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22)] 제철·방직 장인 부부 설화 속 이민사 

‘문명 전파자’ 연오랑·세오녀 일본 신화에도 흔적 남기다 

정착지 이즈모서 신기술 활용해 서부의 패자 발돋움
‘신라계 도래인’ 신격화 이미지 스사노오에 어른거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일월이 빛을 잃었는데, 세오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상생의 손’ 조각상과 어우러지는 경북 포항 호미곶의 일출.
새해를 맞을 때면 한국인은 동해로 가서 일출을 보며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뜻을 새긴다. 일출 명소 가운데 한 곳인 포항에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가 광명을 되찾는다는 옛이야기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이 경이로운 일화에 역사와 신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해석의 묘미가 담겨 있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하고 4년째 되는 해(157년)에 생긴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연오랑을 보고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며 왕으로 받들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오녀는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찾아 헤맸다. 한 바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이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그녀를 싣고 일본에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왕에게 고하고 세오녀를 바쳤다. 부부가 재회하는 순간이었다. 연오랑은 세오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신라에 큰까마귀 부락 흡수 당하자 새 운명 개척


▎[삼국유사]의 편찬자로 알려진 고려시대 승려 일연.
뒷이야기는 놔두고 이쯤에서 아스라한 고대의 시간을 음미해보자. [삼국유사]는 이야기의 시점을 아달라왕 재위기인 서기 157년이라고 못 박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어떤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뜻이다. 은유와 상징으로 포근히 감싼 진실의 속내가 비친다. 그것을 사료에 근거하되 오늘날의 시각과 상상력으로 다시 써보면 어떨까?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니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까마귀를 뜻하는 ‘오(烏)’자가 들어갔다. 아득히 먼 옛날 동방에서는 ‘삼족오(三足烏)’라는 세 발 달린 까마귀를 숭상했다. 삼족오는 태양에 살면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준다는 상상의 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삼족오의 모습은 마치 태양의 흑점을 형상화한 것 같다.

‘오(烏)’자에는 또 색이 검다는 의미도 있다. 아득한 고대에 검은색은 철기 문명과 관련이 깊었다. 그 시절 철을 만들려면 숯으로 센 불을 때서 철광석을 녹여야 했다. 고대의 제철소에는 시커먼 숯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옛 지명에 ‘오(烏)’자가 들어가면 철의 생산지일 가능성이 크다. 해를 품은 까마귀가 하늘의 뜻으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철기를 내려준 셈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쇳물이 펄펄 끓는 용광로가 됐다.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산 곳은 먼 옛날 포항에 있었던 ‘근오지(斤烏支)’다. [삼국사기] 잡지(雜志)에 지명이 나온다. 풀이하면 ‘큰 까마귀 부락’이 된다. 고조선의 대장장이 집단이 나라가 망하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이곳에 정착했다.

연오랑은 부락 제철소에서 일했다. ‘연(延)’자는 늘인다는 뜻이다. 불에 달군 쇠를 두드려서 늘이는 대장장이다. 광석에서 철을 녹이고 뽑아내는 제련 기술도 갖고 있었다. 세오녀의 ‘세(細)’자는 가늘다는 의미다. 가는 실을 뽑아내 삼베나 비단을 짜는 길쌈에 능했다. 이들 부부는 부락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으뜸 장인이었다.

2세기경에 삼한에서는 철기가 곧 국력이었다. 농사를 잘 짓고 수확량을 늘리려면 튼튼한 철제 농기구가 필수였다. 더 센 강철 무기를 갖춰야 전쟁에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철기에 달려 있었다. 가야의 제철소가 번성하여 외국에 널리 알려졌다. 신라·백제·고구려는 우수한 철기를 앞세워 덩치를 키워나갔다.

큰 까마귀 부락은 신라의 그늘에 있었다. 신라는 진한에 들어온 고조선 유민들이 경주의 토착 세력과 손잡고 세운 나라다. 시조 혁거세 때 진한 연맹의 맹주로 발돋움하더니, 탈해왕이 철기를 들여와 강성해졌다. 2세기 무렵에는 근방의 작은 나라들을 쳐서 병합했다. 음즙벌국·실직곡국·압독국·비지국·다벌국·초팔국 등을 잇달아 집어삼켰다. 백제와 가야를 상대로도 밀고 밀리는 영토 쟁탈전을 벌였다.

파죽지세! 그 밑천은 철기였다. 신라는 철의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이웃한 큰 까마귀 부락을 가만 놔둘 리 없다. 근오지는 원래 독립된 소국이었지만 점차 신라의 속국이 됐다가 결국 흡수당하고 말았다.

“아달라왕 4년 2월에 처음으로 감물현을 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이 기사에서 ‘감물(甘勿)’은 곧 가물이요, 검다는 것이다. 감물현은 철의 생산지를 일컫는다. 아달라왕 4년은 서기 157년, [삼국유사]에서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바로 그 해다. 큰 까마귀 부락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주민 일부가 이민을 떠난 것이다.

연오랑은 경주 황성에 있는 신라 국영 제철소로 발령이 났다. 그는 불복했다. 아내와 의논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로 했다. 철기 장인은 어느 나라에서든 환영을 받는 시대였다. 또 다른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오랑이 염두에 둔 곳은 바다 건너 일본이었다. 당시 왜국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가 난립하고 있었다. 삼한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 곧 이민자들이 국력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일본에 벼농사와 청동기를 전파하며 야요이(弥生) 문화를 꽃피웠다. 세월이 흘러 관심의 초점은 철기로 옮겨갔다. 나라마다 뛰어난 장인들을 찾아 나섰다.

연오랑 태우고 일본으로 건너간 ‘바위배’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니혼쇼기(일본서기)]의 일부. 일본인들의 한국관이 잘 드러나 있다.
서기 157년 근오지 앞바다에 왜선 한 척이 나타났다. 왜인들이 ‘천반선(天磐船)’이라고 부르는 배였다. 선체가 널찍한 바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배에는 일찍이 이즈모로 이주한 진(秦)씨 일족이 타고 있었다. 진씨는 본래 중국 진(秦)나라에서 전쟁과 노역을 피해 삼한으로 온 유민 집단이었다. 진한 땅에 퍼져 살았는데 그중 일부는 일본으로 갔다. 이즈모의 진씨 일족은 큰 까마귀 부락의 제철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연오랑을 받아들였다.

연오랑은 세오녀를 고향에 남겨두고 ‘바위배’에 올랐다.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면 아내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 너울대는 파도에 올라탄 천반선이 동해를 가르며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돛이 순풍을 잔뜩 받아 만삭이 된 여인의 배처럼 부풀어 올랐다. 연오랑의 가슴도 덩달아 희망으로 부풀었다.

이즈모(出雲)는 일본 시마네 현에 자리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포항의 맞은편에 있어 고대에 진한과 신라 사람이 많이 건너갔다. 이른바 ‘신라계 도래인’의 근거지였다. 그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스사노오 신화를 요약해 보면 짐작할 수는 있다. 거기에 연오랑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추방돼 이즈모국으로 내려왔다. 노부부가 딸을 두고 울고 있어 까닭을 물었다. 부부에게는 딸 여덟이 있었는데 머리 여덟 개, 꼬리 여덟 개 달린 큰 뱀이 해마다 와서 잡아먹고 이제 마지막 남은 딸까지 먹어치우러 온다는 것이다. 스사노오는 그 딸을 자신의 배필로 삼게 해준다는 약속을 받고 괴물 뱀을 없애기로 했다.

스사노오의 지시에 따라 노부부는 울타리를 치고 여덟 개의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독주를 빚어 술통 여덟 통을 가득 채우고 문마다 한 통씩 갖다 놓았다. 뱀은 여덟 개의 문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여덟 통의 술을 마시고는 취하여 잠들었다. 스사노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뽑아 괴물 뱀의 머리와 꼬리를 토막 내어 죽였다.

그런데 가운데 꼬리를 자를 때 웬일인지 칼날이 상했다. 이상하게 생각해 칼끝으로 갈라보니 안에서 크고 훌륭한 칼이 나왔다. 스사노오는 그 칼을 천상계의 지배자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에게 바쳤다. 이것이 바로 천황가의 삼종 신기 중 하나인 구사나기(草那藝)다.”

신화는 모듬살이의 꿈같은 기억이다. 원형이 되는 집단의 경험이 상징적인 이야기로 나타난다. 깐깐하게 분석하는 것도 좋겠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야 풍성한 맛을 낸다. 만만하게 다루고, 말랑하게 주물러야 본연의 매력이 살아난다.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추방돼 이즈모에 내려왔다는 것은 이 지역에 발자취를 남긴 도래인의 기억과 무관치 않다. 스사노오는 진한에서 출발한 ‘신라계 도래인’을 신격화한 이미지다. 여기에 연오랑을 대입하면 무척 흥미로워진다.

이즈모에 이른 스사노오는 괴물 뱀과 맞닥뜨린다. 대장장이 연오랑이 적과 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뱀은 대체로 산중에 산다. 적은 이즈모의 산악지대에 사는 호전적인 토착세력이었다. 도래인과 연안 지역 주민들로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노부부의 딸들이 해마다 뱀에게 잡아먹혔듯이 인명과 재산 손실이 끊이지 않았다.

스사노오 신화에 어른거리는 도래인의 그림자


▎포항시 호미곶 광장에서 열린 한민족 축전에 참가한 한 시민이 가로 20m, 세로 50m 크기의 초대형 삼족오 연을 날리고 있다.
연오랑은 이 열악한 상황을 반전시킬 승부수였다. 그가 만든 강철 무기는 무기력하게 당하던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울타리를 치고 치열하게 싸웠다. 신묘한 계략도 썼다. 항복하는 척 문을 열어 적에게 독한 술을 대접하고 잠든 틈을 타 소탕한 것이다. 스사노오가 칼을 뽑아 괴물 뱀을 토막 냈다는 것은 이 싸움에서 연오랑의 제철 기술이 빛을 발했다는 의미다.

여기서 신화는 의외의 행보로 방향을 튼다. 꼬리를 자르다가 칼날이 상했는데 안에서 더 크고 훌륭한 칼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즈모의 산악지대는 철의 원료인 사철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의 사철은 불순물이 적어 우수한 철기를 제작하는 데 적합했다. 이는 도래인의 선진 제철 기술과 현지의 질 좋은 자원이 만나 이즈모의 철기 문명이 한 단계 더 도약했음을 뜻한다.

스사노오는 그 칼 구사나기를 누이이자 으뜸 신인 아마테라스에게 바친다. 정치적 사심이 잔뜩 묻은 대목이다. 이 신화가 수록된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7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의 덴무 천황이 명해 편찬한 책이다. 조카를 죽이고 지존의 자리에 오른 그는 흠집 난 정통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신화는 최고의 선전 수단이었다.

일본의 각 씨족은 저마다 신화와 설화를 갖고 있었다. 야마토 조정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신들의 위계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아마테라스의 후손을 자처한 천황가였다. 통합적인 신화는 천황을 숭배 대상으로 신격화하는데 이바지했다.

스사노오가 바쳤다는 구사나기가 천황가의 삼종 신기 중 하나가 된 것은 이즈모 세력이 강력한 경쟁자였다는 방증이다. 서부 연안 지역에 정착한 신라계 도래인을 복속시킴으로써 야마토 조정은 비로소 통일 정권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게 되기까지 이즈모의 이민자 집단은 통일로 가는 길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일본 서쪽에 여러 왕국을 세우고 바다 건너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그럼 연오랑은 과연 왕이 됐을까? 스사노오 신화에 어른거리는 연오랑의 그림자는 임금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선진기술을 갖고 들어와 산악지대 토착 세력을 평정하고 철기 문명의 수준을 높인 자가 아닌가.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아내를 부를 차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아달라왕 5년에 왜인이 내빙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오랑이 떠나고 그 이듬해다(158년). 세오녀는 그 왜인과 함께 천반선을 타고 남편을 만나러 갔다.

이즈모의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산악 부족을 물리쳤다고 한숨 돌릴 때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주민들을 보살펴야 했다. 굶주리거나 헐벗거나 떠돌아다니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연오랑 혼자서는 저들의 궁핍한 생활을 돌보기 힘들었다. 세오녀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야 할 일이 많았다.

이즈모 삼베·강철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일본 시마네 현에는 ‘나라 땅 끌어오기(구니비키)’신화가 있다. 그림은 구니비키 신화를 묘사한 것으로, 시마네 현에 있는 이즈모 오야시로(出雲大社) 신사의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다.
세오녀는 이즈모 주민들의 삶이 시리도록 가슴 아팠다.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이 생각나서 더욱 애틋했다. 그녀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형편을 파악했다. 사는 게 막막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급한 대로 군용 막사를 여기저기 쳤다. 그곳에서 직접 죽을 쑤어 굶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떠도는 자는 거처를 내주었고, 병자는 치료를 받도록 했다.

연오랑·세오녀 부부는 항상 백성에게 머리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주민들은 자기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땀 흘리고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달라고 입을 모았다.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세오녀가 묘안을 생각해냈다. 주민 스스로 품질 좋은 삼베와 강철을 생산해 주변 소국과 읍락에 내다 팔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부부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연오랑은 왕국의 장정들을 소집해 새로 삼밭을 일구었다. 산악지대로 들어가 화전을 하니 소출이 쑥쑥 늘었다. 세오녀는 여인들을 모아 길쌈을 가르쳤다. 삼 껍질에서 자아낸 실을 삶고, 헹구고, 말리는 방법을 세세히 알려줬다. 볏짚을 태워 만든 잿물로 표백하고, 치자를 푼 쌀뜨물에 색을 내는 비법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세오녀는 삼베를 짜는 훈련도 빈틈없이 시켰다. 베틀에 올라앉아 날실과 씨실을 촘촘하게 짜게 했다.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7~8월에 마을 대항 길쌈대회도 열었다. 지는 쪽은 추석에 음식을 내고 춤과 노래로 주민들을 즐겁게 했다. 이즈모 삼베는 금세 왜국 제일의 특산품이 됐다. 색감이 곱고 부드러워 만드는 족족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강철은 해안에 세운 대규모 제철소에서 생산했다. 제련로·용해로·단야로·거푸집·목탄 가마를 완벽하게 갖춘 곳이었다. 모든 공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사철을 녹이고 정제해 강괴를 만들고, 불에 달궈 벼리고, 두드려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쇠와 쇠를 이어 붙이고, 농기구와 무기를 제작하는 일이 체계적인 지도와 감독 아래 물 흐르듯이 이뤄졌다.

연오랑은 몇 가지 비법을 추가했다. 숯가루와 황토물 등을 배합한 산화방지제를 발라 강철이 쉬이 녹슬지 않도록 했다. 불에 달군 쇠를 접어서 두드리고, 다시 꼬아서 두드리는 기술로 강도를 한층 높였다. 이즈모 강철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왜국의 왕과 군장들이 앞다퉈 사자를 보내 확보하고자 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서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삼베와 강철을 앞세워 이즈모 왕국은 서부의 패자로 발돋움했다. 굶주리고, 헐벗고, 떠돌던 주민들이 몰라보게 부유해졌다. 나라의 영토는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아나토(穴門)에 이르렀다. 지금의 야마구치현 나가토다. 이곳은 규슈의 떠오르는 태양, 야마타이 왕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다. 이즈모와 야마타이, 강성한 두 세력이 숙명적으로 대면한 것이다.

한편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가 신화를 쓰는 동안 신라는 어떻게 됐을까? [삼국유사] 기이 편에 그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은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려서 이런 변괴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아달라왕은 연오랑과 세오녀에게 사신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했다. 연오랑은 하늘의 뜻을 되돌릴 수는 없다며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사신이 비단을 받아와 하늘에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찾았다. 신라는 세오녀의 비단을 국보로 삼고 임금의 곳간에 간직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 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그들은 고국을 잊지 않았다


▎신라인을 조신으로 모신 인마 해변 한신 신라 신사(神社)의 현판. ‘한신 신라 신사’라고 씌어 있다.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아달라왕 13년(166년) 1월 1일에 일어난 일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그게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라면 핵심 인재 유출에 따른 부작용이 엿보인다. 해는 쇳물을 펄펄 끓여 철을 만드는 제련로를 상징한다. 달은 실을 자아낼 때 쓰는 둥근 방추차, 곧 가락바퀴다. 신라에서 제철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길쌈 또한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다.

신라는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한의 주도권을 놓고 백제·가야·고구려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낙오하게 생겼다. 뭔가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하기 어렵다. 아달라왕이 연오랑과 세오녀에게 사신을 보낸 것은 일본의 신라계 도래인 집단에 도움을 청했다는 의미다. 신라는 이 유능한 이민자들에게, 역동적인 문명 전파자들에게 돌아와서 고국을 위해 일해달라고 러브콜을 한 것이다.

연오랑은 돌아가는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보낸다. 비단은 단순한 예물이 아니다. 고대 사회의 상류층은 비단에 글자를 적었다. 비단으로 편지를 쓰고 문서를 작성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준 비단에는 부부가 연구 개발한 제철과 길쌈의 비법이 적혀 있지 않았을까? 문명 전파자들은 고국을 잊지 않았다.

이민자에게는 향수가 있다. 죽기 전에 고향을 찾아보거나, 죽어서 고향에 묻히기를 소망하곤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어땠을까? 신라계 도래인의 화신 스사노오에게 물어보자.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스사노오가 마지막에 어머니신이 있는 저승으로 갔다고 했다. 도래인에게 저승은 자신이 애초에 떠나온 곳, 탯줄이 묻힌 어머니의 땅이다. 어쩌면 연오랑·세오녀 부부도 말년에 왕위고 뭐고 다 내려놓고 근오지로 귀향했을지 모른다.

큰 까마귀 부락의 노부부가 지금의 포항 오천 언덕에서 멀리 도구 바다를 바라보며 행복한 여생을 보냈기를 바란다.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영일현도 여기다. 연오랑은 이름을 ‘영오(迎烏)’라고 바꿨다. 해를 맞이하는 까마귀가 된 것이다.

동해에 태양이 떠오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평화로운 광명 천지가 열린다. 문명 전파자들의 꿈같은 기억이 펼쳐진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의 한 저항시인이 요양하러 이곳에 머물다가 그 풍경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이육사, ‘청포도’)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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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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