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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5)] 조선 충신이 살았던 ‘태고정’ 일제 시대 때 훼손 

‘충절의 상징’ 자리엔 ‘백세청풍’ 각자 바위뿐 

진경산수화 대가 정선 그림 ‘장동팔경첩’ 속에 등장하는 청풍계
병자호란 때 순절 김상용이 거주, 일본 회사가 부숴 역사 속으로


▎바위에 각자된 ‘백세청풍’. 이 말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글귀였다. / 사진:이성우
얼마 전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정부에 기증한 2만3000여 점의 문화재와 미술품 중 선별된 작품들이다. 그중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은 단연 ‘인왕제색도’다. 겸재 정선이 영조 27(1751)년 윤5월 하순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국보 제216호이자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명품으로 이병철 선대 회장이 수집해 삼성가의 소유로 됐다.

겸재를 흔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로 부른다. 그의 탁월한 그림 솜씨는 조선 후기 제일의 화가로 꼽힌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직접 답사한 후 그 특색에 대한 느낌을 사실적 묘사로 화폭에 풀어낸 것이다. 정선은 한양 주변의 명승지와 금강산을 특히 많이 그렸다. 그 중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은 그가 태어나고 오랫동안 살았던 지역인 장동 일대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정선, 어렸을 때부터 장동 일대서 살아


▎2006년 6월 7일 촬영한 ‘도화동천’ 각자와 탁본. / 사진:이성우
정선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일대인 북악산 기슭 유란동에서 태어나 인왕산 인왕곡으로 옮겨갈 때까지 52년간을 유란동에서 살았다. 정선의 초년 호(號)가 난곡(蘭谷)인데, 그가 유란동 난곡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장동은 대체로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창의문 고개로부터 경복궁의 서쪽, 사직단의 북쪽, 인왕산의 동쪽을 연하는 넓은 지역을 의미하며 청운동, 옥인동, 효자동, 통의동, 창성동 등에 걸쳐 있던 마을들을 통칭하는 옛 지명이다. 이곳에 창의문이 있어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장의동이 되었고, 이것이 줄어 장동으로 불렀다는 설이 통상적이다.

조선 영조 46(1770)년경 그려진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는 정선이 태어났다는 유란동을 비롯해 도화동, 백운동, 청풍계 등이 백악산록 남서쪽에 표기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선이 어렸을 적 살았던 장동 일대를 화폭에 담은 ‘장동팔경첩’에도 자하동, 청풍계, 백운동 등이 화제로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정작 당시의 이름만으로는 그 동네가 지금 어디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이 동네들은 지금 어디쯤이며 동네 이름은 언제, 어떤 이름으로 바뀌었을까?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 등에 따르면 “청송당이 있는 백악 기슭을 유란동이라 했다”고 한다. 성수침의 집이었던 청송당 터는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기상업고등학교 건물 뒤편 북동쪽 담장 아래 바위에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라는 각자가 남아 있어 위치를 가늠할 수 있으며, 이 일대 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유란동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도화동에 대해 ‘한경지략’에는 “도화동에는 청헌이 있는데, 곧 청음 김상헌의 옛집”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김상헌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은 ‘동국여지비고’에 “육상궁(칠궁)과 담장을 같이 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기에 지금의 교황청대사관과 무궁화동산 부근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경지략’ 및 ‘동국여지비고’에는 “도화동은 북악산 아래에 위치해 복사꽃이 많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라고도 나오며, 이덕무의 문집 ‘아정유고’에 실린 시 ‘도화동’에는 백악남반묘궁서, 즉 “백악산의 남쪽 밭이고 묘궁의 서쪽”이라는 구절이 있어 역시 도화동의 위치를 잘 전달하고 있다. “조선말 순조 때까지만 하더라도 청송당 부근은 많은 종류의 꽃이 있었기 때문에 도화동이라 불렸고, 도성 안의 사람들이 봄철놀이 장소로 손꼽던 곳이었다”는 ‘종로구지’(하권) 기록 역시 청송당과 도화동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경복고등학교의 교가는 “대은암 도화동 이름난 이곳”으로 첫 소절이 시작되는데 학교 후문과 가까운 청와대 관할구역 내에 ‘도화동천’(桃花洞天)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한편 ‘정선 집터’라는 표석은 경복고등학교 내에 있다. 이를 보면 도화동과 유란동은 경기상업고등학교와 그 동쪽으로 접해 있는 청운중학교, 또 그 두 학교의 남쪽으로 접해 있는 경복고등학교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양도성도’에 도화동은 육상궁의 서북쪽에 표기돼 있으며, 유란동은 도화동보다는 약간 남서쪽에 표기돼 있어 조선시대의 유란동과 도화동은 대체로 동·서로 맞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동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서로 맞닿은 지역으로 자하문 터널 부근이다. 자하문 터널의 남쪽 입구 바로 위쪽 지역에 해당하는데 청운벽산빌리지에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일명 몰몬교회가 들어서 있는 지역까지를 모두 백운동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백운동이라는 지명은 흰구름이 아름답다고 해 불리게 됐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형부로 84세까지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지중추부사 이념의가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됐다고도 한다. 성종 12(1481)년에 만든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념의의 집은 조선 말기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상용, 청군에 강화성 함락되자 순절


▎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 청풍계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웠던 관계로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찾았으며 강희맹, 이병연 등 많은 문인이 시를 남겼다. 특히 창암 박사해의 시 ‘백운동’에는 “백운동이 도화동의 서쪽에 있다”고 나와 있어 그 위치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경지략’에서 백운동을 설명하면서 “이 백운동에 월성위궁이 있으며 그곳의 능소화는 6~7월 무렵 주황색으로 꽃이 피는데 덩굴이 노송에 올라간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월성위궁이 지금의 종로구 적선동 일대 월궁동 또는 월성위궁골에 있었기 때문에 백운동에 월성위궁이 있다는 위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기록은 백운동에 있었던 월성위궁의 별서를 월성위궁으로 잘못 기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청풍계라는 곳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조선시대 청풍계에는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선원 김상용이 살던 집과 사당 등의 유적이 있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김상용은 인조 11(1636)년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으로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세자빈·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 갔으나 이듬해 청나라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올라가 미리 장치한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했다. 이에 그의 충절을 기리며 문충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순절한 강화도에는 순절비석이 세워지는 등 오래도록 충신으로서 추앙받던 인물이다.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를 끼고 후문 쪽으로 돌면서부터 도로를 따라 인왕산 기슭까지를 연하는 주변 지역을 포함한다. 원래는 인왕산 기슭까지 올라갔던 넓지 않은 계곡이 있었으나, 복개돼 도로로 바뀌었으며 좌·우측의 대부분은 주택가로 변했다. 청풍계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 이곳은 단풍으로 유명해 ‘풍계’라고도 불렸다. 이는 김상용의 또 다른 호 ‘풍계’와 이곳에 지은 ‘청풍지각’, 동야 김양근이 지은 ‘풍계집승기’에서 ‘풍계’를 ‘단풍 풍(楓)’자를 쓰는 ‘청풍계’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조가 지은 시 ‘국도팔영’(國都八詠) 중 제5영 청계간풍에서도 청풍계에 대해 “시냇가의 한길이 온통 고운 단풍뿐인데”라고 하고 있어 이곳의 지명이 단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상용이 인왕산 기슭 청풍계에서 살았던 집은 ‘태고정’ 또는 ‘선원고택’으로 불렸다. 태고정은 정자 이름이며, 선원 고택은 김상용 사후 자손 및 후학들이 부른 이름이다. 그런데 이 집의 터는 본래 학조대사가 제수인 강릉 김씨, 즉 그의 막냇동생인 김영수의 처를 위해 정해주었다고 한다.

본명이 김영형인 학조대사는 금강산 유점사와 양주 봉선사 등을 중창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성하는 등 조선 세조부터 중종 때에 걸쳐 크게 활약한 승려이자 국사로서 왕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계유정난 당시 원종공신으로 한성판관을 역임한 김계권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김계권의 선대까지는 안동 일대에서 살았으나 김계권 때부터 한양에 터를 잡으면서 이들을 신안동 김씨로 구분하고 있으며, 그 후 대대로 장동 일대에 세거함으로써 장동 김씨라고 불리게 됐다. 학조대사에게는 합천현감이었던 영전과 진사 영균, 수원부사 영추, 그리고 사헌부장령 영수의 네 동생이 있었는데, 풍수지리에 밝았던 학조대사가 막내 영수의 집터를 청풍계에 잡아주었다고 한다.

학조대사는 자신의 양자로 입적한 영수의 차남 번의 집터도 정해주었는데 그곳이 육상궁과 담장을 연하는 지금의 교황청대사관과 무궁화동산 부근이다. 김번의 집터는 아들 생해, 손자 대효, 대효의 양자였던 증손 상헌으로 이어짐으로써 청풍계와 장동 일대가 신안동 김씨의 세거지가 된 셈이다. 특히 김상용의 셋째 동생인 청음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17(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돼 옥고를 치르다 6년 후인 인조 23(1645)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는 그가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양을 떠나며 부른 시조이다. 병자호란 이후 김상용과 그의 형제는 조선의 충신과 충절의 상징이 됐다.

51세에 과부가 됐던 김영수의 처 강릉 김씨는 슬하에 장남 영, 차남 번, 삼남 순 등 3형제를 뒀는데 영수의 집터는 장남 영, 손자 생락, 증손 기보로 이어졌다. 김영수의 장남 영은 문과에 급제해 좌승지를 지낸 바 있는데, 호는 삼당 또는 낙재다. 여기서 삼당이란 호는 그의 청풍계의 집에 있던 세 연못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영의 11대손인 김양근이 지은 ‘풍계집승기’에는 그의 선조 김영이 살았던 청풍계의 김상용 집터에 관해 소상하게 기술돼 있다. 그 가운데 첫 부분은 “청풍계는 우리 선세의 옛 터전인데 근래에는 선원 선생의 후손이 주인이 됐다. 경성 장의동 서북쪽에 있으니 순화방 인왕산 기슭이다”라고 하고 있다. 김번의 증손인 김상용은 47세 때인 선조 40(1607)년경부터 이곳에 거주했다. 즉 김영의 손자인 김기보가 경상도 안동의 풍산으로 낙향할 때 김상용에게 물려준 것이다.

풍수지리 밝은 학조대사가 점지한 집터 청풍계


▎장성 백양사가 소장한 학조대사의 영정. / 사진:한국명인초상대감
김상용은 이후 건물은 물론 집 안팎의 못, 대, 바위와 골짜기 등에 이름을 붙였다. 이를 ‘풍계집승기’를 통해 재구성하면, 집 뒤쪽의 주산 이름은 반룡강 또는 와룡강이다. 그 앞은 창옥봉이며 그 서쪽으로 10보쯤 떨어진 시냇가에 초가로 된 태고정이 있었다. 태고정 옆의 청풍지각은 김상용이 집을 넘겨받으면서 이를 기념해 꾸민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의 현액은 명필 석봉 한호가 썼고 대들보에는 선조의 어필인 ‘청풍계’라는 글씨가 비단에 싸여 걸려 있었다. 또한 청풍지각 인근에는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도연명의 시에서 취한 소오헌이 있고, 그 동쪽에 와유암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젊은 시절 소현세자가 청풍지각에 구경 와 “창에 임하니 끊어진 개울에 물소리 들리는데, 객이 이르니 외로운 봉우리가 구름을 쓸고 있네”라는 한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소오헌 남쪽에 걸려 있었다.

또한 김상용의 집에는 앞서 언급한 세 연못이 있었는데 모두 돌을 다듬어 네모지게 쌓았다. 연못은 태고정 북쪽으로부터 구멍을 뚫어 개울물을 끌어들여 바위 아래로 흐르게 해 못 하나가 다 차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못이 차례로 차게 돼 있다. 이 못의 이름은 제일 위의 것을 조심(照心), 가운데는 함벽(涵碧), 제일 아래는 척금(滌衿)이라고 했다.

그밖에 ‘한경지략’의 청풍계 설명에도 김상용의 옛집 태고정과 사당 늠연당 등이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다. 늠연당은 숙종 34(1708)년에 청풍계에 건립한 김상용의 사당 늠연사를 다르게 표기한 것이다. 늠연사는 태고정의 서쪽에 위치한 회심대 좌우의 돌길에 있었으며 늠연사를 세우는데 적극 관여한 송시열은 그 앞 큰 바위 천유대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란 각자를 남겼다.

한편 호암 문일평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근교산악사화(近郊山岳史話) 인왕산(2) 선원구기(仙源舊基)인 태고정(太古亭)’ 제하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태고정은 선원으로부터 그 종손이 세거해 김종한의 대까지 이르렀고 순조·헌종·철종께서 어림의 광영을 주셨다”라고 하면서 김종한의 증조인 병조란 분의 어린 시절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태고정은 역대 임금이 어림하셨던 곳


▎‘한양도성도’에 그려진 청풍계와 장동 일대. / 사진:리움미술관
“하루는 순조께서 육상궁에 거둥하셨다가 이 태고정에까지 행행하셨더니 병조가 어전에 부복하여 배알함을 보시고 순조께서 하문하시되 ‘네가 글을 지어 보았느냐?’ 병조 대답하되 ‘네. 몇 번 지어 보았습니다.’ 순조께서 그러면 ‘네가 글을 지어 보아라.’ 병조 부복한 대로 곧 응대하여 가로되 ‘성주친림지, 소신황공복’이라고 써서 바쳤다. 순조께서 어람하신 후 다시 병조에게 명하사 이 시를 읽어보라 하시매 병조 곧 목청을 돋혀서 ‘성 주친림지에 소신황공복이로소이다’ 하고 읽었다. 순조께서 병조에게 대하여 연령을 물으시고 신동이라고 크게 격상하셨다. 이때 배행해 왔던 대신 유척기가 순조께 아뢰되 ‘과연 인요물(人妖物)이올시다’ 하니 이는 엉겹결에 툭 나온 실언이다. 부복했던 병조가 순조께 아뢰되 ‘전하께옵서 왜 조고(趙高)를 데리고 다니십니까?’ 순조께서 ‘거 무슨 소리냐?’ 병조 가로되 ‘수염 없는 것이 조고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는 대개 유대신이 무염함으로써 조롱함이니 아자실언(俄者失言)에 대한 보구(報仇)이다.”([조선일보] 1935년 9월 19일)

김종한의 증조부인 김병조가 어렸을 때 순조 임금을 수행해 온 대신 유척기가 자신을 요물이라 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유척기의 수염이 없음을 놀리는 내용이다. 김병조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김종한은 헌종 10(1844)년 출생해 1932년 사망했으며, 글을 쓴 문일평은 고종 25(1888)년 출생해 1939년 사망했다. 이 일화가 태고정에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문일평이 채록한 것인지 아니면 김종한 생전에 직접 들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내용을 구성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일부 의문시되는 부분이 생긴다. 김종한의 가계도를 보면 그의 증조부 이름은 병조(炳操)가 아니라 병조(炳朝)로 기록하고 있다. 김병조는 정조 17(1793)년 태어나 헌종 5(1839)년 사망했는데 순조 임금은 그보다 3년 빠른 정조 14(1790)년 태어나 11세 때인 1800년부터 재위했기에 병조가 어렸을 때는 순조 역시 어린 임금이었다. 물론 임금의 위상은 나이와 무관하겠으므로 위의 일화를 있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김병조가 놀려줬다는 대신 유척기는 호조판서·우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했으며 숙종 17(1691)년 태어나 영조 43(1767)년에 사망했기에 위 일화가 사실이라면 동명 이인이 있지 않은 이상 순조 임금을 수행했다는 대신은 유척기가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일화는 그저 김병조가 총명했다 정도로만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태고정에 역대 임금이 어림했었다는 기록은 정조조에 1건, 순조조에 2건 등 3건 정도가 확인된다. 정조는 정조 14(1790)년 2월 28일 육상궁에서 작헌례를 행한 뒤 연호궁·선희궁을 참배하고 나서 인근에 있는 태고정에도 행차했다. 이때 김상용의 봉사손 김도순을 불러 만나보고, 이조에 명해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내려주도록 했으며, 호조에 명해 그 집을 수리하게 한 바 있다. 정조는 세자 당시 혼자 태고정에 온 적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순조 또한 재위시인 순조28(1828)년 3월 13일과 그 이듬해 같은 날 선희궁을 참배 후 태고정에 들러 시취한 어린아이 270명과 35명에게 상을 나눠줬다고 한다. 그러나 헌종이나 철종이 태고정에 들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장동 김씨 가문 흔적, 청풍계에서 사라져

김상용 집터를 마지막까지 소유했던 김종한은 예조판서, 궁 내부대신 등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 요직을 맡아 활동했으나, 경술국치 조약 체결 전후 친일단체를 결성하는 등 일제를 위한 여러 활동을 벌이고 협력한 대가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일찍부터 고리대금업으로 수익을 올리는 등 명문 양반가 출신답지 않게 이재에도 밝았던 면모를 보인다. 김종한이 언제까지 김상용 집터를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12년 작성된 ‘경성부 북부 청운동 토지조사부’에는 청운동 52번지 4967평과 59번지 154평은 김종한의 소유로 돼 있어 태고정이 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이 김종한에게 어디 사는지와 태고정에 관해 묻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 김종한이 청풍계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상이 이르기를 ‘집이 장동에 있는가?’ 하니 김종한이 아뢰기를 ‘몇 해 전에 송현으로 이사했으며, 선조 문충공의 영당 아래에도 낡은 집이 한 채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태고정은 별 탈 없는가?’ 하니 김종한이 아뢰기를 ‘순조조 때도 두루 임하셨습니다. 동몽들을 시험 보이시고 궁궐로 돌아가실 때 길이 신의 집 문 앞을 지났습니다’ 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16(1879)년 6월 2일)

이 내용으로 보아 김종한은 김상용의 옛집인 태고정과 사당인 늠연당 등 청풍계의 집터는 소유하고 있으나 1879년 이전 이미 장동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위 ‘승정원일기’에서 김종한이 언급하고 있는 송현은 송현동이라기보다는 송현 지역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 4월 6일자 ‘황성신문’의 ‘대한제국 인공양잠 합자주식회사 사무소를 중서 수진방 전동 김종한씨 저택으로’ 제하의 기사를 통해 김종한의 집이 당시 중부 수진방 전동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후 1912년 작성된 ‘경성부 북부 청운동 토지조사부’에는 김종한의 주소를 중부 승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확인된 김종한의 주소는 승동의 행정동인 인사동 121번지, 대지 면적은 118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5년 후인 1917년에 작성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1912년 당시 김종한 소유의 청운동 52번지와 59번지는 창덕궁, 즉 왕실 소유로 나오며 이웃하고 있었던 김용달 소유 청운동 50번지 1435평과 이덕유 소유 53번지 5300평은 일본의 재벌회사인 미쓰이 물산주식회사 소유로 나오고 있어 이 기간 사이에 소유권의 큰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종한 소유였던 청운동 52번지와 59번지가 창덕궁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연유는 확인되지 않으며, 김용달과 이덕유 소유의 청운동 50번지와 53번지의 소유권 변동은 미쓰이 물산주식회사가 당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추진했던 식림사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하지만 이 역시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1924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 ‘내동리 명물 청운동 청풍계’ 제하의 기사 내용에 “태황제(고종) 계실 때 이 집이 궁중 소속이 된 것을 특별히 도로 내어주셨는데 지금은 일본사람의 집이다”라고 하고 있어 1924년 이전 일본인의 소유로 되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김상용의 집터 일대는 대일항쟁기 때 미쓰이 물산주식회사가 차지하면서 계곡을 메우고 암석을 떼어내며 터를 넓혀 새로 집을 짓게 되는 공사 과정에서 태고정 한 칸만 남아 인부들의 숙소가 됐다. 그러나 그 후 그마저 사라지고 지금은 청풍계에서 몇백년을 세거했던 장동 김씨 가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커다란 주택을 머리에 얹은 채 겨우 살아남아 한쪽 면만 보여주고 있는 ‘백세청풍’ 각자 바위만이 유일하게 옛날의 자취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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