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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9)] 스승 류성룡 이어 퇴계학 지평 넓힌 우복(愚伏) 정경세 

학파·당파 초월한 소통, 경계를 허물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전투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남다른 포용력으로 퇴계·율곡학파, 서인·남인 화합 이끌어내


▎정춘목 종손이 우복 종가 사랑채 산수헌에서 종가 내력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임진년(1592)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해 매복을 설치하고 싸워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러다가 왜적 대부대와 갑작스레 맞닥뜨려 선생은 화살을 맞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이부인(李夫人)과 동생 흥세(興世)는 왜적에게 살해당했다. 조정은 그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것을 가상히 여겨 예조 좌랑으로 승진시켜 제수했다.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절히 사양했다. 그리고 양호(兩湖) 지방으로 달려가 군량을 모아 왜적을 치고 복수하는 일에 급급했다.”

우암 송시열이 임금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는 시장(諡狀)의 일부다. 노론의 영수 우암이 시호를 요청한 인물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선생이었다. 그는 24세에 알성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에 나아가 사가독서하는 등 일찌감치 인재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경세는 정여립 옥사가 일어나자 사람을 잘못 천거한 죄로 하옥된다. 그는 사면 뒤 낙향하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한다. 2년 뒤엔 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30세 문관 정경세는 무예를 익힌 것이 없었지만 전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의기 하나로 결사 항전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비규환 전장에 어머니와 동생은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그때부터 일본은 우복의 골수에 원수로 박혔다. 조선의 신진 관료가 온몸으로 보여 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10월 17일 선생의 흔적을 찾아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우복 종가를 찾았다. 벼가 익은 들녘 끝 우산(愚山) 자락 종가에서 정춘목 주손을 만났다. 집을 지키며 농사와 태양광발전소를 운영하는 50대 종손이다. 이야기는 전투 직후 조정의 승진 인사에 정경세가 올린 상소로 이어졌다. “왜적을 쳐서 참획한 공로는 모두 김광복 등 몇 사람이 세웠고, 신은 털끝만치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신이 그대로 관직을 받아들이면 이는 부모 형제의 시신을 팔아 자신의 몸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복의 겸손한 인품이 느껴지는 글이다. 주손은 “선비라면 누구나 그렇게 공을 낮추지 않았겠느냐”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정경세는 결국 승진 대신 사직을 택했다.

위기마다 우산(愚山)에서 저술하고 가르쳐


정경세는 임진왜란을 수습한 서애 류성룡을 일찍부터 지극히 따른 제자였다. 그는 18세에 상주 목사로 부임한 서애를 찾아가 제자로서 예를 올리고 학업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서애는 그런 정경세를 보고 바로 학문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우복은 그 가르침을 받아 마음속에 간직하고 평생 잊지 않았다. 서애는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서 물려받은 [주자서절요]를 정경세에게 물려준다. 주자의 편지글을 뽑아 퇴계가 편찬한 책이다. 서애가 그 책을 정경세에게 물려준 것은 정경세를 고제(高弟)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퇴계학은 그렇게 서애를 통해 정경세로 이어지는 갈래가 만들어진다. 퇴계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한 정경세는 [주자대전]의 봉사(封事)·서(序) 등을 담은 [주문작해(朱文酌海)]를 편찬한다. 우복은 그때부터 퇴계의 [주자서절요]와 자신이 정리한 [주문작해]를 간행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퇴계학은 상주지역으로 확산한다.

우복 종가의 사랑방을 나왔다. 처마에 ‘산수헌(山水軒)’ 편액이 보였다. 선생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 들러 예를 표한 뒤 주손을 따라 종가의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고요한 숲속에 작은 초가 한 채와 그 뒤로 우뚝한 누각이 나타났다. 초가는 계정(溪亭), 단층과 2층 누각을 이은 건물은 대산루(對山樓)라 불리었다. 일대가 우북산(于北山) 또는 우산(愚山)이다. 정경세의 우복(愚伏)이란 자호도 산 이름에서 음을 취해 겸양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대산루는 우복의 6대손 입재 정종로가 중창했다. 이곳은 1601년 우복이 정인홍의 탄핵으로 세상일에 뜻을 잃었을 때 찾아낸 의지처였다. 이듬해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산장으로 들어온다. 1603년엔 계정을 지어 저술하고 문인들을 가르쳤다.

장서와 독서, 접객 공간인 대산루 2층으로 올라갔다.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 넉넉했다. 누각 옆 작은 계곡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정에 청간정(廳澗亭)이란 별칭이 붙은 게 우연이 아니다. 주손은 “(선생의) 제자는 비슷한 시기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었던 여헌 장현광 선생과 많이 겹친다”고 소개했다. 서애의 아들 류진이 대표적이다. 우복은 류진을 상주에 정착시키며 가르쳤고, 여헌도 그를 가르쳤다.

광해군 향해 “잘난 체 해서야” 직언 상소


▎우복 종가 오른편에 위치한 대산루. 초가인 계정과 함께 정경세가 독서하고 강학하던 공간이다. / 사진:송의호
계정에서 산속으로 난 길을 200m쯤 더 들어가자 도존당(道存堂)이 나타났다. 우복을 배향했다가 대원군 시기 훼철된 우산서원(愚山書院)의 강당이다. 세월 앞에 상전벽해가 됐다. 주손은 “서원 사당은 복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602년 우복은 상주 율리에 13개 문중과 손을 잡고 기금을 염출해 위급한 환자를 구제하는 약방 형태 의국(醫局)을 설치한다. 우복 종가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이다. 존애원에는 그 분위기를 살려 처마에 약봉지가 여럿 매달려 있었다.

존애원이 있는 율리는 우복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존애원 인근 산자락에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1604년 우복은 부호군으로 임명된 뒤 이듬해 상주에 서원 창건을 제의한다. “우리나라 도학은 포은 정몽주가 창시하고 퇴계 이황이 집대성했으며, 그 사이에 한훤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등 여러 선생이 일어났다. 이들 모두 영남 땅 수백 리 안에서 일어났으며, 상주는 영남 상류 지역에 있다.” 그는 제생(諸生)과 상의한 뒤 낙동강 변에 서원을 세우고 5현을 합사한다. 도남서원(道南書院)이다. 우복은 상량문에 “후세 학자들에게 도통(道統)의 정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그 뒤 정권 실세 정인홍이 학맥을 달리하는 회재와 퇴계를 헐뜯는 상소를 올린다. 우복은 “화를 낼 가치조차 없다”며 이를 무시해 버린다. 그는 다시 탄핵을 당한다.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구부사 우복은 검소와 공평을 청하는 쓴소리 상소를 올린다. “전하께서 스스로 안일하게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잘난 체해서야 되겠습니까.” 거침없는 직언이다. 광해군은 상소를 다 보기도 전에 불살라버릴 것을 명한다. 이항복 등이 나서서 충언이라고 변론하면서 직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그쳤다.

1612년 우복은 김직재 옥사 사건에 휘말려 구속된다. 수사관이 집안을 뒤져 서찰 등을 압류하자 광해군이 일일이 그 내용을 살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서찰은 임금을 언급한 곳마다 모두 존대하고 있었다. 함께 체포된 맏아들을 심문하니 “신의 아비는 충효 두 가지만 가르쳤다”고 답했다. 이 사건은 오히려 광해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1623년 우복이 회갑을 맞은 해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서인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사림의 여망을 무시할 수 없어 남인 우복을 중용한다. 인조는 학덕을 익히 듣고 있던 우복에 호의적이었다. 임금은 그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발탁한다. 이때 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의 호칭 문제가 제기된다. 예학을 천착한 우복은 인조와 정원군은 부자(父子) 관계지만 일반적인 부자 관계로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설을 주장해 관철했다. 인조 4년 이번엔 인조의 생모(生母)를 둘러싼 상복 논의가 일어난다. 이귀·최명길 등은 임금도 아들인 만큼 상주로서 삼년복을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경세와 김장생 등은 1년짜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경쟁 세력 기호학파 좌장 김장생과 깊은 교유


▎상주박물관에 마련된 도남서원 코너. 도남서원은 정경세의 발의로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등 영남 출신 도학자 5명을 모신 서원이다. / 사진:송의호
사계 김장생이 우복과 같은 주장을 펼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계는 율곡 이이를 잇는 기호학파의 사실상 좌장이었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남인과 서인은 경쟁과 대립의 양대 세력이었다. 퇴계학을 계승한 우복은 이 구도를 바꾸고 싶어 소통을 시도한다. 그는 오윤겸·정엽을 통해 율곡과 우계 성혼에 대한 인식을 수정하고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했다. “빌려 온 <가례고증> 3책은 바쁜 탓에 미처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복이 사계에게 쓴 편지에는 당시 서책을 주고받은 열린 분위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1623년 뜻밖의 혼인이 성사된다. 사계의 고제(高弟) 동춘당 송준길이 영남학파 우복의 둘째 사위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사이에는 더 든든한 소통의 다리가 놓였다. 회덕 출신 송준길은 처가 상주에서 10년을 보내며 제자를 기른다. 그 뒤 상주에는 노론 송준길을 기리는 흥암서원(興巖書院)이 들어서 대원군 시절에도 훼철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춘당은 후일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다. 송준길은 우복이 세상을 뜨자 일대기에 가까운 장장 60쪽(국역 우복집) 분량 행장(行狀)을 짓고, 또 연보를 만들었다. 이번 기사를 쓰면서 정선용이 옮긴 그 행장을 많이 참고했다.

혼인의 인연이 궁금했다. 주손이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한번은 우복이 사계를 찾아갔다. 사계는 우복에게 혼기에 든 딸이 있다는 걸 알고 “저쪽 방을 가보라”며 제자들이 공부하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 송시열·이유태·송준길이 있으니 그중 한 사람을 사윗감으로 고르라는 뜻이었다. 우복이 다가가 방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반듯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송준길이었다. 우복과 사계는 이렇게 교분이 각별했고, 그런 바탕 위에 두 사람은 예설(禮說)과 경의(經義)를 자주 논의했다. 사계는 우복을 두고 “예학이 퇴계보다 나아 오늘날 더불어 예를 논할 만한 사람은 오직 우복 한 사람밖에 없다”고 과한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우복은 사계뿐만 아니라 서인 계열인 이덕형·최명길·장유 등과도 폭넓게 교유했다. 또 사위 동춘당은 우복의 학문을 접하면서 기호학파에서 누구보다 먼저 퇴계학을 체득하고 퇴계를 흠모하게 된다. 동춘당은 꿈에 퇴계가 나타나 그 감회를 ‘기몽(記夢)’이란 시로 남길 정도였다. 그때부터 기호 학파도 퇴계 학설을 받아들이고 새로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우복은 이처럼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남인과 서인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송준길과 더불어 양송(兩宋)으로 불린 노론 송시열이 훗날 당파를 초월해 우복의 시장(諡狀)을 쓴 것도 그런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복은 인조를 모신 마지막 10년은 임금의 덕을 채우는데 힘썼다. 그는 임금을 대할 때마다 재계(齋戒)한 뒤 시정의 잘잘못과 민생의 기쁨 등을 경전에서 인용해 간곡히 전했다. 인조는 그때마다 주의 깊게 들으면서 우복을 스승의 예로 대우했다. 인조는 정경세에게 홍문관 부제학을 시작으로 의정부 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겸 대제학 등의 자리를 내렸다.

도남서원을 거쳐 4㎞ 떨어진 사벌면 상주박물관에 들렀다. 전시실 한곳에 선생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벼루와 시호 교지, 호패 등이 진열돼 있었다. 종가는 1998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내려오던 서책을 맡겼고, 목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우복은 평생 주자(朱子)의 글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건망증으로 자주 쓰는 물건이나 자식들 이름까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말이 주자에 미치면 정신이 맑아지며 몇 줄의 글을 들고 그 뜻을 자세히 논했을 정도였다.

서울에 집 한 채 없고 고향에는 논밭 없어


▎정경세의 상아 호패. 출생연도와 과거 급제자 신분이 새겨져 있다. / 사진:상주박물관
그는 화려한 의복이나 장신구, 재산이나 가업 등에 무관심해 40년을 주요 벼슬에 있었지만, 서울에 집 한 채 없고 시골에는 전지(田地)가 없을 정도였다. 좋아한 것은 오직 아름다운 산수(山水)였다. 자손들이 재산을 나누어 분가한 집성촌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복은 이조판서 시절 외사촌과 매부가 벼슬을 간절히 구했으나 끝내 그들의 뒤를 봐주지 않았다. 누군가가 사실인가 싶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난들 어찌 그들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마는, 저 두 사람은 모두 백집사(百執事,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 관리)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앞세워 벼슬자리를 가벼이 하겠는가.”

우복은 50여 년을 한결같이 정도를 걸어간 관료였다. 그러면서 예학 등의 일가를 이룬 학자이기도 했다. 벼슬로 나아가기 전 스승으로 모신 서애는 큰 길잡이가 됐다. 신진 관료 시절에는 직필과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고초를 겪을 때는 고향으로 내려와 의료시설 등 백성이 절실한 일을 도모하고, 또 산속에 묻혀 독서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그는 나랏일 가운데도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퇴계학을 바탕으로 기호학과 소통하는 열린 학문을 추구했다. 특히 반대편을 인정하는 그의 남다른 포용력은 경쟁과 대립을 누그러뜨리는 촉매 역할을 했다. 여야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기만 하는 시대, 우복의 소통이 돋보이는 까닭이다.

[박스기사] 아들 잃은 고통 겪은 우복, 나라부터 생각해 시무책 건의 - 간언 무시한 인조는 9년 뒤 병자호란 치욕 겪어

우복 정경세는 두 아들이 모두 자신에 앞서 요절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는 63세에 큰아들을 잃었고 이듬해 둘째 아들이 죽었다. 우복은 둘째 아들 장사를 치르려 가솔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다. 정묘호란이다. 1627년 후금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구실로 쳐들어온 것이다. 백성들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복은 조정으로 되돌아가 호소사(號召使)로 군사를 모집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고 두 달 뒤 화의가 성립됐다. 전쟁이 중단된 뒤 대사헌 우복은 나라의 앞날을 경계하는 시무책을 올린다.

“예로부터 비상한 변고를 만난 임금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세운 다음에야 능히 쇠망한 것을 부흥시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아 마침내 비상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 쓰러진 것을 답습하며 자강(自强)하지 못하면 끝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화란은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서쪽 지방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짓밟혀 결딴이 났습니다.

심지어 전하는 몽진을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옛 도읍으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위태로움을 모르고 편안히 지낼 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섬으로 피란 간 수치를 어떻게 씻을 것이며, 위협으로 맹약한 치욕을 어떻게 지울 것이며, 짐승 같은 무리와 맺은 화의를 어떻게 믿고 지낼 것인가’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나 깨나 오로지 수치를 씻고 분을 풀겠다는 데만 생각을 두시고 털끝만큼도 무사안일을 탐하는 마음을 그 가운데 섞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비록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지 못한다 해도, 뒷날 적이 침입해 오는 것을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러한 때 자강 계책을 마련하지 않아 뒷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게 되면 군신 상하가 잇달아 죽임을 당하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며, 요행히 죽지 않는다고 해도 굴욕을 당함이 장차 열 배는 더할 것입니다.”

그리고 9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인조가 당한 치욕은 우복이 내다본 그대로였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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