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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14)] 목표 달랐던 국민회 두 세력 원동 지역서 갈등 격화 

죽음 부른 입헌군주제·자유공화제 노선 충돌 

이상설측 “역적 집단” vs 안창호측 “시대 뒤떨어진 유학자”
기호파·서북파 주도권 문제 겹쳐 살인 사건까지 발생


▎이상설(왼쪽)과 안창호는 입헌군주제와 자유 공화제 국가를 목표로 독립운동을 벌인 탓에 노선 갈등이 격화돼 상호 살인이 벌어지는 파국이 발생했다. / 사진:중앙포토, 독립기념관
이상설은 미국 체류 중 1909년 3월 31일 자 [신한민보]에 ‘황실비멸국지이기(皇室非滅國之利器)’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창해자라는 익명으로 발표됐는데, ‘황실은 멸국(滅國)의 이기(利器)가 아니다’라는 제목 그대로 대한제국 황실과 고종황제를 옹호하는 글이었다. 남아있는 이상설의 글들이 대부분 한문임에 비해 이 글은 한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이상설의 자기인식과 정치사상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우선 이상설은 자신과 고종황제의 관계를 “나는 금문(金門) 자달(紫闥)에 경해(謦咳)도 친히 듣던 자이며, 옥당(玉堂) 한원(翰苑)에 은악(恩渥)도 후히 입던 자이라”라고 표현했다. 여기 언급된 ‘금문(金門) 자달(紫闥)’은 궁궐을 의미하고, ‘경해(謦咳)’는 윗사람의 기침 또는 윗사람의 말씀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금문 자달에 경해도 친히 듣던 자”라는 의미는 “나는 궁궐에서 왕의 말씀을 직접 듣던 자”라는 뜻이 된다. 또한 ‘옥당(玉堂)’은 홍문관을 의미하고 ‘한원(翰苑)’은 한림원을 의미하며, ‘은악(恩渥)’은 왕의 성은을 의미하므로 “옥당 한원에 은악도 후히 입던 자”란 “홍문관과 한림원에서 성은을 후하게 입던 자”라는 뜻이다. 요컨대 이상설은 자기 자신을 고종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는 핵심측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설의 이런 자기인식이 고종황제에 대한 개인적 의리 관계를 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노선과 건국운동 노선을 구성했다.

이상설은 “나는 금수가 아니요 초목이 아니오니 그 어이하여 님군을 사랑치 아니하며 황실을 존중치 아니하리요”라고 하여, 고종황제에 대한 개인적 의리 관계에서 자신은 당연히 고종황제를 사랑하며 대한제국 황실을 존중한다고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자기인식은 ‘군신유의’라는 유교 윤리에 입각했다. 그러므로 이상설은 근본적으로 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설은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위의 글을 쓰던 때의 이상설은 유럽과 미국을 두루 돌아보아 견문과 학식이 크게 확장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상설은 단순한 유학자처럼 전제군주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자유공화제를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 타협점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이상설은 영국 의회 개회식을 참관했을 당시의 감격을 언급한다. 그가 보았던 의회 개회식은 에드워드 7세가 참석한 의회 개회식이었다. 6두 마차를 탄 에드워드 7세가 의회 개회식에 등장하자 구름처럼 모인 영국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그 모습에서 이상설은 왕과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고 감격했다. 그때의 감격을 이상설은 “나도 또한 방관자로 그중에 같이 섰다가 하염없는 더운 눈물이 옷깃을 적심을 깨닫지 못하여 취한 듯이 미친 듯이 심신을 진정치 못하였었노라”라고 회고했다.

그때의 감격은 이상설로 하여금 무엇이 영국의 왕과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는지, 또 무엇이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백성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는지 고민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영국이나 대한제국은 공히 군주제 국가인데 영국은 어째서 세계 패권국가가 됐으며 대한제국은 어째서 일본의 보호국 신세가 됐는지 고민했다.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이상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는데, 이 언급에 그의 독립운동 노선 또는 건국운동 노선이 압축돼 있다.

영국 의회 개회식 보고 감격 이상설, 입헌군주제 주장


▎이상설은 에드워드 7세가 의회 개회식에 등장하자 구름처럼 모인 영국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왕과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고 감격했다. 사진은 영국 입헌군주제와 의회제도의 초석이 된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우리 인민이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님군과 나라이다. 님군과 나라를 분간하지 못하면 님군을 욕되게 하며 나라를 망하게 함을 면치 못하느니라. 무릇 님군은 나라를 위하여 둔 것이요 나라는 님군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님군이란 것은 인민이 자기의 사무를 위탁한 공평된 종뿐이요, 인민이란 것은 님군으로 하여금 저의 직역을 전력케 하는 최초 상전이라. 종된 님군이 사무와 직역을 다하지 못할지면 상전된 인민의 책망을 도망키 어려우니 맹자는 유문(儒門)의 아성(亞聖)이로되 백성이 중하며 사직이 버금이오 님군이 경하다는 공론을 창언하며, 루소는 철학의 대가로되 나라는 백성의 계약으로 좇아 됨이라는 자유 평등의 원리를 설명하여 다 나라는 님군의 물건이 아니요 백성의 물건인 것을 표창하였거늘, 어찌하여 우리 인민은 군국을 불문하고 왕일(往日)의 누견(陋見)을 지금껏 굳게 지켜 혹 칠칠장야 중에 희미한 꿈을 깨닫지 못하느뇨. 우리의 사무를 복역하여 우리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 오직 우리의 종일뿐이니 우리의 나라를 보호하여 우리의 인민을 구조하는 자 오직 우리의 님군일뿐이니라.”

위의 언급은 님군 즉 군주에 대한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유학자들은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가 하늘을 대신해 국가와 백성을 다스린다고 인식했다. 이런 인식에서는 당연히 국가의 주권자는 군주이고 백성은 통치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유교 천명론에 입각하면 국가는 전제 군주국이 될 수밖에 없다. 전제 군주국에서는 당연히 군주가 곧 국가요 국가가 곧 군주라는 생각이 일반화된다. 이상설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대한제국이 망국에 이르렀다고 인식했다. 그런 인식을 “우리 인민은 님군과 나라를 하나로 알아 님군으로 하여금 직책을 다하지 못하게 하여 써 나라를 망하게 하는도다. 슬프다. 우리 인민이여”라고 표현했다. “우리 인민은 님군과 나라를 하나로 알아”라는 표현은 전통적인 천명론에 따라 군주를 곧 국가로 국가를 곧 군주로 인식한다는 뜻인데, 이런 인식에서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모두 군주에게 달린 것이기에 백성은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님군으로 하여금 직책을 다하지 못하게 하여 써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교 천명론 때문에 대한제국이 망국에 이르렀다는 생각은 이상설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군주관과 국가관을 갖게 했다. 그것은 바로 ‘님군과 국가를 분간’하는 것이었다. ‘님군과 국가를 분간’한다는 것은 국가의 주권자는 군주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것을 이상설은 “맹자는 유문(儒門)의 아성(亞聖)이로되 백성이 중하며 사직이 버금이오 님군이 경하다는 공론을 창언하며, 루소는 철학의 대가로되 나라는 백성의 계약으로 좇아 됨이라는 자유 평등의 원리를 설명하여 다 나라는 님군의 물건이 아니요 백성의 물건인 것을 표창하였거늘”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즉 이상설은 기왕의 유교 천명론 대신 맹자의 국가론 또는 루소의 계약설에 따라 국가는 국민이 주권자이고, 군주는 국민의 계약에 따른 종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발상의 전환이 “우리의 사무를 복역하여 우리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 오직 우리의 종일뿐이니 우리의 나라를 보호하여 우리의 인민을 구조하는 자 오직 우리의 님군일뿐”이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런 표현에는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국가를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함축돼 있으며, 나아가 역사의 원동력이 국민이라는 생각도 함축돼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할만하다.

이상설 건국운동 노선, 국민회와 일부 충돌


▎이상설은 유교 천명론 대신 맹자(왼쪽)의 국가론 또는 루소의 계약설에 따라 국가는 국민이 주권자이고, 군주는 국민의 계약에 의거한 종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군주제 자체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교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이상설은 기왕의 유교 천명론에 입각했던 전제 군주제를 맹자와 루소의 사상을 결합해 계약군주제 또는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설의 독립운동 노선 또는 건국운동 노선은 당연하게도 계약군주제 또는 입헌군주제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이상설의 독립운동 노선 또는 건국운동 노선은 국민회 노선과 합치하는 부분도 있었고 충돌하는 부분도 있었다.

국민회 독립운동 노선 또는 건국운동 노선은 1909년 3월 31일 자 [신한민보]에 실린 ‘국민회 장정(國民會章程)’이라는 글 속에 있다. 국민회 장정은 제1장 총칙, 제2장 중앙총회, 제3장 지방총회, 제4장 지방회, 제5장 임원의 권한, 제6장 선거급임기, 제7장 입회급퇴회, 제8장 재정, 제9장 벌측 등 9장으로 구성한다. 그중 제1장 총칙의 제2조에 독립운동 노선 또는 건국운동 노선을 천명하는데, 그 내용은 “본회의 목적은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며 자유와 평등을 제창하여 동포의 영예를 증진하며 조국의 독립을 광복케 함에 있음”이었다. 이로 본다면 국민회 독립운동 노선, 즉 ‘조국의 독립광복 노선’은 첫째 교육과 실업 진발, 둘째 자유와 평등 제창, 셋째 동포의 영예증진이었다. 이중 첫째인 교육과 실업 진발은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이라 이해할 수 있고, 둘째 자유와 평등 제창 역시 안창호의 자유공화제 국가수립으로 풀이된다.

당시 국민회에 입회한 이상설은 비록 의병투쟁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교육과 실업 진발이라는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이 수용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유와 평등 제창이라는 부분에서 자유공화제 국가수립을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설이 국민회에 입회하고 나아가 원동위원으로까지 임명된 것은 자유와 평등 제창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면서도 일정 부분 같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안창호를 비롯한 공립협회 회원들에게 자유와 평등 제창이란 당연히 자유공화제 국가수립을 의미했다. 반면 이상설에게 자유와 평등 제창은 자유 공화제 국가수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계약군주제 또는 입헌군주제를 위한 자유와 평등 제창이었다. 즉 같은 자유와 평등의 제창을 말하지만, 그 궁극적 지향은 자유공화제와 계약군주제로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안창호의 자유공화제나 이상설의 계약군주제는 공히 주권재민을 전제로 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이상설의 국민회 입회와 원동위원 임명은 주권재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선까지만 국민회와 협력한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궁극적으로 자유공화제 국가냐 아니면 계약군주제 국가냐 하는 점에서는 타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는 각자의 가치관과 정치사상이 결부됐기에 어느 한쪽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타협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편 국민회 원동위원에 임명된 이상설과 정재관은 1909년 5월 29일 뉴욕에서 출발해 7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원동위원 이상설과 정재관은 뉴욕에서 출발할 때부터 갈등을 빚었다. 이와 관련해 1915년 10월 14일 자의 [신한민보]에 실린 ‘재외한인사회의 비운’이라는 사설에는 “저 이상설로 말하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할 수 없으되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외에 자기의 고집을 더욱 사랑하며 원수를 미워하는 외에 자기 동족 중에 시혐(猜嫌) 있는 자를 더욱 미워하여, 우리 국민회 재정을 가지고 국민회 명의로 원동에 나갈 때에 벌써 뉴욕에서부터 동행하는 정재관씨로 더불어 틈이 있어 나간 후에, 해삼위에 당도하여서는 먼저 모모 제씨를 유인하여 가지고 국민회를 비평하여 그사이에 틈이 나게 한 후에 당파 위에 당파를 더하여 피차에 승강하다가”라는 내용이 있다. 이 사설에 의하면 이상설과 정재관은 뉴욕에서부터 틈이 벌어졌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후 이상설은 모모 제씨를 유인해 국민회를 비평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상설과 정재관은 무엇 때문에 틈이 벌어졌고, 이상설은 국민회를 무엇이라 비평하였을까?

이상설·정재관, 뉴욕 출발 때부터 틈 벌어져


▎교민신문 ‘신한민보’ 1926년 7월 8일자에 실린 순종황제의 유조. 신한민보는 이외에도 독립운동단체 내부에서 벌어진 상호 살인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1948년 춘원 이광수가 쓴 [나의 고백]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 춘원 이광수는 1913년 겨울에 평안북도 정주를 떠나 만주와 상해를 여행했는데, 상해에서 국민회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1914년 봄 시베리아 치타로 가서 이강을 만났다. 춘원 이광수는 그때 이강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나의 고백]에 실었다. 그중에 “이상설은 해삼위에 오는 길로 국민회를 역적 도모하는 단체라 하여 배반하여 이를 배격하는 태도를 취하므로”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이상설은 국민회를 역적 도모하는 단체라고 비난했다는데, 그 이유는 국민회가 자유공화제를 추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공화제가 실현된다면 대한제국 황실과 고종황제는 설 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고종황제와의 개인적 의리 나아가 계약군주제 또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이상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유공화제를 추구하는 국민회는 역적 집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나의 고백]에 실린 다음의 내용 즉 “국민회를 역적이라고 이상설, 정순만 등이 공격한 이유는, 국민회의 기관지의 이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新韓民報), 하와이에서는 신한국보(新韓國報)라 하여 신한(新韓) 두 자를 쓴 것이 대한(大韓)을 배반하는 뜻이니, 이것은 안창호가 대통령이 되고 정재관이가 황제가 되려는 것이라고 함이었다”라는 것 역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이상설은 국민회가 자유공화제를 추구하는 이유를 안창호나 정재관이 고종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이나 황제가 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 이상설로 말하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할 수 없으되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외에 자기의 고집을 더욱 사랑하며 원수를 미워하는 외에 자기 동족 중에 시혐(猜嫌) 있는 자를 더욱 미워하여”라는 신한민보 사설은 바로 이상설의 이런 생각을 지적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상설은 자신과 함께 원동위원 된 정재관을 설득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즉 자유공화제는 역적이나 하는 일이니 그것 말고 자신이 추구하는 계약군주제를 따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재관은 세계의 대세를 들어 자유 공화제를 주장했을 것이고, 둘 사이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은 채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국민회 명의로 원동에 나갈 때에 벌써 뉴욕에서부터 동행하는 정재관씨로 더불어 틈이 있어”라는 신한민보의 사설은 바로 이런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상설과 정재관의 틈이란 건국운동 노선의 갈등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원동사업서 개별 노선 추구하며 서로 비난


▎1920년 미주 한인단체인 대한인 국민회가 독립자금을 모금한 내용이 적힌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독립운동 의연록. 하지만 국민회는 이상설과 안창호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노선 갈등이 불거졌다. / 사진:보훈처
이에 더해 주도권 다툼과 지역 갈등이 더해짐으로써 양측의 갈등은 더욱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설은 기호지역 출신임에 비해 정재관은 서북지역 출신이었다. 게다가 이상설은 고위관료 출신이었지만 정재관은 평민 출신이었다. 당연히 이상설은 정재관을 동등한 원동위원으로 보지 않고 부하로 생각했을 것이다. 본래 국민회에서는 이상설로 하여금 연해주 지역을 담당하게 하고, 정재관으로 하여금 만주 지역을 담당하게 하여 역할을 분담하는 것으로 하였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원동사업 전반을 자신이 최종 조율하고, 정재관은 보좌역만 하는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정재관이 강력하게 반발했을 것 또한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상설과 정재관은 각자 따로 원동사업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설은 심복 정순만을 위시하여 기호 출신들을 중심으로 의병투쟁 노선을 추구하고, 정재관은 기왕의 원동위원인 김성무, 이강을 위시하여 서북 출신들을 중심으로 실력양성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양측은 각각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갈등도 적지 않았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이상설 측은 정재관 측을 역적 집단이라 매도하고, 반대로 정재관 측은 이상설 측을 시대에 뒤떨어진 유학자 집단이라 매도했을 것이다. 이런 갈등이 결국에 상호간 살인으로까지 비화하고 말았다.

상호간 살인은 이상설 측의 정순만이 정재관 측의 양성춘을 총살한 것으로 시작된다. 정순만은 이상설의 핵심 측근이었고, 양성춘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류민회 회장이었다. 정순만이 양성춘을 총살한 사건은 연해주와 만주의 한인사회는 물론 북미와 하와이의 한인사회에도 큰 충격을 안겨줬으며, 여러 신문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다. 예컨대 신한민보와 대동공보에 관련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 이들 기사에 의하면 사건 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1910년 초, 술 취한 정순만이 정재관, 양성춘 등의 집에 찾아가 무수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당시 정재관이나 양성춘은 대꾸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술 취한 사람에게 얘기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다음날 차석보씨 집에 모여 정순만을 불렀다. 그리고 해명도 하고 위로도 하였는데, 정순만은 도리어 “내가 6도 사람을 위하여 서도 사람에게 피 흘리기를 작정하고 결사대를 맹세하였노라” 말하고는 가버렸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정순만은 정재관 등 서북파 인물들이 원동사업을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 이해되는데, 그 불만은 곧 이상설로 대표되는 기호파의 불만이기도 했다.

이상설 측근이 정재관 측근 양성춘 총살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세워진 이상설 유허비와 유해를 뿌린 수이푼 강.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중앙포토
그런데 정순만은 거류민회 회장 양성춘에게 양측의 화해를 요청했다. 그 결과 1910년 1월 23일 낮에 화해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서 정순만은 “김성무씨가 미국에서 대동공보사에 연조하는 돈을 건몰(乾沒) 하였다고 공박하며, 그 외에 패언망담이 무상”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정순만은 진정으로 화해하려고 자리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려고 자리를 요청한 것이 분명하다. 정순만의 비난 요점은 김성무 등 국민회 원동위원들이 국민회 지원금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거류민회 회장 양성춘이 나서서 “정씨의 말은 부인소아의 말이니 그만 정리하고 속히 평화 하라”고 하여 정재관 측을 옹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순만 대신 윤일병이 나서서 “정재관씨가 미주 태동실업회사의 재정을 건몰(乾沒) 하였다”고 공격했다. 이에 김성무, 정재관 등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다시 김현도가 나서서 정재관, 김성무, 이갑 등을 논박했다. 결국 화해 자리는 연해주의 기호파와 서북파 간 논쟁 자리가 되고 말았다. 보다 못한 거류민회 회장 양성춘이 “쓸데없는 무근지설을 가지고 다 오해함이니 어서 평화 하라”고 하자, 정순만은 양성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고, 격노한 거류민회 회원들은 정순만을 밖으로 쫓아냈다. 이에 분개한 정순만이 저녁에 양성춘을 집으로 찾아가 권총으로 사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순만이 1년 후 출옥하자, 양성춘의 부인과 자제들이 정순만을 보복, 살해한 것이 상호간 살인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을 거치면서 연해주의 기호파와 서북파는 더더욱 멀어졌고 동포사회는 분열됐다. 그런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합노선과 더불어 통합권위가 등장해야만 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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