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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의 평양리포트] 영변 원자로 재가동한 북한의 대미 전략 속셈 

‘핵보유국’ 지위 얻어 한국 빼고 미국과 직접 담판 노리나 

아프간 철군, 북핵 재가동으로 동북아시아 갈등 새 국면 접어들어
균형외교 나선 문재인 정부 일구이언은 더 큰 후유증 부를 수도


▎아프가니스탄 철군으로 미국의 세계 전략이 급변기를 맞이한 가운데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으로 동북아시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중장기전에 능한 북한이지만 6개월은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는 기간이다. 미국 행정부 교체 이후 대북 정책이 세팅되고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국회 인준을 받는 최소한의 시간이 반년이다. 이 기간은 평양 외무성 미주국이 워싱턴의 동향을 파악해 향후 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정중동(情中動)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기간에 평양의 미국통들은 대미(對美) 정책 마련에 심사숙고하지 절대 무위도식하지 않는다.

지난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차용한 평양의 권부는, 계절이 두 번 바뀌도록 기다렸지만 요지부동인 워싱턴을 움직일 필살기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미국 내 지지율이 급락한 바이든 행정부를 몰아붙이기 위해서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다. 지난 1989년 민간 상업용 인공위성에 의해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낸 북핵 문제는 결국 워싱턴과 일전의 수단이자 목적이 아닐 수 없다. 외형적으로는 관망 전술이다. 일정 부분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지만 한계는 있다. 마냥 상대의 수를 기다리며 방관하지는 않는다. 공산당의 전략전술에서 만조와 간조 전략은 매우 활용성이 높다.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의 전언에 따르면, 요즘 중국 지도부 사이에 마오쩌둥의 책이 유행이다. 중앙공산당교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마오쩌둥의 연설문이 필독서가 됐다고 한다. [장기전을 논하다(論持久戰)]라는 책인데, 1938년 5월 26일부터 6월 3일까지 옌안(延安) 항일 전쟁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교시가 담겼다. 마오는 “일본이 쇠퇴하고 있다. 군중을 동원해 적의 우세를 약화시키고, 작은 승리를 축적해 큰 승리로 이끌라”고 지시했다. 여론전과 약점을 파고드는 지구전 전략으로 군(軍)을 다시 결집했다. 그의 메시지가 미·중 간 격렬해지는 경쟁 속에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당교는 “이처럼 광범위하고 충격적인 힘을 가진 연설은 역사상 드물다”고 추켜세웠다.

북·미 간 본격적으로 시작된 ‘OK목장의 결투’


▎국제원자력기구가 지난 8월 27일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영변에서 원자로를 가동하는 징후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영변 핵시설 재가동은 2008년 6월 비핵화 의지를 밝히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한 지 13년 만이다. / 사진:연합뉴스
2021년 가을 평양의 전술은 마오의 전략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 재래식 무기는 물론 핵무기를 동원해 적의 우세를 약화시키고 작은 승리를 축적해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큰 승리로 이끌라’는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 ‘여론전과 한·미 양국의 약점을 파고드는 지구전 전략으로 미국을 상대한다’는 전략이다. 지구전 전략에는 북핵 가동과 대남 여론전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한 것으로 보인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가 나오고 북한 전문 매체[38노스]의 위성사진에도 냉각수가 배출된 것이 포착됐다. IAEA는 지난 8월 27일 ‘북한에 대한 안전조치 적용에 관한 보고서’를 내고 “영변 5㎿(메가와트)급 원자로가 7월 초부터 원자로 가동과 일치하는 냉각수 방출 등의 징후를 보였다”고 밝혔다. 특히 “방사화학실험실에 증기를 공급하는 화력발전소가 올 2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5개월간 가동됐다”는 점을 핵시설 재가동 증거로 제시했다. 방사화학 실험실은 ‘우라늄 정제→미사용 연료봉 제조→연료봉 연소→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이어지는 플루토늄 생산 과정 중 최종 단계인 ‘재처리’가 이뤄지는 장소다. 북한은 1992년 IAEA에 제출한 방사화학실험실 설계 정보에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완료를 위해서는 5개월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화력발전소 가동 기간과 거의 일치하는 만큼 설비 유지 등을 위한 일시적 가동이 아닌 플루토늄 생산을 목표로 한 전면 재가동이 이뤄졌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IAEA는 또 다른 핵시설로 알려진 평양 인근의 강선 지역에서도 내부 건설 작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서에 적시했다.

입추(立秋)와 함께 시작된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은 5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고, 풍계리 핵실험장도 폭파했던 북한이 영변을 다시 재가동한 의도는 무엇인가? 북한은 2012년 헌법 개정에서 ‘핵보유국’을 명기했다. 평양은 바이든 정부 4년을 상대할 비장의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2018년 12월 이래 개점휴업 상태였던 영변 핵시설 스위치를 26개월 만에 켠 것이다.

영변 핵시설은 핵탄두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곳으로, 북한 핵 개발의 본진(本陣)이자 성지(聖地) 격에 해당한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 핵무기 개발의 원조로서 1989년 플루토늄 추출에 필요한 재처리 시설을 처음 돌린 바로 그곳이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의 6차례 핵실험에 쓰인 핵물질 상당량도 영변 핵시설에서 생산됐다. 북한의 핵 보유는 기정사실화됐고, 오히려 핵 보유를 증강함으로써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2단계 전략이 시작된 것이다. 바이든 정부 들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전부 폐기하라는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렇다면 멈춰 세웠던 핵 시계를 다시 돌리겠다”고 역공을 펴고 있다. ‘미국은 응답하라!’는 진검승부의 메시지다.

北 “핵무기 보유 늘리겠다” 기습 선언?


▎지난해 8월 미국 대북 전문 매체 [38노스]는 북한 영변 핵시설의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연기(노란색 원)를 근거로 시설을 가동 중이라고 평가했다. / 사진:38노스
현재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는 적게는 25~30개(지프리드 해커 스탠퍼드대 선임연구원), 많게는 67~116개(미국 랜드연구소)로 추정된다. 2년 4개월이나 운영을 중단했던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했다는 건 핵무기 생산을 더 늘리겠다는 복안이다. 재가동 대상이 ‘영변’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미는 북한 전역에 20곳에 이르는 핵무기 관련 시설을 파악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유 중 하나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두 곳 핵시설을 없애길 원했지만, 그는 5곳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분강, 강선 등 여타 우라늄 농축 시설이 가동되고 있는데 하나만 풀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유야무야되는 유엔 대북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향후 추가 핵실험이나 핵탄두 투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이 뒤따르면 영변 핵의 가치는 배가 된다.

기술적인 의도도 중요하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실을 경량 핵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트라이튬(삼중수소)을 생산하려는 것이라는 미국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온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9월 3일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출연해 “북한은 아직 많은 삼중수소를 생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이 더 많은 핵탄두를 만들면서 삼중수소 공급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미 충분히 많은 양의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취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마크 피츠패트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연구원도 북한의 원자로 재가동에 대해 “북한은 ICBM에 탑재할 수소폭탄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플루토늄과 삼중수소를 생산하고 싶어 한다”고 답변했다.

둘째 쟁점은 남북 및 북·미 합의 위반의 문제다. 김정은은 2018년 판문점 및 싱가포르 회담에서 각각 한·미 정상에게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영변 가동은 이런 약속을 어기는 것이므로, 유엔 안보리 결의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지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9월 7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영변 핵시설 재가동이 사실이라면 2018년 남북정상회담 취지에 위반된다고 보느냐”는 이태규 국민의당 의원의 질문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고 답했다. 이어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합의했던 내용 중 북한이 가시적인 조치들을 하고 있다”면서 “핵실험장 및 미사일 파기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동문서답이었다. 최 차관은 IAEA 보고서의 사실 여부에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보고서 내용이 옳다 그르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며 “북한의 주요 핵시설은 한·미 자산을 통해 상시로 보고 있다”고만 했다. 보고만 있지 평가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밀 위성사진 한 장을 촬영하는 데에는 최소 1억원 이상의 비용이 든다.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 ‘보고만’ 있는 이유가 뭘까.)

판문점 선언 3조 4항은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했다.”고 규정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영변 핵시설 가동을 분리하는 입장은 청와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무적 판단이 우선이라 북한의 실체를 보고도 외눈박이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나마 기술적 판단에 무게를 두는 통일부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북핵 30년 역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최 차관의 발언이 있던 7일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 징후를 알고도 정부가 침묵한 것 아니냐는 야권 일각의 지적에 “그런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확인해 드리지 못한다고 해서 어떤 징후들에 대해 소홀하게 생각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소홀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영변 재가동’ 알고도 ‘통신선 복원’ 홍보 열 올려


“북한이 이번에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과 발사대 폐기와 함께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인 폐기까지 언급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9·19 평양 공동선언에 합의하고 돌아온 직후인 2018년 9월 20일 ‘방북 성과 대국민 보고’에서 한 발언이다. 평양 공동선언에 ‘북측은 미국이 상응 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데 대한 의미 부여였다.

이후에도 문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영변 핵시설 폐기)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대북 제재를 완화해야 한다(2018년 10월 한·프랑스 정상회담)” 등 영변 핵 폐기를 전제로 제재 완화를 주장했다. 비핵화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해제될 텐데도 순서가 바뀐 이야기를 국제무대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과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개념에 대해 학습이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2007년 2·13 베이징 합의에서 김계관이 핵 불능화에 대해 “황소를 거세하는 것과 같다”고 했지만, 거세를 제대로 하는지는 외부에서 결코 알 수 없다. 정부는 이제 영변이 재가동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남북 합의 위반 여부와 동시에 다른 쟁점은 정부가 영변이 재가동되는 사실은 감추고 남북 통신선 재개통을 과잉 선전하는 표리부동한 태도다. 정부는 영변 원자로 재가동 이후 한·미 당국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북한이 남북 통신선을 재개통하자 대화의 모멘텀으로 홍보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이인영 장관은 7월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발표 당시 핵시설 재가동 징후를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남북 정상이 친서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서로 합의된 우선적 조치로 통신선 복원을 말씀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징후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포인트만을 취사선택하는 편향적인 전술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눈박이 결정은 결국 정보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이어진다.

셋째는 한·미 당국의 애매한 입장이다. 영변을 재가동했는데 한·미 양국은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대화 이외에 적당한 외교용어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최소한의 경고 메시지는 내놨어야 한다.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어렵다. 바이든 정부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가 아닌 ‘전략적 핵보유국 인내’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외교부는 8월 30일 “한·미 공조로 북한 원자로 재가동 동향을 실시간 파악하고 있다”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했다. 통일부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정착,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북한의 평화 공세 전략에 장단을 맞춘 ‘문재인의 평화구상’은 결과적으로 ‘위드(with) 북핵(北核)’ 시대를 연 셈이 됐다. 북한이 핵무기를 버릴 의지가 없으니 우리가 북한 핵무기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북핵은 자위용”이라는 노무현·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인사들의 오판이 ‘위드 북핵’을 자초했다. 현 정부에서 ‘북핵 폐기’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궁지 몰린 미국, 한국 제치고 북한과 직거래 가능성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8월 3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간의 우리 군대 주둔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은 아프간 철수의 후유증으로 평양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다. 워싱턴 인사의 북한 관련 발언은 여름 이후 특별할 게 없다. 성김 대사에게 맡겨 관리하는 수준이다.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 겸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맡고 있는 성김 대사는 8월 23일 자 [한겨레] 기고문에서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한국 속담을 인용해, 북·미 관계에 여러 가지 난관이 이어져 왔지만 ‘고요와 평화’를 모색할 기회는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북한을 적대시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북한과의 협상 공백이 길어질 때마다 미국의 지난 4개 행정부가 줄곧 사용했던 문장이다.

서울을 방문한 성김 대사는 8월 23일 노규덕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 한 시간가량 만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협의 직후 노 본부장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협의했다”며 “한·미 양국은 보건 및 감염병 방역, 식수·위생 등 가능한 분야에서 북한과의 인도적 협력방안,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를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미 양국은 남북통신 선 복원, 한·미 연합훈련 진행 등 관련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가운데 대화가 조속히 재개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미국 국무부는 성김 대사의 방한과 관련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대북 문제를 긴밀히 협력하겠다는 한·미 양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긴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는 북한이 도발을 자제하면서 협상장에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외교적인 표현이다.

북한이 인도적 협력 문제로 대화의 장에 절대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미국 역시 잘 알고 있다. 외교적이고 의례적인 상황 관리 행위들이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 첫해 미국은 아프간과 중국 문제로 북한에 뜨거운 눈길을 주기는 어렵고 북한 역시 큰 그림으로 판을 키우는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사이에 북핵 보유 숫자는 점점 높아지면서 공인되고 있다. 누구도 북핵 보유를 의심하지 않는다. 북핵 보유에 인내심 역시 비례해서 높아가고 있다.

미국 반응 주시하며 ‘민생 열병식’으로 수위 조절


▎9월 9일 북한이 정권수립기념일 73주년을 맞아 야간에 진행한 ‘사회안전무력 열병식’에서 전략무기 대신 트랙터가 등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연설을 생략하고 열병식을 참관했다. / 사진:연합뉴스
넷째, 미국의 북한과 직거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국익 중시 외교정책도 북핵 문제에서 독립변수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철수하면서 탈레반과 직접 평화협상을 했다. 미국의 철수에는 여러 배경이 있다. 20년간 점령했던 아프간에서 미군 2400명이 전사했고, 2조 달러라는 엄청난 군비를 지출했다. 천 단위의 미군이 해외에서 사망한다면 국내 정치는 동요할 수밖에 없다. 백악관이 철군 여론을 거스르기란 쉽지 않다. 다만 ‘명예롭고 우아한 철군’이 관건이다. 카불 철수는 9·11 테러 20주년에 맞추다 보니 시간에 쫓겨 정교하지 못해서 스타일을 구겼을 뿐이다. 이제는 막대한 군비를 절감해 중국과의 승부에 주력할 것이다. 부수적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탈레반과 중국의 대결도 기대할 수 있다. 이 외에 철군을 둘러싼 국무부와 국방부의 의견 대립, 2015년 아프간에서 근무했던 장남 보 바이든 전 델라웨어주 검찰총장이 암으로 사망한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더라도 인명 피해가 늘어나면 미국 역시 전쟁터에서 철수하고 휴전도 한다. 특히 정글의 베트콩, 산악의 탈레반처럼 단기간에 승부 내기 어려운 상대라면 미국 역시 손익을 계산하고 타협에 나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피해가 계속되는 전쟁을 지속하면 지도자의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북한군이 베트콩이나 탈레반 수준은 아니더라도 핵무기로 무장한다면 미국의 비핵화 정책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면 한국을 패스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고 하지 않을지 하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대외정책에 있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회복하기 어려우면 냉엄한 현실을 인정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오래전 1905년 조선과 필리핀의 지배를 각각 인정하는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가 맺은 밀약을 비롯해 적지 않은 사례가 국제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한다. 지금은 20세기와 다르다고 항변하지만,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은 시대를 불문한다.

마지막으로 아프간 철수 이후 동북아가 미·중 갈등의 최전선으로 부각되고 있다. 북핵과 한·미동맹 및 한·중 관계 등이 미·중 사이에서 휘발성이 높은 이슈로 비화했다. 북핵이 미국의 인도태평양(印太)전략과 충돌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북아의 럭비공이 되고 있다.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든 바이든 행정부에 영변 재가동은 악재다. 바이든 대통령은 ‘관여’를 통한 비핵화 해법을 제시했지만,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은 대북제재 해제는 없다고 못 박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북 기조에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평양이 최고 수위의 압박을 구사한 셈이 됐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정책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먼저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의지가 핵시설 재가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북핵 해법의 새로운 플랫폼이 불가피해졌다. 현재로서는 북·미가 “시간은 우리 편”이라며 공이 상대방 코트에 있다고 우기는 형국이다. 미국이 고강도 제재 카드를 가진 한 아쉬울 건 상대라고 판단하자, 북한도 핵 고도화 의지를 내비치면서 시간의 주도권을 미국만 쥐고 있지 않다고 응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철군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북한 문제는 안중에 없다. 김정은은 과감한 시도로 시선을 끌고 싶으나 중국·아프간 문제로 미국이 예민한 터라 부담스럽다. 9월 9일 정권수립 73주년 기념일에 김정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간 및 안전무력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별도의 연설을 하지 않았다. 이번 열병식은 ICBM이 아닌 트랙터를 동원했다. 정규군이 아닌 각 지방의 노농적위군, 각 사업소 및 단위별 종대가 참석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당시 김정은의 울먹거린 연설과 신무기 공개 등 요란했던 열병식과 대조적이다.

꺾어지는 5, 10년 단위의 정주년도 아닌 상태에서 심야 신무기 공개와 김정은의 연설은 정세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특히 수해와 코로나19로 주민의 고난이 가중돼 내부 결속을 다져야 하는 위기감이 고조됨에 따라 ‘민생 열병식’이 효과적이란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다이어트로 회색 정복 밑단이 펄럭일 정도로 날씬해졌고, 혈색이 좋아진 김정은은 침묵 속에서 인민들의 국가 수호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균형외교’ 복귀한 한국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9월 14~15일 10개월 만에 방한해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같은 날(14일) 한·미·일 북핵 수석대표 회담이 일본 도쿄에서 열린다.
한·미·일 북핵 수석대표 회담은 9월 14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다. 같은 시기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10개월 만에 방한해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서울에서 1박 2일 동안 요란하게 정부여당 인사를 만나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참석을 유도하고 한·미 동맹의 이완을 요구할 것이다. 동계올림픽에는 당연히 문 대통령과 한국의 참가를 요구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 등이 불참하는 상황에서 남북한 지도자만 한 VIP는 없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도쿄올림픽에 불참한 북한을 ‘동계올림픽 불가 카드’로 징계했지만, 개별적인 참여는 문제가 없다. 중국이 물량 공세에 나서면 스포츠 비즈니스에 닳고 닳은 IOC는 화합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없던 일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결국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남·북·중의 자연스러운 3자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한 달도 안 남은 한국 대선은 정상회담에 휘말릴 것이다.

미국이 첩보동맹을 맺고 있는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한국의 불참도 왕 부장의 요구 항목이 될 것이다. 미국 하원이 통과시킨 2022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개정안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주된 위협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 일본, 인도, 독일을 포함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왕 부장은 당연히 코로나19가 가라앉는 적당한 시기에 시진핑 주석이 방한한다는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발언으로 청와대를 묶어놓고 떠날 것이다.

정부는 북핵 협상 진전을 위해 한·미·일 북핵 협의에 나섰고, 동시에 한·중 외교장관회담까지 소화하면서 다시 미·중 사이에서 균형외교로 복귀했다. 외교부는 왕이 부장의 방한을 발표하면서 “한·중 양국 관계, 한반도 정세, 지역 및 국제문제 등 상호 관심사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외교부는 “동맹국인 미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중국 사이에서 조화로운 발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부의 균형외교가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왕이 부장이, 아니 시 주석이 방한한다고 해도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선언문과 다른 일구이언은 금물이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강조하다가 미끄러지면 치명적이다. 김정은과 재회(再會)해야 하는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중 사이의 줄타기 외교가 불가피하겠지만, 줄에서 낙마할 경우 후유증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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