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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8)] ‘소문 감옥’에 갇힌 청상과부의 억울한 죽음 

시숙과 친오빠는 왜 죄 없는 과부를 물에 빠뜨려 죽였을까? 

음행 증거 없어도 입길 오르면 죄인 되던 시대
양반가에서는 자손 벼슬길 막힐까 ‘화근’ 제거 나서


▎과부의 수절은 양반가·여염 막론하고 조선시대의 일상이 됐다. 1990년 윤석봉 감독의 영화 [이조여인 숙명사 청상계(李朝女人 宿命史 靑孀契)]의 한 장면.
"시숙(媤叔)과 친오빠가 음란한 행동을 한 명백한 증거를 보지도 않고 단지 근거 없는 풍문에 따라 사사로이 과부를 죽이기에 이르렀다. 상복의 끈으로 묶고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졌으니, 그 광경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이런 일은 풍속의 교화가 중하고 법리는 도리어 가볍다. 주범과 종범을 막론하고 모두 사형에 처해 죽은 과부의 영혼을 위로함이 마땅하다.”([심리록] 권17 ‘안협현이언의 옥사’)

1789년 정조 임금은 강원도 안협현에서 일어난 청상과부 구씨 살인 사건에 대해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거의 4년에 걸친 관찰사·형조·대신들의 법리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헛소문만으로 과부 살해를 획책한 시숙 이언과 이를 도운 친오빠 구성대 둘 다 목숨으로 죄를 갚아야 한다는 논지였다. 최종 판결은 이듬해 나왔다. 구성대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럼 이언은 마땅한 죗값을 치렀을까?

사건의 발단은 17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도 안협현에 망측한 소문이 떠돌았다. 이씨 집안의 홀로 된 며느리 구씨 집에 외간 남자가 출입한다는 것이었다. 문중 어른 이언은 제보를 받고 노여움에 휩싸였다. 이언에게는 죽은 형과 조카가 남긴 질부였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 정말 남자가 드나들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지체 높은 사대부가 여인이 남의 입길에 오른 것만으로도 죄인이다.

산 채로 익사당해야 했던 구씨의 기구한 운명


▎2003년 이재용 감독의 영화 [스캔들-남녀상열지사]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배우 배용준과 이소연. 난봉꾼 조원 역을 맡은 배용준은 정절녀 숙부인(전도연 분)의 정절을 유린한다.
이언은 안협현에서 행세하는 양반이었다. 집안의 불명예를 참을 수 없었다. 조카며느리가 음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문중의 어른으로서 화근을 제거하기로 했다. 마을을 지나는 임진강에 과부를 던져 넣어 음란한 소문을 가라앉히려 한 것이다. 이언이 앞장서자 문중 사람들도 따랐다. 과부가 음행으로 사헌부의 ‘자녀안(恣女案)’에 이름을 올리면 집안 자손들의 벼슬길에 지장이 생긴다.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단, 친정의 협조는 구하는 편이 좋았다. 자칫 관아에 고발해 송사라도 벌이면 일이 커질 수 있었다. 이언은 과부의 친오빠 구성대를 불러 으름장을 놓았다. 여동생이 행실을 잘못해 시댁의 위신에 먹칠했다고 하자 그는 수치스러웠다. 출가 외인이긴 하지만 구씨 집안에도 가문의 망신이었다. 이 치욕을 씻으려면 제 손으로 동생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고 친정 오빠는 생각했다.

그해 8월 이언은 하인을 보내 조카며느리 구씨를 불러냈다. 시숙의 부름을 받고 강가에 다다른 과부는 이씨 일족이 모인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 개중에는 오빠 구성대의 얼굴도 보였다. 이언이 음란한 행실을 꾸짖자 구씨는 울부짖으며 부인했다. 혹시라도 뒷말이 나올까 봐 죽은 듯이 지내야 했던 과부의 삶이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한낮에도 촛불을 켜 떳떳함을 밝혀온 세월이다. 음행이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간절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구성대가 풀어준 상복 끈으로 문중 젊은이들이 그녀의 손발을 묶었다. 여동생이 온몸으로 저항하자 친정 오빠는 운명을 받아들이라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불쌍한 과부는 자루에 담긴 채 돌까지 매달고 임진강에 던져졌다. 산 채로 익사 당한 것이다. 시신은 이언의 지시로 묘비도, 관도 없이 구덩이에 매장됐다. 헛소문이 빚은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청상과부 살해 현장에는 이씨 일족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나와 있었다. 그들은 음란한 소문의 주인공을 구경하려다가 졸지에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고 말았다. 자신은 결백하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한 과부를 사람들은 동정했다. 그녀의 억울한 죽음은 곧바로 관아에 고해졌다. 안협현 사또는 시신을 검시할 오작인(仵作人) 등을 거느리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로써 이언과 구성대의 옥사(獄事)가 시작됐다.

청상과부(靑孀寡婦)는 젊어서 남편을 잃은 여자를 말한다. 수절한다지만 혈기 왕성한 나이다. 달빛이 창으로 흘러들면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이 어찌 외롭지 않겠는가.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소슬바람에 낙엽 하나 뜰에 내려앉아도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티를 내면 곤란하다. 과부의 삶은 소문의 감옥에 갇혀 있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로 은밀한 뒷공론에 오르기에 십상이다. 헛소문이라도 돌면 안협현의 구씨처럼 원통하게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 풍문(風聞), 바람결에 듣는 말은 치명적이다. 18세기 대문호 박지원은 과부 풍문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바람이란 소리는 있되 형체가 없다.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손으로 잡고자 해도 잡히는 게 없으며, 허공에서 일어나 능히 만물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무형(無形)의 일을 가지고 들뜬 가운데서 사람을 함부로 논하려 드느냐?”(박지원, [연암집] 권1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연암은 청상과부로서 아들 형제를 번듯한 벼슬아치로 길러낸 어머니의 입을 빌려 질타했다. 어느 날 아들들이 풍문을 일으킨 과부를 문제 삼아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으려 하자,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품에 간직하고 있던 엽전 한 닢을 꺼냈다. 테두리도, 글자도 닳아 없어진 엽전이었다. 어머니는 혈기가 오르는 밤마다 동전을 굴리면서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10년을 닳도록 만지고 20년을 품에 간직했다.

'열녀전'에 담긴 청상과부의 속마음


▎수절 과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창렬각(彰烈閣).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운 전각이란 뜻이다.
그것은 풍문을 경계하고 죽음을 참아낸 부적이었다. 닳아 없어진 엽전마냥 닳아 없어졌을 청상과부의 속마음이었다. 아, 그 모진 절개와 맑은 행실이여! 아들 형제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과부 수절은 어느새 조선의 일상이 됐다. 18세기에 이르면 수절로는 열녀 반열에 들지 못했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도 풍문에 흔들리기 일쑤였다. ‘소문 감옥’의 치욕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안의현감 시절 박지원은 그 단적인 사례를 목도했다. 1793년 통인 박상효의 조카딸이 남편 삼년상을 마치고 독약을 삼켰다. 열녀 박씨의 친정은 선대부터 안의현 아전으로 일했다. 박씨는 19세에 함양군 아전 집안과 혼약을 맺었다. 신랑은 결혼 전에 이미 폐병이 깊어 오래 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친정에서는 혼처를 바꾸려고 했지만, 그녀가 이 가망 없는 결혼을 밀어붙였다. 혼약을 맺으면서 수절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남편은 초례를 치르고 반년이 채 못 돼 죽었다. 박씨는 지아비 상(喪)에 정성을 쏟았고, 시부모 또한 극진히 섬겼다. 순절한 것은 삼년상을 마친 직후였다. 과부는 예를 다하고 먼저 간 신랑을 따라나섰다. 어찌 열녀라 하지 않겠는가. 여러 고을의 칭송이 가득했다. 함양군수와 산청현감이 전(傳)을 지었으니, 친정이라 할 안의현의 사또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박지원은 붓을 들었다. 연암의 전은 남달랐다.

“생각하면 박씨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으랴!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친척들이 두고두고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동리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박지원, [연암집] 권1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그는 자꾸만 과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맹목적인 신념에 가려진 진짜 속내를 헤아리려고 한 것이다. 자고로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얻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은 [경국대전]에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은 정직(正職)에 등용하지 말라”는 금고 조항까지 넣었다. 박지원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모두 수절해야 하는 걸까? 이것은 성리학을 신봉하고 벼슬길에 매달리는 양반가의 법도이지 만백성이 따를 일은 아니다.


▎연암의 박지원의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박지원 초상. 매서운 눈매와 우람한 몸집이 인상적이다.
연암은 촌구석의 어린 아낙이나 여염의 젊은 과부들이 절개를 지킨다며 생목숨 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남편을 뒤따라 물에 빠지거나, 불에 뛰어들거나, 독약을 먹거나, 목을 매달아 죽는 게 열녀라니 가혹하지 않은가. 열(烈)은 정욕을 억누르고 절의를 좇는 성리학의 이상적인 사랑법이다. 하지만 수절 과부들이 목숨까지 내놓는 데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박지원은 풍문에 방점을 찍었다. 소문 감옥에서 과부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다.

청상과부를 넘보는 사내들도 문제였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 홀아비의 과부 보쌈이 널리 행해져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이와 같은 약탈혼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남자들이 흑심을 품고 훔치려 한 것은 과부의 정절만이 아니었다. ‘과부는 은이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고 했던가. 부자 과부를 노리는 자들도 많았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내들은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가만있는 과부 ‘몹쓸 년’ 만들어야 직성 풀렸던 시절


▎함경남도에서 발원해 경기도 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돼 서해로 흘러 드는 임진강.
18세기 문인 임매가 쓴 [잡기고담]에 흥미로운 송사가 나온다. 경성의 양갓집 과부가 머슴을 부리면서 혼자 살았다. 여주인은 하인을 인간적으로 대우했다. 스스럼없이 집안일을 의논하고 철마다 옷까지 해줬다. 언제부턴가 머슴은 흑심을 품었다. 과부를 원했지만 받아주지 않자 그는 둘이 은밀한 관계라는 성 추문을 여기저기 흘렸다. 여주인이 정을 통하다가 관계를 끊으려 한다며 형조에 고발까지 했다.

당시 법에 양갓집 여자가 사사로이 간통하면 노비로 만들어 상대남에게 주는 조항이 있었다고 한다. 음흉한 머슴은 그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재판이 열리자 그는 과부가 정표로 줬다면서 철마다 해준 옷가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과부는 결백을 증명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머슴이 형조 아전들을 매수해 상간(相姦)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몰린 과부에게 문득 꾀가 떠올랐다. 과부는 판관에게 주위를 물려달라고 한 다음, 자기 배에 손바닥만 한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은밀한 관계라면 머슴이 알 테니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이윽고 재판이 재개됐고 판관이 흉터에 대해 질문했다. 사내는 의외로 자신만만하게 답변했다. 아전들이 엿듣고 귀띔해준 것이다.

이때 과부가 벌떡 일어나 옷을 벗었다. 배에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머슴을 속이려고 거짓말한 것이다. 결국 과부의 기지와 용기로 진상이 밝혀졌고 간교한 머슴은 엄벌에 처해졌다. 이 이야기는 소문을 악용해 과부의 정절과 재산을 노리는 세태를 빗대고 있다. 성 추문 낙인이 찍힌 여인은 사회적 신뢰를 잃고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정절에 목숨 거는 조선 사회에서 과부가 봉변당하지 않으려면 남자를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웃 남자가 도움을 줘도 모른 척하는 게 좋다. 수작 걸거나 집적대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힘이 모자라면 식칼이라도 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아낙들이 들고일어난다. 제 남편에게 꼬리 쳤다고 머리채 잡히기 일쑤다. 가만있는 과부, ‘몹쓸 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절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다.

“혼자 사는 것도 뼈가 저리게 설운데, 이놈의 세상, 머릿기름 한분 바릴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옷 한분 갈라입을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믄또오, 남정네들 보믄 마주칠까 길을 돌아가고, 이것저것 귀찮아서 남을 기(忌)하고 살믄 신들 다카고, 말도 많고, 어이구 과부 팔자!”(박경리, [토지] ‘광대같은 삶들’)

소설 [토지]에서 과부 마당쇠댁네와 야무네가 분통을 터뜨리며 대화를 나눈다. 또 다른 과부 복동네가 터무니없는 소문에 가슴앓이하다 양잿물 마시고 세상을 하직했다. 과거 최참판댁 종과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소문인데, 알고 보니 마을 영감이 제 딸을 보호하려고 덮어씌운 누명이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세상인심이 원통하고 절통하다. 임자 없는 멸시려니, 과부 팔자 서럽다. 그들에게 사랑은 삶을 파괴하는 추문이기 십상이었다.

홀어머니에 ‘사랑의 징검다리’ 놔준 효자 부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 정조는 청상과부 구씨 살해사건의 공동정범에게 사형을 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사랑을 찾아 나선 과부들도 있었다. 그들을 따뜻이 감싸주고 응원한 것은 가족이었다. 김제 청도원 마을에는 ‘홀어미 다리’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청상과부가 살았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억척스럽게 남매를 키운 여인이었다. 자녀들을 출가시키자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진 과부댁은 홀로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봄날 개울 건너편 밭에 갔다가 그녀는 씨 뿌리러 나온 농부를 만났다. 그이도 아내를 여의고 혼자 사는 처지였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두 사람은 밭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다가 눈이 맞았다. 밤마다 남몰래 만나는 사이가 된 것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과부댁은 행여 들킬까 봐 마음 졸이며 홀아비 집에 갔다.

하루는 어머니의 밤마실을 수상하게 여긴 아들이 뒤를 밟았다. 개울에 이르자 과부는 첨벙첨벙 물을 건넜다. 젖은 옷을 말리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모습에 아들은 가슴이 찢어졌다. 홀아비와 정분이 난 것을 확인하자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의논했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고생 또 고생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돕는 게 효도라고 부부는 뜻을 모았다.

날이 밝자 두 사람은 근처 골짜기에서 큼지막한 돌을 날라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어머니가 편안하게 개울을 건너서 정인의 집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사실은 마을에 알려졌다. 안 좋은 소문이 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주민들은 오히려 아들 부부의 지극한 효성을 칭찬했다. 얼마 후 징검다리에 ‘홀어미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상과부 어머니의 행복을 지켜준 효행담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시대 과부의 다른 이름은 여성 가장이었다. 시선은 따가웠지만, 생계도 막막했지만, 그들은 가장의 무거운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남의 논밭을 부치고, 호롱불에 삯바느질하고, 밤새 베틀을 돌리면서 어린 자식들을 키워냈다. 잔칫집에 가서 허드렛일하고 고기와 떡을 얻어와 노부모를 봉양했다. 과부 팔자 서럽다지만 애면글면 온 힘을 다해 가장의 가시밭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의 징검다리가 애틋하기만 하다.

자, 그럼 헛소문이 낳은 청상과부 살인 옥사는 어떤 처분이 내려졌을까? 시신을 확보한 안협현감은 [무원록(無冤錄)]에 명시된 검시 방법에 따라 과부 구씨가 산 채로 익사 당했음을 밝혀냈다. 강원도 관찰사는 판사를 파견해 이씨 일족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받아냈고 이 사건이 풍문에 기댄 참혹한 살인극임을 파악했다.

시숙 이언과 친오빠 구성대는 강원 감영으로 압송돼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관찰사 이시수는 두 사람 가운데 주범과 종범(從犯)을 가리고자 했다. 진술은 첨예하게 엇갈렸다. 서로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처음부터 과부 살해를 획책하고 범죄 현장에서 지시를 내린 것은 이언이었다. 그런데 손발 묶는 끈을 내주고 저항하는 여동생을 구타한 구성대의 역할도 가볍지 않았다.

살인죄 저지르고도 고령 이유로 풀려나

심문이 난항을 겪자 관찰사는 형장을 가하면서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이 과정에서 그만 구성대가 장독이 올라 죽고 말았다. 주범과 종범을 확정하기가 애매해진 것이다. 이시수는 주종의 판단을 보류한 채 형조에 1차 조사보고서를 올렸다. 이언에 대해서는 사실상 청상과부 살해를 지휘했다고 보고 목숨으로 죗값을 갚아야 한다는 양형 의견을 달았다.

그러나 형조의 심리는 달랐다. 구성대가 이미 죽었으므로 한 옥사에 두 사람의 목숨을 거둘 수 없다는 법리를 내세운 것이다. 이언에게는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 의거해 장(杖) 100대에 유배 3000리를 구형했다. 형조의 계사(啓事)를 받은 정조는 고심했다. 사형에 처해야 마땅한 범죄지만 법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왕은 조사와 심리를 다시 하라고 명했다.

1785년에 빚어진 이언의 옥사는 일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4~5년간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 사이에 강원도 관찰사가 두 번 교체됐고 왕명으로 재조사를 거듭했다. 형조는 심리 결과를 바꿔 사형을 청하는 계사를 올렸는데 판서와 참판, 참의의 생각이 달라 옥신각신했다. 좌의정 이성원과 우의정 채제공에게도 자문했지만 재상들 또한 주범 판단 및 양형 의견이 갈려 혼란만 가중됐다.

임금이 나서서 결론을 내린 것은 1789년의 일이었다. 주범과 종범을 막론하고 모두 사형에 처해 죽은 과부의 영혼을 위로하기로 했다. 법리상 공동정범이라는 논지였다. 하지만 이언은 목숨을 내놓지 않았다. 그의 아들 이중철이 국왕의 거둥을 막고 징과 꽹과리를 쳐 격쟁(擊錚)을 벌인 것이다. 아버지 나이가 70줄에 접어들었으므로 사형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대명률]의 규정이기도 했다.

“동기간이면서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구성대이지만, 악독한 손길을 두루 베푼 자는 바로 이언이다. 비록 형이 죽고 조카도 죽어서 그가 아니면 단속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관청에 고하지도 않고 멋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옥사에 둘을 죽게 할 수는 없다 했고, 여론을 살펴서 진달한 말이 또 이와 같으니, 이언을 엄히 형신한 뒤에 놓아 보내라.”([심리록] 권17 ‘안협현이언의 옥사’)

이듬해 8월에 나온 정조의 최종 판결이다. 청상과부를 죽인 시숙은 몇 년간 옥살이를 한 끝에 장 50대를 맞고 풀려났다. 목숨만 거두지 않았을 뿐 사회적으로 사형을 선고한 셈이니 죗값은 어느 정도 치렀다고 볼 수 있다. 단, 정조가 뜻한 대로 억울하게 죽은 과부의 영혼을 달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조선은 이른바 ‘풍문공사(風聞公事)’를 인정하는 나라였다. 바람결에 떠도는 소문만으로도 젊은 언관들이 힘 있는 대신을 탄핵할 수 있었다. 선비들의 언로를 활짝 열어 권력자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풍문공사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쓰이면서 악성 유언비어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의심의 눈이 비수처럼 번뜩이는 소문 감옥엔 청상과부들의 숨죽인 흐느낌이 아득한 심연(深淵)을 이뤘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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