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13)] ‘애국동지 대표회’ 통해 한인단체 통합 이뤘지만 

이상설·안창호 노선 갈등은 균열 뇌관이었다 

무장투쟁 vs 실력양성, 각 단체 입장 차이 조정 못하고 충돌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미국 와서 원동위원되자 다툼 표면화


▎1909년 2월 1일 하와이와 미주 단체들이 합쳐져 대한인국민회(국민회)가 만들어졌다. 대동보국회가 1910년 5월 국민회에 참가한 뒤로 정식 이름이 국민회로 바뀌었다. 국민회는 미주 지역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원류다. 1909년 국민회 하외이 지방총회 창립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박상하, 정원명(초대회장), 강용수(비서), 뒷줄 안원규(재무), 홍인표(비서), 이내수(부회장), 성용환(총무), 성명 미상.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1909년 6월 2일 자 신한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하와이 지방총회장 정원명씨의 조복(照覆)을 인하여, 본회원 이당(李堂)씨로 원동지방의 일체 사무를 전권 위임하는 양 총회의 연서판 위임장이 여좌(如左)함.” 즉 이 기사는 ‘이당(李堂)씨’라고 하는 국민회 회원을 하와이 지방총회와 북미 지방총회에서 원동위원으로 임명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당(李堂)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헤이그 밀사의 정사였던 이상설이다. ‘이당(李堂)’이란 ‘이씨 어른’이란 의미로서 이상설을 존중하는 표현이다. 헤이그 밀사의 정사였던 이상설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재미 교포들이 ‘이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기사를 통해, 1907년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이 1909년 6월에는 미국에서 국민회 회원이 됐으며, 나아가 국민회 원동위원에도 임명됐음을 알 수 있다. 국민회는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1909년 2월 통합된 단체다. 즉 이상설이 국민회 회원이 됐다는 것은, 안창호가 추진하던 공립협회와 신민회의 취지에 공감해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하면서 회명을 국민회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기관지 공립신보도 신한민보로 개명했다.

국민회는 장기적으로 세계의 유력 한인사회를 국민회 산하에 통합하고자 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었던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로, 하와이에 본부를 두었던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로 편성했다. 이는 장차 원동지역에도 ‘시베리아 지방총회’, ‘만주 지방총회’ 등을 설치하고, 이 두 총회를 ‘북미 지방총회’, ‘하와이 지방총회’와 함께 ‘중앙총회’ 산하에 편입해, 전 세계 한인사회를 통합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러므로 1909년 6월 이상설이 국민회 원동위원이 됐다는 사실은, 이상설이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의 창설을 책임지게 됐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상설, 헤이그 밀사 계기로 박용만과 신뢰 쌓여


▎독립운동가이자 도마 안중근 의사의 스승인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 파견 실패 이후 전 세계 한인 단체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처럼 원대한 계획은 박용만을 비롯해 안창호, 이승만, 이상설 등의 협력으로 추진됐다. 특히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던 이상설이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 사명에서 실패한 뒤, 유럽을 돌며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다가 미국으로 갔다. 그때가 1908년 2월이었다. 대한제국의 고위관료 출신이자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던 이상설의 상징성은 컸다. 미국에 도착한 이상설은 순식간에 재미교포 사회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고,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했다. 대표적으로 박용만, 윤병구, 송헌주다.

박용만은 이승만, 정순만과 함께 이른바 ‘3만’ 중의 한명이었다. 박용만, 이승만, 정순만은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한성감옥에 함께 수감된 인연으로 결의형제를 맺어 ‘3만’으로 불렸다. 1904년 8월에 한성감옥에서 석방된 이승만은 11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뒤이어 박용만도 1905년 2월 미국으로 갔다. 철도노동자로 일하던 박용만은 1906년 2월 콜로라도 덴버시로 이사해 정착했다. 한편 정순만은 1906년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했다.

이상설과 박용만은 1907년 헤이그 특사를 계기로 밀접한 관계가 됐다. 이상설이 밀사의 정사로 헤이그에 가게 되자 정순만은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때 정순만은 미국의 박용만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의형제’로 불릴 정도의 친분이 있었고, 함께 개화운동을 하던 경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순만의 요청에, 박용만은 성심껏 도왔다. 그는 자신과 친한 윤병구, 송헌주를 헤이그로 보내 이상설을 돕게 했다. 이상설은 영어도 못 하고, 서양 물정에도 밝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와이 교포사회의 핵심 지도자였던 윤병구, 송헌주는 영어도 잘했고 애국심도 뛰어났다. 그래서 박용만은 특별히 윤병구, 송헌주를 이상설에게 보내 통역, 설명, 안내 등을 하게 했다. 당시 박용만은 헤이그 특사의 정사인 이상설을 도와 사명을 성공시키는 것이 애국애족의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밀사 사명이 실패하자 이상설은 윤병구, 송헌주와 함께 반년 정도 유럽을 순회하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다가 미국으로 갔다. 그 사이 이상설과 윤병구, 송헌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다. 물론 박용만과의 친분도 두터워졌다.

한편 콜로라도 덴버시에 정착한 박용만은 여관과 노동주선소를 운영했는데, 당시 미국 본토에는 공립협회, 대동보국회를 비롯해 공제회, 동맹신흥회 등의 한인 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하와이에도 20여 개의 한인 단체가 있었다. 이들 단체는 주장하는 국가 이념도 차이가 있었고 주도 세력도 달랐다. 공립협회의 경우 자유공화제를 주창했으며, 안창호로 대표되는 평안도 출신이 주도했다. 반면 대동보국회는 입헌군주제를 중시하며, 기호 출신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국가 이념과 주도 세력이 달랐던 한인단체들은 1907년 헤이그 특사, 고종 양위, 군대 해산 등을 겪으며 통합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1907년 9월, 하와이의 24개 한인 단체가 통합해 합성협회를 조직했다. 그 당시 윤병구, 송헌주 등이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미국 본토의 한인 단체, 특히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통합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박용만은 1907년 연말, 덴버시의 한인 유지들에게 미국 내 한인 단체뿐만 아니라 원동지역 한인 단체들의 대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애국동지 대표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덴버시의 한인 유지들은 1908년 1월 1일 임시회를 열어 ‘애국동지 대표회’를 덴버시에서 개최할 것을 결정하고 미국 본토, 하와이, 연해주, 만주 등에 산재한 한인 단체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와 관련해 1908년 3월 4일 자 공립신보에 실린 ‘애국동지 대표회 발기취지서’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박용만, 해외 동포 대단결 목표 ‘애국동지 대표회’ 제안


▎박용만, 이승만, 정순만은 한성감옥에 함께 수감된 인연으로 결의 형제를 맺어 ‘3만’으로 불렸다. 1913년 4월 호놀롤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 사진:유영익의 ‘이승만의 삶과 꿈’
“(전략) 덴버 지방에 있는 무리들의 의향이 이로부터 일어나고 의론이 이로부터 동일하여 어느 날이든지 기회 있는 대로 북미에 있는 우리 한인들이 한번 큰 회를 열고 매사를 의론하고자 우선 이곳 동포께 물으니, 열심으로 상응하고 또한 부근 각처에 통하매 기쁨으로 대답하여 본년 1월 1일 하오 8시에 덴버에서 임시회를 열고 각 동포가 이 일을 의논할 새, 첫째 회명은 ‘애국동지 대표회’로 명하고, 둘째 회기는 본년 6월 15일로 정한 후, 그동안 약간 일을 정돈하고 이제 비로소 한글 장을 닦아 우선 태평양 연안과 미국 내지 각처와 하와이 군도에 계신 각 동포에게 고하노니, 첫째는 대표회를 발기한 주의.

一. 북미에 있는 우리 애국동지들은 무슨 사회와 어느 단체를 물론하고 다만 우리나라 당금 정형에 대하여 동일한 행동을 가지고자 함

一. 이 위에서 말한 바를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 동포 있는 곳마다 각각 대표자 한 사람이나 혹 두 사람을 보내어 우리의 장차 행할 바 일을 의논코자 함

둘째는 대표회라 이름 지은 이유(중략) 임시회장 박용만 임시서기 이관수”

내용을 살펴보면 박용만은 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애국동지 대표회’를 제안했다. 즉 ‘애국동지 대표회’를 통해 북미, 하와이, 원동지역 등의 한인단체들을 대통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발상은 기본적으로 공립협회와 신민회를 통해 해외 동포들을 대통합하려던 안창호의 구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신민회는 평안도 출신들이 주도하는 단체로서 타 지역 출신 또는 다른 정치 이념을 가진 교포단체들을 통합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박용만은 바로 이 점을 문제시하며 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헤이그 특사 실패, 고종 양위, 군대 해산이라는 격변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 동포들은 지역과 출신, 이념을 모두 떠나 하나로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박용만의 주장에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배경에서 안창호의 공립협회 역시 박용만의 주장에 호응했으며 그 결과로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한다.

한편 이상설이 윤병구, 송현주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1908년 2월은 박용만이 ‘애국동지 대표회’를 한창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박용만은 하와이 교포사회의 핵심지도자인 윤병구, 송현주와 ‘애국동지 대표회’ 문제를 논의했다. 당연히 이상설과도 논의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1906년 만주 용정촌에 망명한 이상설은 만주 한인사회의 유력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 동포들을 대동단결시키자는 박용만의 제안은 이상설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다. 이상설은 헤이그 밀사 사명을 수행하면서, 조국의 참혹한 현실과 더불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외 동포의 대동단결 말고 달리 대안이 없었다.

게다가 박용만은 이상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 노선과도 상당 부분 유사했다. 박용만은 일제로부터 독립하려면, 무장투쟁 노선을 최우선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상설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박용만과 이상설의 생각은 안창호의 신민회 노선과 달랐다. 안창호는 무력투쟁에 앞서 실력 양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상설은 자신의 핵심 측근인 이동녕과 정순만이 신민회에 가입했음에도 정작 본인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신민회의 노선에 대한 불만과 고관대작 출신으로서 군주제에 대한 미련 탓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용만이 주장하는 해외동포 대단결은 분명 이상설에게 매력적인 주장이었다. 우선 해외동포 대단결을 박용만이 제안했으므로, 향후 재미교포들이 창설할 통합 조직에서 박용만의 역할과 발언권이 클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껏 실력양성을 내세우며 무력투쟁에 반대하던 공립협회와 신민회의 운동노선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조직을 자신이 주도해 창설하고 재미교포 사회의 한인조직과 통합한 후, 박용만과 협력한다면 해외 동포 사회 전체의 독립운동 노선을 자신과 박용만이 주도해 무력투쟁으로 이끌 가능성도 높았다. 이런 배경에서 이상설은 ‘애국동지 대표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그 결과 국민회 ‘원동위원’이 될 수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청년 이승만, ‘애국동지 대표회’ 의장으로 선출


▎하버드대 석사과정 재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맨 왼쪽)과 그의 급우들. 가운데 앉은 인물은 브라운대에서 초빙된 국제법 담당 객원교수 윌슨. 이승만은 독립운동 중 미국이 비협조적일 때마다 “미국이 국제법을 안 지키니 그것을 가르친 윌슨 교수는 엉터리”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 사진:유영익의 ‘이승만의 삶과 꿈’
‘애국동지 대표회’는 1908년 7월 11일 덴버시에 자리한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개최했다. 원래는 ‘애국동지 대표회 발기취지서’에 명시된 것처럼 6월 15일이 예정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예정일보다 한 달 정도 늦게 개최했는데, 이승만 때문이었다.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이승만은 학위과정을 마친 후 ‘애국동지 대표회’에 참석했다.

이승만은 연해주 한인대표로 초청받았다. 연해주에 가보지도 않은 이승만이 이상설과 마찬가지로 연해주 한인대표 자격을 얻은 이유는 이상설의 배려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승만은 이상설의 핵심측근인 정순만과 ‘의형제’였을 뿐만 아니라, 하버드 석사 과정 학생이었다. 이상설은 이 같은 이승만을 원동지역 한인 단체의 미국 특파원으로 활용하려 했을 듯하다. 아직은 하버드 학생에 불과하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이였다. 그런 이승만이 박용만과 협력한다면 재미교포사회의 강력한 지도자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럴 경우, 원동지역의 한인사회와 북미지역의 한인사회가 원활히 협력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은 연해주 대표로 초청받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애국동지 대표회’에는 연해주 대표 이상설, 하와이 대표 윤병구와 송헌수, 대동보국회 대표 장경 등이 초청됐다. 안창호의 공립협회에서는 참석자가 없었다. 이렇게 초청된 한인 단체 대표는 4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상설은 사정이 생겨 회의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애국동지 대표회’가 개최된 후 이승만은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전 세계 한인교포사회의 유력인사로 급부상하게 됐다. 3일간 개최된 ‘애국동지 대표회’에서는 7개 사항이 결정됐다. 가장 중요한 결정 사항은 ‘향후 국내외 통일기관을 조직할 것’과 더불어 ‘둔전병제에 바탕한 군사학교 설립’이었다.

‘향후 국내외 통일기관을 조직할 것’은 물론 해외 동포들을 대동단결시킬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애국동지 대표회’의 결의 결과 1909년 2월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해 국민회가 됐던 것이다. 반면 ‘둔전병제에 바탕 한 군사학교 설립’은 기왕의 실력양성 일변도의 운동노선에 더해 새로이 무력투쟁 운동노선을 더한다는 의미였다.

국민회로 통합 통해 재미교포 독립운동 역량 크게 강화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독립선언문 . 사진은 미주지역 한인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하와이 교포들이 만든 독립선언서.
왜냐하면 ‘둔전병제에 바탕한 군사학교 설립’이란 일제와의 무력투쟁에 대비하기 위해 자급자족형 군사학교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무력투쟁 노선이 새로 추가된 것은 ‘애국동지 대표회’를 제안한 박용만의 평소 지론에 더해 이상설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애국동지 대표회’는 몇 가지 점에서 근·현대 건국운동사, 특히 신민회와 관련해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1907년부터 1908년까지 근대 민족운동을 주도하던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신민회가 1909년 2월 합성협회와 통합해 국민회가 됨으로써 재미교포들의 독립운동 역량이 크게 확장됐다는 사실이다. 뒤이어 1910년 2월, 국민회는 대동보국회와도 통합해 대한인국민회가 됨으로써 재미교포들의 독립운동 역량을 사실상 대통합시켰다. 여기에 더해 원동지역의 시베리아 지방총회, 만주 지방총회까지 창설돼 대한인국민회에 통합됨으로서 1910년대 들어 해외동포들의 독립운동 역량은 외형상 완벽한 대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외형적 대통합은 적지 않은 갈등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신민회가 근대 독립운동을 주도할 때는 비록 평안도 지역 출신과 자유공화제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내부의 노선 갈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안창호의 강력한 지도력에 따라 공립협회와 신민회는 국내와 국외의 근대 민족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국동지 대표회’ 이후 공립협회, 합성협회, 대동보국회 등이 통합되면서 국민회 내부에는 다양한 정파와 계파가 혼재했다. 그 정파나 계파는 각각의 정치 이념과 운동 노선을 주장했고, 이는 이념 갈등, 노선 갈등, 지역 갈등 같은 온갖 부정적 요소들이 조정되지 못한 채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문제를 조정할만한 공식적인 권위나 지도자가 없었기에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상설의 ‘원동위원’ 임명에서부터 내부 갈등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상설은 1908년 2월 미국에 왔고, 1909년 6월에는 국민회 회원이면서 ‘원동위원’에 임명됐다. 그런데 “하와이 지방총회장 정원명씨의 조복(照覆)을 인하여, 본회원 이당(李堂)씨로 원동지방의 일체 사무를 전권 위임하는 양 총회의 연서판 위임장이 여좌(如左)함”이라는 1909년 6월 2일자 신한민보 기사에 의하면, 이상설을 원동위원으로 추천한 세력은 하와이 지방총회 쪽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하와이 지방총회장은 비록 정원명이었지만 배후실세는 윤병구, 송현주였다. 이상설은 그들을 움직여 원동위원이 됐을 것이다. 원동위원 이상설의 임무는 “아령 원동각처에 주재한 우리 동포를 규합하여 단체를 고결(固結)하며 본회의 종지를 창명하여 목적을 관철케 함이 현시의 급무인바, 본회원 이당(李堂)은 덕망이 귀중하고 경륜이 탁월하여 나라를 근심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열심과 성덕이 가히 우리 회의 표준을 지을지라. 그럼으로 원동방면의 일체 회무를 전권 행사하게 하기 위해 본회 대표원을 추정하노니 왕재(旺哉) 욱재(郁哉)하여 중망을 극부(克負)할지어다”라는 위임장의 내용대로 원동 전체를 책임지고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는 연해주와 만주에 투입된 국민회 지원금을 이상설이 독점한다는 의미와 함께, 해당 지역의 독립운동도 이상설이 통솔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연해주·만주 동포사회, 갈등·분열 속으로


▎도산 안창호는 ‘자유공화제’와 ‘실력양성’을 독립운동의 노선으로 정했다. 미국 활동 시절 친지들과 사냥 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도산 안창호(오른쪽에서 둘째,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
그런데 안창호의 신민회는 이미 원동지역에 김성무, 이강 등 원동위원을 파견해 놓았다. 이런 안창호의 신민회 쪽에서 본다면 이상설의 원동위원 임명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상설은 안창호의 신민회가 내세웠던 ‘자유공화제’와 ‘실력양성’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명문대가 출신에 고관대작 출신인 이상설은 ‘입헌군주제’와 ‘의병투쟁’을 선호했다. 이런 사실에서 본다면, 이상설의 원동위원 임명은 안창호의 동의 없이 하와이 지방총회가 독자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설이 원동위원에 임명된 사실을 알게 된 안창호가 가만있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해 1958년 4월 23일자 국민보 특집 기사에 실린 기사 즉 “원동에 (중략) 제3차로 정재관, 이상설 양씨였는데 도아령(到俄領) 하여 즉시로 양 대표가 분립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관리인과 평민인 사이에 범사에 외사부동이라 합니다”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위 기사에 의하면, 이상설에 뒤이어 정재관이 원동위원이 됐다. 정재관은 황해도 사람으로 공립협회 때부터 안창호와 함께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정재관은 안창호의 영향력에 의해 원동위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상설과 정재관이 동시에 원동위원이 된 것은,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의 타협이라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의 주도권 다툼이자 노선 갈등이 표출된 것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그 같은 갈등을 국민보 특집 기사에서는 “관리인과 평민인 사이에 범사에 외사부동”이라 했는데, 그것은 독립운동 노선과 궁극적인 국가 형태에 대해 정재관과 이상설의 생각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생각을 달리하는 원동위원 이상설과 정재관을 매개로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사회 역시 갈등과 분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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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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