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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0)] 임진왜란 때 의병 지휘해 대승 이끈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선비의 신출귀몰 병법, 사무라이를 베다 

스승 남명 조식 영향으로 문무 겸비, ‘홍의장군’ 기치로 창의
왜군 전라도 진출 저지… 임금 향해 직언한 뒤 사직하기도


▎곽동준 문중 총무가 곽재우를 기리는 예연서원 앞에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1585년(선조 18) 과거 시험 정시(庭試)가 열렸다. 문제는 당태종교사전정론(唐太宗敎射殿廷論). ‘당나라 태종이 궐에서 활쏘기를 가르친 일에 대하여 논하라’는 것이다. 34세 선비가 거침없이 답안을 써 내렸다. 임금은 모름지기 문무를 겸전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평소 그의 자세이자 가치관이기도 했다. 시험이 마무리되고 마침내 합격자를 알리는 방이 붙었다. 선비가 자기 이름을 확인했다. “제2등 곽재우.”

합격자가 발표되고 얼마 뒤 조정에서 뜻밖의 논의가 벌어졌다. 선조가 곽재우의 답안을 거론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정관의 치는 당 태종이 문무를 겸비해 이루어진 것이라며 조선의 임금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무예를 익히지 못한 과인을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곽재우의 답안이 제왕학을 닦지 못한 선조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곽재우의 합격은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뜻하지 않은 일로 절망했다. 그로서는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불행은 이어진다. 이듬해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곽재우는 선산인 달성 현풍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리고는 의령군의 동쪽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기강 부근에 돈지강사(遯池江舍)를 짓고 낚시를 즐기며 은둔했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11월 20일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구례마을 예연서원(禮淵書院)을 찾았다. 망우당의 위패가 모셔진 유일한 서원이다. 서원을 바라보며 언뜻 한 생각이 지나갔다. 망우당은 선비일까 아니면 장군이란 호칭이 적절할까. 그때 구례마을을 지키는 망우당의 13대손 곽동준 문중 총무가 나왔다. “망우당을 기리는 서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마을에 수선화 1만 주를 심어 관광객을 불러들인 뒤 예원서원을 함께 알리고 있다.

곽 총무를 따라 서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강당 오른쪽 장판각으로 먼저 안내했다. 철문을 열었다. 문집인 [망우집]과 [창의록(倡義錄)] 등 목판 200여 판이 빼곡했다.

이야기는 의병(義兵)으로 흘러갔다. 곽재우는 본래 선대가 대구 달성군 현풍에 살았다. 무남독녀였던 어머니의 친정이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여서 아버지가 재산 관리를 위해 처가로 이사했다. 곽재우는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왜란이 터지자 적과 싸워야 할 경상감사 김수는 군사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전쟁 발발 8일 뒤인 4월 22일 곽재우는 “나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왜적 토벌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서를 사당에 알렸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세간리 마을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치며 홀로 봉기했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었다.

매형의 노비까지 의병으로 끌어내


처음에는 집안 아이들 10여 명이 겨우 모였다. 그는 붉은 비단으로 홍의를 지어 입고 백마를 탄 뒤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하며 군기를 만들고 위세를 드높였다. 곽재우의 홍의는 명나라 신종 황제가 부친에게 선물한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1578년 황해도 감사로 있던 아버지 곽월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27세 곽재우도 따라갔다.

홍의를 입은 곽재우는 물려받은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의병 모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옷을 벗어 의병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은 의병 처자에게 나누어 줄 만큼 아랫사람 사랑이 남달랐다. 그래도 양반들은 참여를 꺼렸다. 매형 허언심이 노비 수백 명을 두고 있어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곽재우는 역사(力士)를 보내 허언심의 아들을 끌어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허언심이 놀라 사죄하고 노비를 모두 내줬다. 창의에 진심이 느껴지자 휘하 의병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곽재우 의병부대는 거병 열흘 만에 의령 기강에서 첫 승리를 거둔다. 강 밑에 말뚝을 박아 왜군 배가 지나갈 수 없도록 한 다음, 수풀 속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총공격한 것이다. 의병들은 이 전투에서 왜선 11척을 포획했다. 곽재우의 이름은 조정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목을 벤 적의 숫자도 알리지 않았다. 선조는 공로로 곽재우에게 유곡찰방과 형조정랑 등을 제수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의병들은 망우당이 전과를 일신의 영달로 삼지 않자 그를 더욱 따르고 신뢰했다. 이어 7월에는 낙동강변 정암진에서 전설 같은 전투가 벌어진다.

왜군 깃발을 진창 속에 몰래 옮겨 꽃아


▎경남 의령군 의병박물관에 세워진 곽재우 장군의 동상. / 사진:의병박물관
곽재우 부대는 당시 의령군 정암진에 지휘본부를 두고 있었다. 호남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요충지 낙동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군량미 조달을 위해 곡창지대 전라도를 노렸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바닷길이 막히자 왜군 정예부대 2000명은 의령과 남원을 거쳐 전주로 침입할 계획이었다. 망우당은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정암진 나루터를 건널 수밖에 없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정암진 전투 상황은 실학자 이덕무의 [홍의장군전]에 기록돼 있다. “왜장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가 전라도로 간다면서 곧바로 정암진에 이르렀으나 진창 때문에 행군할 수 없었다. 이에 조선인 포로를 시켜 얕고 단단한 곳에 깃발을 세우고 다음 날 아침 도하하려고 했다. 곽재우는 이를 염탐하고 한밤중에 왜병 깃발을 뽑아 진창 속에 꽂아 놓은 다음 복병을 깔아 놓고 기다리니 과연 적이 진창 속에 빠졌다. 이때 복병을 일으켜 적을 궤멸시켰다. 이윽고 적의 후속 부대가 밀려오니 곽재우는 수하 병력이 적어 맞설 수 없음을 헤아리고, 힘세고 키 큰 사람 10여 명을 뽑았다. 그들은 모두 백마를 타고 붉은 전포를 입고는 ‘천강홍의장군’이라 쓴 깃발을 세운 다음 나누어 산골 깊숙한 곳을 지키게 했다.”

망우당의 병법은 신출귀몰하다. 선비 곽재우가 어떻게 이런 전법을 고안하고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16세부터 가르침을 받은 남명 조식의 영향이 컸다. 남명은 퇴계 이황과 함께 당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다. 남명은 실천을 중시한 학자로 모순이 있으면 칼처럼 과감하게 끊을 것을 강조했다. 곽재우는 남명의 외손녀 사위였다. 그는 남명이 강학하던 산천재를 자주 찾아 유학 경전뿐만 아니라 무경칠서(武經七書) 등 각종 병서를 공부했다. 거기다 장인 김행은 만호를 지낸 무인이었다. 그런 여건 덕분에 곽재우의 19세 연보에는 “망우당이 학문을 닦는 여가에 활 쏘고 말 몰고 글씨 쓰고 셈하는 재주를 익혔으며, 병법에 관한 책들도 골고루 통달했다”고 적혀 있다. 23세엔 부친이 의주목사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 변방 관아에 머물며 무예를 연마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승전이 이어지자 곽재우 의병은 전공을 시기한 관군과 불화에 직면한다. 의병은 이듬해 1월 무려 2000명으로 확대됐다. 의병 모집은 당시 사병(私兵)을 조직하는 반역 행위로 오해받기도 했다. 합천군수 전현룡은 곽재우 부대가 강성해지자 곽재우를 역적으로 모함했다. 우병사 조대곤은 심지어 곽재우를 체포해 처형하도록 각 고을에 연락했다. 또 경상감사 김수는 전쟁이 나자 임금을 지키겠다며 위수지역을 이탈해 용인까지 출전했다가 패전하고 돌아온 뒤 의병 해체를 도모했다. 곽재우 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질 위기를 맞았다. 곽재우는 이런 김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김수에게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에 책임을 지라며 자결하라고 압박한다. 김수는 함양으로 달아나며 조정에 곽재우가 역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소식은 선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선조는 조정이 파견한 감사를 죽이겠다고 선언할 정도면 나중에 임금에게까지 반기를 들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했다. 초유사 김성일이 중재에 나섰다. “감사에게 죄가 있으면 조정이 처리할 것이요, 도민이 손댈 바가 아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려 화를 입을 것이오.” 김성일은 오히려 감사를 해친 반역자로 몰릴 수 있다고 곽재우를 설득했다. 그리고 장계를 올려 곽재우의 누명을 벗겨줬다.

예연서원은 1674년(현종 15) 망우당을 기리기 위해 이곳 달성에 처음 세워진 뒤 1677년(숙종 3) 사액됐다. 이후 대원군 시기 훼철됐다가 일제강점기인 1922년 복원됐다. 한국전쟁 시기 이곳은 격전지가 됐다. 미군은 후퇴하면서 서원이 북한군 거점이 되지 않도록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장판각과 전사청만 남고 모두 소실된 것이다.

서원 강당 경의당(景義堂)을 둘러봤다. 처마의 예연서원 편액은 예서체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글씨다. 강당을 돌아 사당 충현사(忠賢祠)에 들렀다. 위패엔 ‘증판서충익공망우당곽선생(贈判書忠翼公忘憂堂郭先生)’이라 쓰여 있다. 그 왼쪽에는 정유재란 당시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곽준이 함께 모셔져 있다.

곽재우 부대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면서 4월 말에는 의령·삼가·합천 등을 수복했다. 이를 계기로 이웃 고을인 합천 등지에서 정인홍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8월에는 김면이 의병을 끌고 관군과 연합해 지례를 탈환한다. 의병이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아낸 것이다. 일본으로선 의병은 상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곽재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승전 이어지자 관군과 불화, 역적 누명 쓰기도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예연서원 장판각에 보관된 [창의록] 등의 목판. / 사진:송의호
지봉 이수광은 임진왜란 때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수로 이순신과 곽재우를 꼽았다. 한음 이덕형도 권율의 행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 그리고 곽재우가 이끈 의병들의 전투를 임진왜란의 대승으로 기록했다. 1972년 정부는 대구의 관문 효목동에 망우당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웠다.

곽재우는 의병 활동의 공으로 잇따라 관직을 받는다. 1592년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성주목사, 진주목사, 경상좌도 방어사 등 문무직을 두루 제수받았다. 그러나 의병을 떠올리니 관직은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 29회 관직을 제수받고 그중 15회만 나아갔다. 그것도 직을 오래 맡지 않았다.

1600년(선조 33) 곽재우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맡아 산성 수비가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같은 상소를 다시 올린 뒤 관직을 떠난다. 이 일은 무단 사직으로 처리돼 그는 영암으로 유배된다. 1602년 유배가 풀렸다. 그는 의령으로 돌아와 창암진에 정자를 짓고 세상의 근심을 잊는다는 뜻으로 망우정(忘憂亭)이라 명명한 뒤 여생을 생식(生食)으로 일관했다. 그의 호 망우당은 여기서 유래한다.

1604년(선조 37) 53세 망우당은 찰리사를 시작으로 다시 관직을 받는다. 1610년 그는 함경도 관찰사로 제수된다. 그는 재직 중 역관과 원접사(遠接使,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임시 관직)의 접대 부정을 접한다. 곽재우는 그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상소를 올린다. “임금이 신하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그 신하를 물리침이 옳고, 신하가 임금께 말씀드려 그 의견이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남이 옳습니다. 신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큰 벼슬만 주는 것은 사람 쓰는 도리가 아니요,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데도 중한 책임만 지는 것은 임금 섬기는 도리가 아니오니 신은 마땅히 물러나겠습니다.”

남명의 제자다운 쓴소리 직언이다. 곽재우는 함경도 관찰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그를 중용한다. 1616년 65세 망우당은 장예원 판결사를 마지막으로 제수 받은 뒤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내가 죽거든 구덩이를 파서 그냥 묻어라”


▎의령 의병박물관에 전시 중인 장검과 말안장, 갓끈 등 곽재우 장군의 유품. / 사진:의병박물관
예연서원을 나와 아래 경충재(景忠齋)가 있는 종가를 둘러본 뒤 구례마을을 나섰다. 달성2공단을 지나 서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곽재우 장군의 묘소가 있었다. 현풍 구지산 신당이다. 일대 묘역은 증조 곽위로부터 아래로 5대에 이르는 현풍 곽씨 문중의 선영이다. 곽동준 총무를 따라 비스듬한 산자락을 올랐다. 망우당 묘역은 온통 붉은 풀로 뒤덮여 홍의를 입은 듯했다. 봉분은 있는 듯 없는 듯 나지막했다. 망우당은 “내가 죽거든 구덩이를 파고 그냥 묻기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왜란 때 선왕의 두 능이 무너지고 불탔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묘의 봉분을 쌓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묘는 봉분 없이 평평하게 조성됐다. 그로부터 114년이 지난 1731년(영조 7) 현풍현감 이우인이 봉분 없는 장군의 묘를 보고 실묘가 염려돼 후손을 설득한 뒤 봉분을 낮게 쌓았다고 한다. 묘비는 유언을 존중해 지금도 조촐했다.

[박스기사] 49세에 생식 시작, 말년에 신선을 꿈꿨던 망우당 - 세상과 단절, 10년 수련으로 경지에 도달

곽재우는 선비이면서 신선이 되는 선도(仙道)를 닦았다. 1608년 그가 올린 소(疏)에 “신이 절립(絶粒) 한지 이미 8년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절립은 밥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벽곡( )이라고도 한다. 즉 화식을 끊고 생식을 했다는 말이다. 49세에 생식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정유재란이 끝나고 영암 유배에서 풀려나 현풍 비슬산으로 들어간 시점이다. 곽재우는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그때부터 선도를 수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곽재우가 기이한 벽곡을 한다고 모함하는 상소도 있었다.

곽재우는 선도를 수련하면서 뚜렷한 스승을 따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시에 이를 아쉬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젊어서는 기술(奇術)을 좋아하여 이를 부렸더니/ 느지막이 선도를 닦으니 스승 없음이 한이로다.” 그래도 그는 정진했다. “1년을 하루같이 마음을 비우고/ 종일토록 조용히 가다듬어 이지러짐이 없었네”라고 노래했다.

정진을 거듭한 곽재우의 선도는 경지가 상당했던 듯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조식(調息)하는 노력을 오래 계속하여 이제는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다.” 이런 말도 덧붙인다. “신의 생각으로는 생명도 연장할 수 있고 신선도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술회로 미루어 곽재우는 10년 동안 선도 수련을 통해 그 효과가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선도 관련 서책에 조식(調息)과 관련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었다. ‘온갖 생각을 끊어 버리면 음 기운이 사그라지고 헛된 인연을 단절하면 양 기운이 자라난다.’ 숨을 고른다는 뜻의 조식은 단전호흡을 말한다.

숨을 깊고 고르게 쉬어 단전에 모으는 호흡이다. 곽재우는 선도 수련에 효험을 얻은 뒤 큰 기대를 시에 담는다. “벗님들 곡기 끊은 나를 어여삐 여겨/ 낙강변에 함께 오두막을 지었네/ 솔잎을 씹으니 주린 줄 모르겠고/ 침을 삼키니 목마른 줄 모르겠네/ 고요한 가운데 거문고 타니 이 마음 한없이 맑고/창문 닫고 조식하니 생각이 더없이 깊네/ 백 년이 허무하게 지나고 보면/ 날 비웃던 벗님네 도리어 신선이라 이르리라.”

이완재 영남대 명예교수는 곽재우의 선도를 분석한 뒤 “노년의 망우당은 분명 지상의 신선과도 같은 풍취를 지녔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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