지식인 전유물 아닌 민중의 소유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김정호 역을 맡은 배우 차승원이 지도책을 펼쳐 든 채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오늘날의 ‘1인 출판사 사장님’이다. / 사진:CJ엔터테인먼트
2021년 월간중앙 7월호 필자의 글에 ‘방각본’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필자는 자주 쓰는 말이므로 별생각 없이 이 단어를 썼는데, 그 글을 읽은 어떤 분이 “방각본이 뭐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막상 답변하려고 하니, 방각본을 설명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방각본(坊刻本): 조선 후기에 민간의 출판업자가 출판한 책. 주로 목판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방각본소설’이라는 항목도 있는데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영리를 목적으로 판각(版刻)해 출판한 고전소설. 판각한 지역에 따라 경판본·완판본·안성판본으로 나뉘며, 1846년 무렵부터 출판돼 현재 57종의 작품이 전한다”고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낱말 풀이는 대체로 무난하지만, 위의 뜻풀이에 들어 있는 단어인 목판(木版)은 무엇이고, 또 판각(版刻)이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경판본이나 완판본은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방각본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분에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드렸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책이 있었는데, 누가 책을 만들어냈는가에 따라 우선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관청에서 간행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출판한 것이다. 그런데 민간의 출판물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다시 둘로 나뉜다. 출판 주체와 목적에 따라 조선시대 서적을 분류하면, 첫째 관청에서 간행한 책, 둘째 민간에서 간행한 비영리 서적, 셋째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간행한 책 등 세 가지가 된다.

첫 번째의 관청에서 간행한 책을 관판본(官版本) 또는 관각본이라고 하고, 두 번째의 민간에서 간행한 비영리 서적을 사판본(私版本) 또는 사각본이라고 하며, 세 번째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간행한 책을 방각본이라고 한다.

방각본은 지금의 상업출판물, 제작자는 출판인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현대의 지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정교하게 그려졌다.
현대에 들어와서 우리가 보는 책은 대부분 돈을 주고 사서 보는 것이므로, 방각본은 지금의 책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책의 생김새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방각본이 무엇인가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관청에서 간행한 관판본과 민간에서 간행한 비영리 목적의 책인 사판본에 대해서 약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방각본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방각본이 관판본이나 사판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판본은 국가 기관에서 간행하는 것으로 서울의 중앙부서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방의 관청에서도 간행했다. 18세기까지 조선에서 필요한 책은 대부분 관청에서 간행한 것으로 충당했으므로, 조선시대 출판은 국가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간에서 사적으로 간행하는 서적으로는 문중에서 간행하는 족보나 문집, 또는 사찰에서 간행하는 불경 같은 것이 있다. 이런 책은 관판본과 마찬가지로 판매하는 책이 아니라, 문중이나 사찰처럼 특정한 집단에서 제작해서 그들 사이에서 보는 책이다.

관판본과 사판본은 판매용 책이 아니다. 관청에서 간행한 책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고, 문중이나 사찰에서는 돈을 모아 책을 간행해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에 비해 방각본 제작자는 이 책을 판매할 목적으로 만들었고, 또 방각본을 원하는 사람은 당연히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방각본의 가장 큰 특징은 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방각본이 언제부터 나오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보인다. 16세기에 나왔다고도 하고, 또는 18세기라고도 하는데, 필자는 1800년 무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6세기나 18세기에 방각본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견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자가 조선의 방각본 시작을 1800년 무렵이라고 보고, 또 진정한 방각본 시대는 19세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시기에 비로소 다양한 방각본이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닌 것처럼, 방각본일 가능성이 있는 책이 하나 나타났다고 해서 바로 방각본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중반 서울에 도서대여점(세책집)이 출현한 것도 상업출판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 나무로 활자를 만들어서(목활자) 이것으로 족보나 문집을 제작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직업도 출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책은 한 권 한 권 모두 손으로 필사한 필사본이었고, 주문을 받아서 목활자로 족보나 문집을 제작하는 것은 책이라는 상품을 대중에게 판매하는 것은 아니다.

상업출판이란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를 목적으로 책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한 제품을 출판물이라 하고, 출판물을 제작하는 사람을 출판인, 그리고 그 회사를 출판사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 방각본은 상업출판물이고, 방각본 제작자는 출판인이다. 그런데 조선의 방각본 제작자는 대체로 책을 만드는 전 과정을 혼자 맡아서 진행했으므로, 방각본 출판사는 ‘1인 출판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데, 이 지도를 인쇄한 목판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 ‘대동여지도’와 김정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 지도를 어떻게 제작했으며, 김정호라는 인물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잘 알기 위해서는, 19세기 조선의 방각본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동여지도’는 방각본이고, 김정호는 방각본을 제작하는 출판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정호가 지도 제작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만든 지도는 여러 가지가 남아 있는데 ‘대동여지도’뿐만 아니라 보물로 지정된 ‘청구도’도 그가 그린 것이고, ‘동여도’나 ‘수선전도’도 김정호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호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극히 적어서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이다. 이 책에서 유재건은 김정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김정호는 호를 고산자(古山子)라고 한다. 본래 재주가 많은데, 지리학을 특별히 좋아해 널리 상세하게 검토하고 수집했다. 일찍이 ‘지구도’를 만들었고, 또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 능숙하게 그려내고 능란하게 새긴 것을 인쇄해 세상에 내어놓았는데, 상세하고 정밀한 것이 고금에 비할 바가 없다. 나도 하나를 얻었는데, 진실로 보배가 될 만하다. 또 [동국여지고] 열 권을 편집했는데,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매우 아깝다.”

지도제작에 인쇄까지… 못하는 게 없었던 김정호


▎2016년 10월 제23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가 경희궁에서 열렸다. 조선시대 갑오경장 때 폐지됐던 과거제는 폐지 100년 만인 1994년에 재현됐다.
이것이 김정호에 관해 기술한 내용의 전부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김정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이런 정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향견문록]은 신분이 미천한 사람 중에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을 소개한 책이므로, 이 책에 김정호가 들어 있다는 사실로 보아 김정호는 양반 신분의 인물이 아니었다.

방각본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방각본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사람의 신분은 김정호처럼 중인 이하였다. 19세기 방각본 출판인 가운데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방각본 출판은 지체가 높은 사람은 하지 않는 일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원고가 있어야 하는데, 방각본을 간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원고가 필요하다. 김정호는 이 원고를 직접 만들었지만, 19세기 방각본 출판인 가운데 김정호처럼 자신이 간행할 책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저작권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남의 책을 베껴서 그대로 인쇄하기도 했다.

원고가 준비되면 이 원고를 깨끗하게 쓴 다음, 이를 거꾸로 나무판에 붙이고 이를 그대로 새겨서 목판을 만든다. 그리고 먹을 갈아 인쇄에 쓸 먹물과 종이를 준비해서 목판에 먹물을 바르고 여기에 종이를 붙여서 찍어낸다. 요즈음 스탬프나 도장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장 한 장 찍어낸 다음 이를 묶어서 한 권의 책을 만든다.

유재건은 “김정호가 능숙하게 그려내고 능란하게 새긴 것을 인쇄했다”고 말했는데, 이를 통해 김정호는 목판을 새기는 일과 목판에 새길 밑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모두 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김정호는 완성된 목판을 찍어내는 일까지도 맡아서 했으므로, 지금으로 치면 인쇄까지 해낸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방각본 출판인들은 대체로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일을 하는 각수(刻手)를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각본 출판인은 자신이 만든 책을 판매하는 일까지도 맡아서 했다.

조선시대 책을 읽고 공부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한 것이다. 과거시험의 답안은 한문으로 작성하는 것이므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 필요한 책은 모두 한문으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 공부를 위해서는 꽤 많은 책을 읽어야 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과거제도가 폐지될 무렵까지 조선에는 상설 서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를 준비한 수많은 수험생은 그 많은 책을 어디서 구했을까?

정조 24년(1800) 3월 21일에 실시된 과거에 응시한 응시생 숫자는 문과 시험에 11만1838명이고, 무과시험에 3만5891명이었다. 문과와 무과를 합치면 약 15만 명 정도가 과거에 응시했다. 문과는 말할 것도 없고, 무과시험에도 무예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대답하는 시험이 있었으므로 무과 응시생도 책을 읽어야 했다. 이날 과거에 응시한 수험생들만을 놓고 보더라도 만약 한 사람이 열 권씩 책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날 응시생이 가지고 있는 책만도 150만 권이 되는데, 한 사람당 100권의 책을 갖고 있었다면 1500만 권이 된다.

이는 순전히 수험생들이 가지고 있는 책만을 계산한 것이다. 이미 관직에 있거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던 책을 더한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서점도 없었는데, 이렇게 많은 책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으며, 또 누가 이처럼 많은 책을 공급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의문은 간단히 풀린다. 18세기까지 조선의 책은 대부분 관청에서 간행한 관판본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의 중앙관서나 지방의 각 고을에서는 책을 찍어내기 위해 많은 목판을 제작해서 보관했다. 그리고 각 지방의 서원에서도 목판을 소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관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목판으로 책을 인쇄해서 갖고 싶다면, 종잇값 등의 제작 경비를 관청에 지불하면 관청에서 책을 찍어서 줬다. 물론 관청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어야 가능한 얘기다. 18세기 말까지는 관판본만으로도 조선 국내의 책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방각본이 생겨난 이유는 이와 같은 관판본을 위주로 한 조선의 책 공급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필요한 책의 목판이 관청에 없다거나, 또는 목판이 낡아서 좋은 품질의 책을 찍어낼 수 없게 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관청에서 요구하는 신분을 갖추지 못한 사람 중에도 책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많아졌을 가능성도 크다. 아무튼 책에 대한 요구가 과거와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새로운 시대 요구에 부응한 한글 방각본 등장


▎1869년 간행된 [간독정요]. 편지 쓰는 예문을 모아놓은 책으로 최대 수십만 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 사진:이윤석
조선시대 관판본을 중심으로 한 서적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는 방각본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방각본은 기존의 한문으로 된 책만이 아니라 한글로 된 책도 간행했다. 한글이 창제된 이래 순전히 한글로만 쓴 책을 간행한 일은 거의 없었다. 유교나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든가 중국의 시를 번역한 책을 간행한 일은 있지만, 조선 사람이 한글로 쓴 소설이나 노래를 책으로 낸 일은 없었다. 한글방각본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새로운 출판물이었다.

관판본이 위에서 아래로 필요한 지식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면, 방각본은 사람들의 요구를 파악한 출판인들이 그 요구에 맞는 상품을 만들어서 판매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각본은 조선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고,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대중의 지식과 오락에 대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다.

관판본은 상층의 남성 지식인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여성과 중·하층의 남성을 위한 관판본은 거의 간행되지 않았다. 19세기 말까지 조선에서 관판본 간행의 이러한 기본 방향은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됐는데, 이를 통해 조선왕조 지배층의 사고방식은 건국 초기 이래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반 서울에서 도서대여점이 나타났을 때 조선사회는 이미 변화하고 있었고, 또 1800년 무렵 방각본이 간행될 때쯤에는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사회가 됐다고 봐야 한다. 방각본의 출현은 중·하층과 여성이 독서계층에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소수의 사대부가 지식과 교양을 독점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글방각본의 출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대 베스트셀러는 편지 잘 쓰는 법 가르쳐주는 책


▎19세기 말 간행 경판본 [춘향전]. [춘향전]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고전소설의 대표작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 사진:이윤석
한글방각본은 거의 모두가 소설이므로, 지금도 잘 알려진 작품이 많다. [춘향전] [구운몽] [심청전] 등의 작품은 19세기에도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고, 현재까지도 고전소설의 대표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 [남훈태평가]처럼 당대의 유행가를 모아놓은 책도 있었는데, 이 책은 이후에 나오는 많은 유행가 가사집의 선구적인 책이다. 현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집에서 쉽게 점을 칠 수 있게 만든 책 [직성행년편람]이라든가, 편지 쓸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지 예문을 실어놓은 [언간독] 등도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이다.

방각본은 서울·전주·안성·대구 등지에서 나왔는데, 한글소설은 대구를 제외한 세 곳에서 나왔다. 이를 경판본·완판본·안성판본이라고 말한다. 한글방각본 가운데는 [춘향전]처럼 지금도 잘 알려진 책이 많이 있는 데 비해, 한문방각본은 거의 잊혔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편지 쓰는 예문을 모아놓은 [간독정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실어놓은 [사요취선], 한시를 지을 때 대구(對句)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편찬한 [문자류집] 등은 19세기에 엄청난 양이 간행돼 팔린 책인데, 이제는 전문가나 알고 있는 책이 됐다.

한문방각본 베스트셀러 [간독정요]는 19세기 중반에 처음 간행된 이래, 여러 군데 방각업소에서 같은 제목의 책이 많이 나왔고, 또 [간독회수]나 [간례휘찬]처럼 거의 같은 내용을 책 제목만 다르게 붙여서 나온 책도 여러 종류가 있다. 20세기 초에 새로운 편지 쓰는 법에 관한 책이 나오기 전까지 약 60~70년 동안, 적어도 수만 권 내지는 수십만 권 이상 팔린 책이다.

한국의 출판에 관해서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같은 책이다. 그러나 이런 책이 당대에 어떤 위치에 있든 책이었는지 본다면, 두 책은 지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는 거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는 심한 억압을 당했으므로 불교 서적은 불교계 이외의 인사들은 관심도 없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열하일기]는 소수의 지식인 사이에 필사본으로만 전해진 책이었다. 대중의 지식을 늘리고 출판을 활성화한 면에서 본다면 [간독정요]는 [직지]나 [열하일기]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

중·하층의 남성과 여성이 주된 소비자였던 방각본은 책이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민중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각본은 대중의 교양과 지식을 넓히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오락물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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