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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4)] 나라 팔아서 230억원 받은 윤덕영의 ‘벽수산장’ 

친일 대가로 지은 ‘조선 아방궁’ 기둥만 쓸쓸히 

일본에 받은 은사금으로 22년 공사 끝에 옥인동 대저택 완공
“가장 사치한 집”으로 불려… 1966년 화재 뒤 1973년 철거돼


▎1950년 경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윤덕영의 저택인 벽수산장이 성채처럼 솟아 있다. 윤덕영은 이완용·민병석·박제순 등 1910년 8월 경술국치 당시 일제에 협조한 8명의 친일파 중 한 명이다. / 사진:서울 육백년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을 동쪽에 두고 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시장을 하나 만나게 된다. 아직도 재래시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통인시장’이다. 주말이면 인파로 북적대는 시장 골목을 눈요기할 겸 구경하다 보면 시장 끝자락에서 그나마 널찍하면서 한적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명칭은 ‘필운대로’다. 세종대로나 강남대로처럼 넓은 도로는 아니지만, 이 동네 기준으로는 가장 넓은 도로이기에 나름 ‘대로’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들도 비록 좁은 길이기는 하지만, 저마다 이름을 지니고 있다. 군인아파트 방향으로 올라가다 ‘필운대로7길’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런데 빌라 사이 좁은 도로에 낯설지만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대편 빌라 주차장 입구 옆에도 비슷한 형태와 석질의 대문 기둥 같은 것이 보이고, 어떤 것은 빌라의 담벼락에도 박혀 있다.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이고, 왜 이렇게 주변과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며 남아 있는 것일까?

15년 전 처음 이 지역을 답사할 때 가지게 된 궁금증이었다.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옛 신문을 뒤지다 1924년 7월 21일 [동아일보] ‘내동리명물’에서 소개하는 ‘옥인동 송석원’에 대한 설명과 함께 실려 있는 사진을 통해서였다. 옥인동 송석원은 윤덕영의 ‘벽수산장’(碧樹山莊)을 말하는데, 이 물체들은 벽수산장의 정문 기둥이었다.

도로·담벼락에 박혀 있는 정문 기둥들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인근 좁은 골목에서는 벽수산장의 대문 기둥으로 보이는 구조물을 확인할 수 있다. / 사진:이성우
윤덕영은 이완용·민병석·박제순 등 1910년 8월 경술국치 당시 일제에 협조한 8명의 친일파 중 한 명이다. 본관은 해평으로 부친은 증 영돈녕부사 윤철구, 조부는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의정부 의정대신 윤용선이다. 윤덕영은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숙부로서 순정효황후의 부친인 해풍 부원군 윤택영의 형이기도 하다. 윤덕영은 시종원경(侍從院卿)으로 1910년 8월 경술국치 ‘합병조약’ 당시 조약 체결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설에 의하면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조약에 찍을 어새(御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을 때 이를 강제로 빼앗았다고 하는 장본인이다. 윤덕영은 국권 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12일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의 뒤통수가 큰 것에 빗대 ‘대갈대감’이라 빈정댔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38호에는 ‘의 조선귀족령 수자작 훈1등 윤덕영’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귀족령에 의해 윤덕영에게 훈1등 자작의 작위를 부여했음을 공지하고 있다. 같은 관보를 통해 윤택영은 후작, 이완용은 백작, 민병석·박제순·송병준 등도 각각 자작의 작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 10(1873)년생인 윤덕영은 22세 때인 고종 31(1894)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총리대신 비서관, 내부 지방국장, 법무국장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고종 37(1900)년 말에는 황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보는 비서원의 최고 책임자인 비서원경에 올랐다. 1901년에는 도지사 격인 경기도와 황해도 관찰사, 1904년에는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의정부 찬정이 됐으며, 경술국치 당시인 1910년에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 격인 시종원경의 직위에 있었다. 윤덕영이 이렇듯 중요한 관직을 차지한 데는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부 윤용선의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윤용선은 고종 41(1904)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윤덕영은 윤용선의 양손(養孫)이었다. 자식이 없었던 윤용선이 윤덕영의 부친 윤철구를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종 2(1851)년생인 윤철구는 고종 17(1880)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윤용선은 52세, 윤덕영 본인은 8세였을 때이므로 어린 윤덕영은 조부인 윤용선의 슬하에서 자랐다.

1926년 5월 31일 자 [조선일보] ‘불국귀족(佛國貴族)의 저택설계로 조선 한양에 아방궁(阿房宮) 건축’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윤덕영의 조부였던 의정대신 윤용선 생전에는 재산도 상당했으나, 조부 사후 가산을 탕진해 지금의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에 있었던 누동궁(樓洞宮) 이해승의 집 사랑채에서 약 3년 동안 더부살이 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덕영이 누동궁 사랑채에서 살았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부 윤용선이 사망한 날짜가 1904년 12월 21일이기 때문에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최소한 1905년 이후부터 1908년 사이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어쩌다 부잣집 손자였던 윤덕영이 남의 집 사랑채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했을까?

윤덕영의 초기 거주지가 어디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22일 자 ‘굉대가역’(宏大家役) 제하의 기사에는 “명동에 거주하는 윤덕영이 양옥을 짓기 위해 주변 가옥 수십 채를 매입 훼철하고”라고 해 1905년에는 명동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1906년 초 재산상에 큰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월 14일 자 ‘윤씨졸곤’(尹氏猝困)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윤덕영이 거액의 빚을 져 소유하던 논밭뿐 아니라 살고 있던 집에서도 나왔는데, 곤란이 막심하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 무렵 누동궁에서 더부살이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 1906년 12월 조카인 순정효 황후 윤씨가 황태자비 신분으로 순종의 계비로 책봉된 이후 윤덕영은 외척의 신분으로 황후궁 대부로 재임하면서 권세도 재정 여건도 급물살을 탔다.

1926년 5월 31일 자 [조선일보]에는 “1905년 겨울 윤 자작의 수양부(收養父)인 이용복의 주선으로 벽동에 있는 큰 저택을 나라에서 사제(賜第)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906년 12월 15일 자 [황성신문] ‘민씨이가’(閔氏移家) 제하의 기사에는 “북서 벽동부장(碧洞副將) 민병석 씨의 가사를 고 의정 운용선 씨의 장손 덕영 씨가 일백십이만 냥에 매수했는데”라고 하고 있어 윤덕영이 황실로부터 큰 저택을 하사받았거나, 아니면 민병석의 집을 매입했다거나 하는 등의 반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성신문] 1906년 12월 15일 자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어 민병석이 남문 외 연화봉 산정으로 옮긴다”라고 하고 있어 기사 내용으로 본다면 벽동의 민병석 집을 윤덕영이 매입한 것에 무게가 더 실린다. 만일 민병석의 집터를 매입했다면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이 당시 이미 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부살이하다 외척 돼 권력·재력 손에 넣어


▎벽수산장은 프랑스 귀족의 별장 설계도를 토대로 지어졌다.
윤덕영은 1910년 이후부터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1912년에 작성된 ‘경성부 북부 옥인동 토지조사서’에 의하면 8개 지번의 지적 면적이 1만283평이었으며, 1917년에 작성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을 보면 지번 21개소의 지적 면적이 1만6628평으로 그 사이 6000평 이상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만3583평의 49.5%다. 1927년에는 더욱 증가한 33개소 지번에 1만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만6361.8평의 53.5%를 소유했다.

윤덕영이 1910년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매입한 비용의 출처는 아무래도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은사금은 자작의 경우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윤덕영은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1910년 당시 1원이 지금의 5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 46만원은 230억원 정도로 환산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1926년 5월 31일 자 [조선일보] ‘조선 한양에 아방궁 건축’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경술국치 당시 황제의 어보가 어떤 연유로 윤 자작의 집에 약 열흘 동안 유하게 됐는데 다른 공로도 있지만, 귀중한 어보를 잘 간수하느라고 애를 쓴 공로로 46만원의 공채증권이 내리게 됐다”라고 하고 있다.

윤덕영에게는 귀중한 어새 간수의 공로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공로도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15배가 넘는 은사공채를 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공로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 번째 공로는 이완용도 관철하지 못했던 ‘순종의 일본 천황 알현’을 윤덕영이 해낸 것이다. 이는 곤도 시로스케의 저서 [대한제국 황실 비사]에 언급돼 있다. 윤덕영은 여러 수단을 동원해 고종을 압박함으로써 순종 황제로 하여금 일본 천황을 알현하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일제가 순종의 일본 방문에 그토록 집착한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인을 왜구라고 비하하는 한국인의 전통적 문화 우월감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임금이 직접 중국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본 천황을 알현한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 천황 알현토록 순종 황제 압박


▎벽수산장은 1966년 4월 5일 지붕을 고치다 실화(失火)로 2층과 3층이 전소하면서 건물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렇다면 윤덕영은 왜 이토록 많은 돈을 쏟아 부어가며 땅 매입에 집착했으며, 한양 도성 내 많은 장소 중 옥인동 지역을 선택했을까? 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윤덕영이 원래 이재(理財)에 밝았다는 점을 한 가지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옛 자료들을 살펴보면 윤덕영의 성정이 그리 어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1년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탐학(貪虐)을 이유로 황해도민 27명으로부터 제소됐는가 하면 1905년 1월 인재 양성을 위한 법학교를 빙자해 15만원에 교사 건물을 구입했다가 6개월여 만에 30만원을 받고 팔아 버리면서 학교마저 폐교해 버리는 등 차익만 남겼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가산을 탕진하고 누동궁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 재력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옥인동 이외에도 여러 곳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있었던 강루정 지역도 그중의 하나였다. 해평 윤씨 종중에는 지금도 윤덕영의 옛 부동산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문의 전화가 온다고 한다.

윤덕영이 매입한 옥인동 47번지 일대는 과거 ‘송석원’(松石園)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계곡을 이루면서 이곳을 지나갔으며,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많은 양반과 중인이 찾았다. 이 계곡 일대를 옥계(玉溪), 즉 옥류동 계곡이라 하는데 특히 이 옥계에는 위항시인(委巷詩人)이었던 천수경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살았다.

시를 짓고 즐기기 위해 모인 이들은 천수경의 집 근처인 옥계에서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이 시사의 좌장 격인 사람은 천수경이었고, 이름을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송석원시사는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큰 백일장을 열었으며, 흥선대원군도 송석원을 찾아 청한(淸閑)의 시간을 즐겼다고 한다. 송석원시사의 부흥을 계기로 이 일대의 지명은 옥계 대신 송석원이라 불리게 됐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창의문에서 경복궁 지하철역을 연하는 지역인 종로구 통의동·효자동·창성동에 걸쳐 있던 마을을 장동이라고 불렀는데, 장동에는 조선 후기 명문 세가인 안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다 보니 안동 김씨는 장동 김씨로도 불렸다. 그 중 옥류동에 터를 잡은 장동 김 씨는 김수항이었다. 숙종 9(1683)년 김수항은 옥류동에 육청헌이라는 집을 지었으며, 3년 후인 숙종 12(1686)년에는 육청헌의 후원에 청휘각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육청헌과 청휘각은 일찍 죽은 동생들과 사약 받은 형을 대신해 문곡의 넷째 아들인 김창업이 물려받았다. 이후 장동 김 씨 가문 소유로 대를 이어 전해져오다 신흥 권문세가로 자리 잡은 여흥 민씨 가문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다 1904년 11월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면서 송석원 일대는 해평 윤씨 가문의 소유가 됐다. 물론 그사이 몇 년 동안 송석원 일대는 각도 군물 조사위원이라고 확인되는 고제익이나 무관 출신의 양성환 등 한두 사람이 소유한 적도 있으나, 제대로 거주할 주인을 찾은 것은 1910년 말부터로 그 주인이 윤덕영이었다.

송석원 지역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했던 곳이었던 것 같다. 송석원의 지리적 환경이나 자연경관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윤덕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의 동생 윤택영은 ‘채무대왕’으로 불리며 채권자를 피해 북경으로 도피했다가 1935년 가을 이국땅에서 사망했지만 윤덕영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이곳저곳에 많은 부동산을 매입했으며, 옥인동의 땅도 늘려나갔다.

윤덕영은 자신의 소유 옥인동 대지에 새로운 집을 지을 궁리를 하던 중 프랑스 공사를 지낸 절친 민영찬이 유럽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가졌다는 말을 듣자 민 씨를 채근해 설계도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그 설계도의 건물을 옥인동 대지에 지은 것이다. 저택 건설 공사는 1913년부터 시작돼 3년 만인 1917년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건평 795평짜리 뾰족 지붕의 벽수산장 건물이 완공됐다고 전해지지만, 내부공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명물 아방궁 조선 제일 사치한 집’이라는 부제의 [동아일보] 1921년 7월 27일 자 기사는 “공사 시작 10년이 넘었고 공사비도 30만원 이상인데 아직도 준공되지 못했다” 하면서 해외의 비싼 자재를 들여 짓게 하느라 많은 건축업자가 파산하고 재판도 여러 번 했다고 전한다.

이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35년 윤덕영의 야심작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아방궁 벽수산장’은 최종 완성됐다. 하지만 윤덕영은 벽수산장을 곧 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에 임대했고 정작 자신은 벽수산장 뒤쪽에 따로 마련한 가옥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부살이하다 외척 돼 권력·재력 손에 넣어


▎2010년경 공개된 윤덕영의 생전 모습. 사진 위쪽 바위에 김정희의 ‘송석원’ 글씨와 윤용구의 ‘벽수산장’ 글씨가 나란히 보인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윤덕영은 1910년 이후부터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1912년에 작성된 ‘경성부 북부 옥인동 토지조사서’에 의하면 8개 지번의 지적 면적이 1만283평이었으며, 1917년에 작성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을 보면 지번 21개소의 지적 면적이 1만6628평으로 그 사이 6000평 이상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만3583평의 49.5%다. 1927년에는 더욱 증가한 33개소 지번에 1만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만6361.8평의 53.5%를 소유했다.

윤덕영이 1910년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매입한 비용의 출처는 아무래도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은사금은 자작의 경우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윤덕영은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1910년 당시 1원이 지금의 5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 46만원은 230억원 정도로 환산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1926년 5월 31일 자 [조선일보] ‘조선 한양에 아방궁 건축’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경술국치 당시 황제의 어보가 어떤 연유로 윤 자작의 집에 약 열흘 동안 유하게 됐는데 다른 공로도 있지만, 귀중한 어보를 잘 간수하느라고 애를 쓴 공로로 46만원의 공채증권이 내리게 됐다”라고 하고 있다.

윤덕영에게는 귀중한 어새 간수의 공로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공로도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15배가 넘는 은사공채를 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공로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 번째 공로는 이완용도 관철하지 못했던 ‘순종의 일본 천황 알현’을 윤덕영이 해낸 것이다. 이는 곤도 시로스케의 저서 [대한제국 황실 비사]에 언급돼 있다. 윤덕영은 여러 수단을 동원해 고종을 압박함으로써 순종 황제로 하여금 일본 천황을 알현하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일제가 순종의 일본 방문에 그토록 집착한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인을 왜구라고 비하하는 한국인의 전통적 문화 우월감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임금이 직접 중국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본 천황을 알현한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윤덕영 생전 사진에 ‘벽수산장’ 각자 눈에 띄어


▎옥류동 각자는 2019년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등록됐다. / 사진:이성우
‘서울 육백년’에도 송석원 각자 사진을 싣고 있는데 김영상 선생이 1950년대 후반 촬영한 것이다. 각자의 왼쪽에는 ‘정축청화월소봉래서’라는 작은 각자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화’란 음력 4월의 다른 이름이며, ‘소봉래’란 김정희의 많은 호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를 통해 송석원 각자가 추사의 나이 32세 되던 해인 순조 17(1817)년 4월에 새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양정석각소기서후몽김공정기후’에는 ‘벽수산장’과 ‘송석원’ 각자 이외에도 김수항의 6세손인 김수근의 글씨라는 ‘구대’(龜臺)와 ‘옥류동’(玉旒洞)이라는 각자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면서 옥류동 각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한다’라고 해 110년 전부터 전해져 오는 얘기였음을 알 수 있다. 지인인 장동 김 씨 후손이 ‘김상이옥류동삼자각지’라는 퇴헌 전극태의 ‘퇴헌일기’ 중 ‘낙중일기’의 기록을 보내오면서 옥류동 각자는 퇴우당 김수흥의 글씨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전극태도 우암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김상이옥류동삼자각지’는 청음 김상헌의 손자로 김상, 즉 영의정이던 김수흥이 옥류동 세 글자를 새겼다는 뜻이기에 송시열의 글씨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2019년 2월 12일 각 언론에서는 위 네 개의 각자 중 사진으로만 남아 있던 김영상 선생이 찍은 옥류동 각자가 60년 만에 재발견됐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필자도 2006년 당시부터 이곳을 답사한 적이 있으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관계로 집 안까지 들어가 볼 수 없어 찾지 못했다. 그러다 옥인동 일대가 재개발 사업 구역으로 지정된 후 주민들의 이주로 빈집이 많이 생겨나면서 언론 보도보다 빨리 옥류동 각자를 촬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글씨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각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옥류동 각자는 2019년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등록됐다. 옥인동 재개발 사업은 이 지역의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민들이나 시민단체, 전문가들의 반대로 사업이 추진되지 못해 시일을 끌다가 결국 2018년 3월 정비구역에서 해제됐고, 같은 해 11월 역사문화형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그동안 많은 유적이 훼손되고 사라졌지만, 서촌 지역에는 아직도 옥류동 각자, 송석원, 벽수산장, 청휘각 터와 같이 발굴해야 할 유적들도 많이 남아있다. 개발만이 능사는 아니다. 역사 유적에 대해 조사한 후 필요한 곳은 보존하고 관리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역사를 이어나가야 하는 우리의 소명이자 역할이 아닐까 싶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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