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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21)] 장녹수 치마폭에서 흥청망청한 연산군의 폭정 

어머니 이름으로, 아버지 통치체제 흔들다 

절대권력 탐한 폭군에 언로 보장 유교 시스템은 눈엣가시
폐비 윤씨 비극,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해 갑자사화 일으켜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은 재위 기간 폭정을 일삼다 신하들에 의해 폐위됐다.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에 열연을 펼쳤던 배우 유인촌(연산군 역)과 이혜영(장녹수 역).
까르르,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에 눈가리개를 한 임금은 더욱 몸이 달았다. 허공에 대고 연방 두 손을 휘젓는 폭군의 모습이 어찌나 바보 같은지 후궁 장씨는 웃다 지쳐 배꼽이 빠질 지경이다. 기막힌 일이다. 천한 신분의 계집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군주를 희롱하다니. 산전수전 다 겪은 장녹수라도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장녹수는 문의 현령을 지낸 장한필의 서녀로 태어났다. 양반의 딸이지만 어머니가 천첩(賤妾)이라 여종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게다가 집안이 가난해 팔려 가듯 여러 번 시집가야 했다. 기구한 팔자가 바뀐 것은 제안대군의 종을 남편으로 맞고 아들을 낳은 뒤였다. 그 집의 여종이 되자 노래와 춤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하늘이 선물한 재능이 빛을 발했다.

제안대군 이현은 조선 8대 왕 예종의 원자였다. 1469년 예종이 요절했을 때 원자는 고작 4세였다. 즉위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 9대 왕은 사촌 형 성종에게 넘어갔다. 임금 자리를 놓친 왕자의 인생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살아남으려면 왕좌에 무관심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제안대군은 음악에 심취했다. 종들에게 노래와 연주를 시키고 즐겼다.

장녹수는 노래 솜씨가 출중했다. 특히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맑은소리를 잘 냈는데 제법 들을 만했다([연산군일기] 1502년 11월 25일). 콧노래 창법으로 일가를 이룬 것이다. 그녀의 개인기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장녹수는 여자 광대로 이름을 날렸다. 왕조시대의 모든 소문과 평판은 궁으로 흘러 들어간다. 여재(女才)에 호기심이 동한 임금은 당숙 제안대군에게 청해 화제의 인물을 불러들였다.

연산군 이융은 감성적인 시를 쓰는 풍류가요, 한창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이었다. 청아하게 떨리는 장녹수의 음색은 폭군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가슴을 파고드는 전율에 이융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나이 서른 줄에 접어들었지만 16세 계집아이처럼 생겼다. 얼굴은 그저 그런데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젊은 왕은 연상의 여종을 곁에 두기로 했다.

장녹수는 폭군을 잘 다뤘다. 팔려 가듯 여러 번 시집간 여인이다. 별의별 남자 다 만나보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체득했다. 연산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남자였지만, 장녹수는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폭력적인 기질을 잠재웠다. 그녀가 어린아이마냥 조롱하고, 노예에게 하듯 욕해도 폭군은 기뻐했다([연산군일기] 1502년 11월 25일).

이융은 장녹수의 교태와 아양에 푹 빠졌다. 국고를 기울여 사랑하는 여인에게 집과 재물, 전답과 노비를 아낌없이 하사했다. 상 주고 벌하는 일이 모두 녹수의 입에 달렸으니 뇌물과 청탁도 쏟아져 들어왔다. 그 능수능란한 치마폭에서 젊은 왕은 거침없이 폭정으로 치달았다. 아버지 성종이 이룩한 유교 통치체제를 쫓겨나 죽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광기 어린 패륜의 사랑으로 뒤흔들었다.

“신하는 임금이 아니라 의(義)를 따른다”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연산군(진태현 분)이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어갈 때 피를 닦았던 수건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산군은 어쩌다 방탕하고 포악한 폭군이 됐을까? 폐비 윤씨의 비극, 아버지가 어머니를 내치고 죽인 사건이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다만 사건이 불거질 당시(1479~1482년) 원자 이융은 나이가 어렸다(1476년생). 또 문신 강희맹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느라 생모와 떨어져 지내기도 했다. 그러니 어머니의 폐출과 죽음이 직접적인 충격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반면 아버지 성종에 대한 반감은 뿌리 깊고 의미심장했다.

“성종이 사향 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연산군이 성종과 함께 있을 때 그 사슴이 와서 핥았다. 연산군은 사슴을 발로 차 쫓아버렸다. 성종은 짐승이 따르는데 잔인하게 대한다고 아들을 나무랐다. 나중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손수 그 사슴을 쏴 죽였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연산조고사본말’)

이 반감은 기질 차이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성종은 학업과 국정에 성실히 임한 모범 군주였다. 하루 세 차례 이상 경연을 하고 신하들과의 토론을 즐겼다. 이에 반해 연산군은 어려서부터 노는 데만 몰두하고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스승 조지서가 엄하게 가르치자 앙심을 품고 벽에 ‘소인(小人)’이라 써 붙이기도 했다. 워낙 삐뚤고 모진 성품이었다(연산군에게 찍힌 조지서는 결국 갑자사화 때 애꿎은 목숨을 잃었다).

아들의 싹수가 노란 것을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1483년 여덟 살이 된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성종은 고심했다. 그러나 달리 대안이 없었다. 계비 정현왕후에게서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이 태어난 것은 1488년의 일이었다. 세자는 더욱 엇나갔다. 성종이 불러도 아프다는 핑계로 무시하기 일쑤였다. 할머니 소혜왕후에게 술 올리는 자리도 빠졌다. 임금이 나인을 보내 살피니 죽이겠다고 협박해 병이 있다고 아뢰게 했다.

세자의 반감은 자라면서 유교 통치체제에 대한 적대감으로 발전했다. 성종은 유교 정치의 요체가 언로(言路)의 확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론 3사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정비하고 학문과 절의로 명망 높은 재야 선비들을 등용했다. 훈구대신들은 유학의 도로 무장하고 강직한 언로를 행사하는 사림의 공세에 쩔쩔맸다. 문제는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세등등한 사림은 성종 앞에서도 직언을 퍼부었다.

“신하의 도는 의(義)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성종실록] 1493년 10월 27일) 1493년 홍문관전한 성세명이 임금에게 아뢴 말이다. 그해 조선 땅에는 지진·우박 등 자연재해가 빈번했다. 사헌부에서는 뜬금없이 영의정 윤필상을 탄핵했다. “천변이 거듭되는 것은 수상 자리에 적절치 못한 자가 앉아 있기 때문”이라는 명목이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윤필상이 자꾸 임금을 편들어 사림의 언로를 가로막았다고 본 것이다.

윤필상은 사직상소를 올렸다. 잘못이 있든 없든 탄핵을 받은 대신은 사직을 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종은 ‘불윤비답(不允批答)’을 내렸다.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사실상의 신임장이었다. 그런데 홍문관 교리 유호인이 불윤비답의 전달을 거부했다. 화가 난 성종은 유호인을 잡아들였다. 이에 상관 성세명이 “신하의 도는 임금이 아니라 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항변한 것이다. 결국 유호인은 풀려났고, 윤필상은 물러났다.

성종 말년에 이르면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사림은 언로를 펼쳐 사사건건 임금과 대신들을 물고 늘어졌다. 사소한 일도 트집을 잡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한 번은 대비들이 모여 사는 창경궁에 물이 넘쳐 수로를 정비한 일이 있었다. 수로에 구리 수통(水桶)을 깔았는데 사림이 왕실에서 사치를 조장한다며 으르렁댔다. 어쩔 수 없이 구리 수통을 뜯어내고 돌을 깔았다. 그 여파로 궁궐 담장을 두 군데나 허물었다.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것이다.

세자는 아버지 곁에서 서무 결재를 맡아보며 성종이 사림의 언로에 쩔쩔매는 모습을 지켜봤다. 언로를 근간으로 삼는 유교 통치체제가 연산군은 못마땅했다. 저들은 단지 ‘절개 있는 선비’라는 명성을 얻고자 임금에게 무작정 큰소리치는 게 아닐까. 세자가 볼 때 사림의 언로는 무엄하고 방자했다. 임금을 업신여기는 유교 통치체제가 기분 나빴다. 그는 결심했다. 능상(凌上), 위를 능멸하는 유교 정치를 내가 왕이 되면 반드시 손보리라.

언로를 대역무도로 다스린 무오사화


▎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은 배우 채시라.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 이융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새 임금을 길들이겠다는 것인지 사림이 목소리를 높였다. 선왕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를 올리려 하자 불교식 제례는 안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성종(成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정하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뜻을 관철하기는 했지만, 연산군은 언로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유교 통치체제의 매운맛을 톡톡히 봤다. 그는 속내를 숨기고 본때를 보여줄 날을 별렀다.

1498년 유자광과 이극돈이 세조를 비방한 사초를 고변하자 연산군은 쾌재를 불렀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문제 삼았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죽인 사건을 중국 초나라의 의제에 빗대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사림 일각에서는 세조의 행위를 왕위 찬탈로 보고 비판적으로 묘사해왔다. 그것이 사초에 오르는 순간 공론화를 피할 수 없었다.

저들이 간악한 파당을 이뤄 선왕을 헐뜯었다는 공소가 즉각 제기됐다. 실제로 유자광 등이 샅샅이 뒤진 사초에는 세조의 낯뜨거운 비행들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아들 의경세자의 후궁들과 불륜이 있었음을 암시하는가 하면 단종 생모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내 유해를 바닷가에 버렸다는 설도 넣었다. 믿거나 말거나, 세간의 소문을 근거도 없이 사초에 옮긴 것이다.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으로선 임금을 능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왕은 이를 대역무도(大逆無道)로 다스렸다. 무오사화가 터진 것이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됐고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은 극형에 처해졌다. 훗날 문묘에 종사되는 김굉필과 정여창도 이때 유배를 떠났다. 피맛을 본 이융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거슬리면 불경죄로 목을 베거나 사지를 찢었다. 조정과 궁궐에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사림의 언로는 얼어붙었고 훈구대신들도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기고만장한 연산군은 방탕하고 포악한 폭군으로 변해갔다. 1502~1503년 무렵에는 장녹수에게 푹 빠져 국고를 탕진하고 민폐를 끼치니 급기야 할머니 소혜왕후가 발 벗고 나섰다. 대왕대비는 손자를 여러 차례 타이르는 한편 윤필상 등 원로대신들에게도 간언을 요청했다. 나라의 어른들 말고는 폭주하는 임금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왕이 더 망가지기 전에 간곡히 설득해 처신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위를 능멸하는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로 분한 배우 전혜빈. 폐비 윤씨의 글썽거리는 눈물에 성종에 대한 사랑과 서운함이 배어 있는 듯하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어른들이 이렇게 나오면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으로는 분노와 원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라는 패를 만지작거렸다. 따지고 보면 저들은 내 어머니를 내치고 죽인 사람들이 아닌가.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투기와 배덕의 올가미를 씌웠고, 원로라는 사람들은 폐출과 사사에 동조하지 않았던가.

폭군은 절대권력을 탐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마지막 걸림돌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자식이 어머니의 한을 풀겠다는데 누가 가로막을쏘냐. 1504년 3월 20일 갑자사화의 불길이 타올랐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죄로 선왕의 후궁들을 때려죽이고 살기등등하게 대왕대비 소혜왕후의 처소로 쳐들어갔다. 불손한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어찌하여 제 어미를 죽였습니까?”([연산군일기] 1504년 3월 20일) 한밤중에 친손자에게 봉변을 당한 할머니의 참담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소혜왕후는 그로부터 한 달 후 창경궁 건춘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극의 불길은 순식간에 대신들에게로 번졌다. 윤필상·성준·한치형·이극균·이세좌 등이 처참하게 최후를 맞았고 지난날 폐비를 부추긴 한명회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폭군 연산은 정말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을까? 사실 그는 즉위 초에 성종의 묘비문을 검토하다가 우연히 폐비 윤씨의 억울한 정상을 알게 됐다. 그날 왕은 수라를 들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3월 16일). 하지만 이융이 뒤늦게 참극을 일으킨 데는 냉혹한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었다.

“능상(凌上), 위를 능멸하는 것이 오늘날 풍속을 이뤘으니 그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임금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면 경중을 따지지 않고 엄한 법으로 다스려 인심이 바른 데로 돌아가도록 할 것이다.”([연산군일기] 1504년 5월 7일)

이튿날 연산군은 재상이든 대간이든 임금을 능멸하는 말을 한 자가 있으면 상고해 아뢰라고 명을 내렸다. 과거의 기록들을 샅샅이 뒤져 자신에게 잔소리한 대신들과 바른말 한 언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갑자사화로 훈구파와 사림을 막론하고 239명 이상이 화를 입었는데 절반 넘게 목숨을 잃었다. 손바닥 뚫기, 인두로 지지기, 가슴 빠개기, 뼈 바르기, 마디마디 자르기, 배 가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 온갖 악형이 동원됐다.

연산군은 전무후무한 전제군주가 됐다. 언로를 틀어막고 침묵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쳤다. 관원과 내관들은 신언패(愼言牌)를 차고 다녔다. 패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연산조고사본말’)

연산군은 비록 문리를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동물적인 정치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잔혹하면서도 집요하게 언로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손에 넣었다. 단, 꿈자리는 사나웠을 것이다. 공포정치로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제목을 벤 칼과 관을 부순 도끼를 들고 화를 입은 자들이 연산군의 꿈속을 헤집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죽은 자의 환영은 산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 주술이다. 밤잠을 설치고 어둠 속을 응시하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비명을 삼키느라 폭군의 가슴은 미어터졌으리라.

그 흉흉한 속내를 연산군은 광기 어린 사랑으로 달래려 했다. 여색만이 구원이었다. 장녹수만으로는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왕비와 후궁과 궁녀들로도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폭군의 욕정은 팔도강산으로 뻗어 나갔다.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기생을 두고 운평(運平)이라 부르게 했다. 그 수가 나중에는 1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미색과 재주가 출중한 여인들은 채홍사 임사홍 등이 서울로 데려갔다.

기생들 모아 흥청망청, 누이·큰어머니 범하는 패륜도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 연산군은 폐위된 임금이라 능이 아닌 왕자 묘 형식을 따랐다. / 사진:문화재청
운평이 왕의 선택을 받아 대궐로 뽑혀 가면 흥청(興淸)이 된다. 연산군은 경회루 연못가에 비단 장막을 치고 임금의 배용주(龍舟)를 띄워 이들의 노래와 춤을 즐겼다.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에 흥청들을 불러 모아 음탕한 놀이를 벌이기도 했다. 흥청들을 거느리고 탕춘대(북한산)나 두모포(옥수동)로 나들이 가는 것도 소일거리였다. 이때 거사(擧舍)라는 작은방을 들고 따르게 했는데 길에서 마음이 동하면 안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흥청은 나라에서 쌀과 면포로 봉록을 지급했으며, 부모 형제도 상경시켜 집과 전답을 내줬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찍고 아뢰면 왕이 호조에 명하여 강제로 사들이니 성안의 좋은 집들은 그네들 차지가 됐다([연산군일기] 1505년 8월 20일). 또 임금과 동침하면 천과흥청(天科興靑)이라 해 후궁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줬다. 이렇게 되자 세간에는 아들보다 딸을 낳아 흥청으로 출세시키기를 소원했다.

폭군의 미친 색탐은 패륜으로 치달았다. 궁중 잔치에 사대부의 아내들을 불러들이고 미색이 눈에 띄면 구석진 방으로 끌어들여 간통했다. 성종의 후궁 소생이자 배다른 누이 혜신 옹주도 연산군과 잠자리를 가졌다. 부마 임숭재는 춤과 노래, 사냥으로 폭군의 비위를 잘 맞췄는데 자기 아내인 옹주까지 바쳤다. 심지어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도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연산군일기] 1506년 7월 20일).

박씨 부인의 남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일으킨 것은 누이가 죽고 두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1506년 9월 2일). 폭군은 결국 자기 밑에서 호의호식하던 자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반정공신 가운데는 과거 폐주에게 아부하고 충성맹세를 했던 인사들이 수두룩했다. 박원종 또한 연산군이 가장 아꼈던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백성이 등 돌리고 정변 조짐이 무르익자 자기들이 살려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 같아서, 더불어 만날 때가 많지 않도다(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 연산군은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왕이 풀피리 두어 곡조를 불더니 돌연 탄식하며 두어 줄 눈물을 흘렸다. 때아닌 청승에 나인들이 몰래 비웃었는데 장녹수는 임금을 따라 슬피 흐느꼈다. 폭군도, 애첩도 정변을 예감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의리 지킨 폭군의 여자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배우 장진영(연산군 역)과 강성연(장녹수 역)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 사진:시네마서비스
왕이 흥청망청 즐기는 동안 백성들은 비용을 대느라 등골이 휘었다. 도성 사방 100리 이내를 임금 전용 사냥터로 삼는 바람에 광주·양주·고양 등 인근 고을들이 폐지되고 주민들이 몽땅 쫓겨났다. 생업을 잃은 백성들은 떠돌아다니다가 굶어 죽었다. 숭례문과 노량진 사이에 송장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제 폭정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반정이 일어나자 장녹수는 성난 군중 앞으로 끌려갔다. 반정 주역들은 폭정에 고통받은 백성들의 시선을 폭정의 공범이었던 자신들이 아니라 왕의 여자들에게 돌리고자 했다. 망나니 칼이 번뜩이고 장녹수가 쓰러졌다. 사람들은 다퉈 돌멩이를 던졌다. “일국의 고혈이 탕진된 곳”이라며 국부를 겨냥했다. 시신은 금세 돌무더기 속으로 사라졌다.

유학자들은 줄곧 폭군을 미녀와 결부시켰다. 중국 하나라 걸왕은 말희와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노닐다가 망했고, 은나라 주왕은 달기와 포락형(炮烙刑)을 즐기다가 원망을 샀다.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하는 여색이다. 하지만 자기 임금과 마지막까지 운명을 같이하는 것 또한 여인네들이다. 말희는 걸왕과, 달기는 주왕과 최후를 함께했다. 의자왕의 삼천 궁녀는 낙화암에서 몸을 날렸다. 장녹수는 폭군의 죄를 뒤집어쓰고 욕받이로 죽었다. 나라를 기울게 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의리는 지킨 여자들이다.

폐주 연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떠나 두 달 뒤에 숨졌다. 죽기 전에 그는 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소망은 폭군의 아내였으나 덕망이 높았던 폐비 신씨에 의해 이뤄졌다. 이융의 시신은 교동에서 양주(서울 도봉구 방학동)로 옮겨졌고 1537년 신씨가 곁에 묻혔다. 폭군은 수많은 여인을 거쳐 아내의 품으로 돌아갔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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