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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12)] 아트테이너 김규리의 화원정담(畵園情談) 

스크린 대신 한지 위에 붓과 먹으로 그려낸 인생의 길 

잘나가던 영화배우에서 그림 소질 찾은 후 화가로 새길
소재 가리지 않는 파격적 시도, 동양화 매력 알리며 호평


▎배우에서 동양화가로 변신한 김규리는 소재를 가리지 않는 파격과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고 있다. / 사진 : 조정화(JOA)
"영화 [미인도] 때문에 한국화를 배우게 되었고, 그림을 통해 마음공부를 하면서 즐거운 날보다 어렵고 힘든 날, 붓을 더 많이 잡았어요.” 배우이자 화가 김규리의 말이다. 아트테이너(Art+Entertainer) 김규리는 1997년 패션지 [휘가로]의 표지 모델로 데뷔한 뒤, 공포영화 [여고괴담]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2008년 영화 [미인도]에서 조선시대 대표 풍속화가인 혜원 신윤복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한국화를 배우면서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한국화를 기반으로 한 평면 작업 외에도, 달항아리 부조와 자신의 입체 흉상에 자개를 붙이는 등 다양한 재료와 방법을 거침없이 시도한다. 다시 말해, 김규리의 그림은 민화나 전통 한국화에 국한되지 않고, 한지·캔버스·메모지뿐 아니라 심지어 화장지나 냅킨까지 소재를 가리지 않는다. 먹과 아크릴을 주로 사용하지만, 붓 펜이나 사인펜을 이용하기도 하고, 흙이나 금가루 등을 사용하며 파격도 서슴지 않는다. 네 차례의 개인전과 여러 번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중·대형 작품들을 선보였다.

김규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호랑이’ 시리즈는 한국화의 대중화를 위해 김홍도미술관에서 개최된 [수호전]을 통해 알려졌다.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서 각종 민화와 전래동화에 이르기까지 친숙하면서도 영물(靈物)로 꼽히는 호랑이를 동서남북의 ‘수호’적 의미로 풀어내 사실적이면서 정감 있게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특히, 파란 눈이 인상적인 흑호 ‘산군이’는 용맹함을 갖춘 민족의 표상을 잘 끌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영화 '미인도' 신윤복 역할 맡으며 한국화에 눈떠


▎김규리의 작품 [산군이]는 호랑이의 용맹함과 우리 민족적 기상을 훌륭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으로 꼽힌다. / 사진:김규리
한국화를 그리게 되면서 한옥에 살고 싶어 북촌에 한옥 작업실을 마련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갤러리 ‘혜우원’으로 개방하면서 2021년 첫 개인전 [길]을 개최했다. 새로운 ‘길’을 응원해 달라는 마음을 담은 전시였다. 이후에도 [비우다 공(空)](2022, 국회 아트갤러리), [수호전](2022, 안산 김홍도 미술관), [쉼표](2023, 갤러리 한옥) 등 개인전을 꾸준히 열었다. 2021년 아트센터 일백헌에서 개최한 [신 문자도]와 오산시립미술관에서 연 [3월의 3인]전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을 때에도 반응은 뜨거웠다. 잘 알려진 연예인이라는 플러스 요인도 있겠지만, 타고난 재능과 감각으로 주제의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이 작품 안에 배어 있는 점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장 최근 전시는 얼마 전 갤러리 ‘한옥’에서 있었다. 갤러리 한옥의 관장이자,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 교수이며, 대학에 불교미술학과를 창설한 원로 미술 사학자 문명대 교수는 “이번 전시를 보고 전문 작가 못지않은 경지에 다들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극 정성으로 자신의 역량을 쏟으면 경지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을 김규리 작가를 보고 느꼈다. 한국화의 수준 높은 작품에 준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고 극찬했다.

2008년 그림을 시작했으니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떤 배우, 어떤 작가로 남겨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오늘을 살아내는 자기 삶의 태도라고 말하는 김규리는 한지에 수묵 채색한 [비우다 공(空)] 시리즈의 어둡고 밝음, 비움과 채움의 산수를 통해 ‘무엇이 보이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은혜가 비처럼 내린다’는 승효상 건축가의 ‘혜우원’ 현판이 걸린 한옥 마당에서 봄 새싹을 만지며, 그림은 숨을 쉬게 하는 자연과 같다던 모습이 생생하다. 햇볕이 잘 드는 한옥 누각에 앉아 그동안의 작품 세계를 들었다.

배우로서의 첫 시작이 궁금하다.


▎한지에 수묵으로 채색한 [비우다 공(空)]은 먹의 농담과 여백을 활용해 동양화의 오묘한 매력을 수려하게 표현했다. / 사진:김규리
“어릴 때 산이나 냇가에서 뛰놀아 TV를 잘 보지도 않았고, 수업시간에 책 읽기를 시키면 책을 못 읽을 정도로 부끄럼도 많고, 소심한 성격이라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방송 쪽에서 일하는 언니를 따라 미용실을 갔다가 원장님 제안으로 잡지사와 미팅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휘가로] 잡지 표지를 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힘들어도 도망가진 말자’ 다짐하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KBS 미니시리즈 [학교] 오디션을 볼 때 장혁씨와 안재모씨가 있었다. 두 사람 덕분이지 않을까 싶은데, 합격해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잡지 모델과 TV 드라마 외에도 영화도 했다. 대표 작품은?

“모두 아끼는 작품들이라 손꼽기 어렵다. 영화는 [여고괴담]이 주인공으로 처음 서게 된 작품이자 영화 데뷔작이다. 25살 때 임권택 감독님하고 [하류인생]을 하기 직전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이후 오랜 기간 많이 힘들었지만, 배운 게 많다. 이를테면, 전에는 웃을 때도 어떻게 해야 예쁘게 보일지 고민했다면, 내가 즐거워 웃으면 주변 사람도 같이 즐거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영화 [미인도]는 그때 선택한 작품이다. 내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존감을 올리는 데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에 잊지 못할 작품이다.”

잡지 표지모델로 데뷔해 스크린에서 주·조연 활약


▎임옥상 작가와 김규리의 컬래버레이션 작품. [신문자도] / 사진:김규리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영화 [미인도]를 하게 되면서, 화가 신윤복 역할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영화 들어가기 한 달 전부터 한국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려주는 대역이 있었지만, 붓을 잡고 그리는 촬영을 커트별로 하는데 풀샷은 직접 했다. 영화 촬영할 때만큼이라도 손에서 붓을 놓지 말자고 생각해 늘 붓을 들고 다니면서 대본에도 그리고, 촬영 반사판에도 그리고 온갖 것에 그렸는데, 아직도 그 버릇이 있다. 그때 부채에 그림을 그려 스태프에게도 주고, 전윤수 감독님께도 드렸는데 아직도 가지고 계신다고 한다. 살면서 좋은 인연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이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때 붓과 한지, 먹에 대한 재미를 알게 됐다.”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 ‘한국화’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직 공부하는 단계라 많이 부끄럽지만, 한국화의 성질과 나의 기질이 잘 맞았다. 한국화는 물의 번짐으로 그려낸다. 긴 붓에 물을 먹이고, 먹의 농담 조절로 표현해야 하는데, 오랜 기간 숙달이 돼도 쉽지 않다. 한지는 물에 가장 예민한 종이다. 먹은 분명 단색인데도 그 안에서 명암의 색이 다 달라지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손이 흔들려 그릴 수 없게 된다. 한국화는 빠르고 쉬운 것보다, 천천히 가는 데에서 오는 미학들이 있다. 한국화는 비움이자 철학이다. 그런 점들이 좋아 시작했지만, 하나의 장르만 고집하고 싶진 않다.”

‘혜우원’ 한옥 건물이 참 예쁘다. 이곳에서 2021년 [길]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었나.

“자발적으로 한 첫 전시이자 첫 개인전이었다. 그동안 그룹 전시뿐 아니라, 미술관 도슨트부터 오디오 가이드 등등 미술과 관련된 일을 많이 했다. 그런 경험들과 지금까지 그렸던 그림들을 모아서, 이런 것들을 좋아할 것 같은 나 같은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만든 게 혜우원의 개인전이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길’이다. 놀이처럼 작가 활동을 시작했는데, 앞으로 걸어가면서 제 길을 찾아서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어쨌든 오산시립미술관에서 제 그림들을 전시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기로 쌓은 풍부한 감성 담은 작품에 관객도 호평


▎태어나서 처음 찍은 김규리의 신생아 때 모습. 이마의 붉은 반점은 지금도 감정 기복의 바로미터라고 한다. / 사진:김규리
그림을 시작하고 좋은 점이 있다면.

“단지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혜우원도 그런 공간 중 하나다. 내 그림을 재밌게 보는 법도 알려 드리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눈다. 지금처럼 그림을 놀이처럼 하다 보면 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잘 놀다가 친구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놀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 아닌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재미있게 놀이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림은 무슨 일을 할 때 더 재미있게 즐기고, 계속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을 갖게 한다. 특히, 정신수양에도 좋고 마음 치유에도 도움이 된다.”

언제 어디서든 붓을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 글도 함께 쓴다고 들었다. 특별히 생각나는 그림이 있나.

“제 그림 중에 [결핍]이라는 작품이 있다. 붓 펜으로 물 튀기는 것까지 물을 비우면서 폭포를 그렸다. 그리고 좋아하는 소나무를 그렸는데 너무 못 그려 덮어 뒀다가, 어느 날 문득 ‘한 번 훼손된 것은 그것이 깡그리 소멸해버린다 해도 영원히 계속하여 훼손당하는 것이다. 하늘은 태양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라고 생각나는 대로 막 썼다. 오산시립미술관 전시 때문에 작품을 선별하다가 오랜만에 봤는데 당시에 얼마나 ‘결핍’이 심했는지 그 그림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폭포에 물이 있는데 앞에 소나무가 메말라 있고, 문득 떠올라 쓴 글이 그림과 너무 절묘해서 이 작품을 [결핍]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전시 중에 바로 팔렸는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하게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어쩜 알아봐 주신 건지도 모르겠다.”

북촌 한옥 갤러리에서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


▎첫번째 개인전 갤러리 혜우원.
갤러리 한옥에서 최근에 전시한 [쉼표] 전은 어떤 작품들로 구성되었나?

“전시관이 크지 않아 흙에다 호랑이 전신을 그린 작품과 한지에 수묵 채색한 그림, 자개를 붙여 만든 나의 입체 형상, 부조 형태의 달항아리들, 기존에 발표했던 작품 중 한옥 공간과 어울리고 ‘쉼표’ 주제와 맞는 그림을 신작과 함께 걸었다. 걸었던 작품 중 암울한 세상이 어둠 속에서 깨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린 [개벽]이란 작품도 반응이 좋았고, [암연]도 많은 분이 좋아했다. 하나의 화면에 반은 어둡고 반은 밝게 표현한 그림이다. 어두운 부분을 칠하려고 먹을 이틀 반이나 갈았다. 먹을 먼저 칠하고 난 다음 나무들을 그려 언뜻 보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아프리카에서 만난 나무도 있고 소나무도 보인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간이 있기 때문에 ‘쉼표’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면?

“태어나 처음으로 찍은 나의 신생아 사진이다. 이승환 오빠가 이 사진을 보더니 왜 크래커 위에 있냐고 했다. 이불인데 사진이 오래돼 색이 변하고 얼룩도 많다. 자세히 보면 내 이마에 커다랗고 빨간 점이 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일어나면 이마가 빨개지니까 선생님들이 맨날 자다 일어났느냐고 하실 정도로 선명했다. 지금도 내가 원하면 나타날 수 있게 할 수 있는데, 춥거나 화가 날 때, 감정의 기복이 있을 때 드러난다. 이 사진을 보면 내가 태어났을 때 이런 모습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사진을 볼 때마다 여러 감정이 든다.”

향후 작업 방향이나 계획은?

“먼 훗날 단청을 하는 게 목표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이 많아서 작업 방향을 아직 못 정했다. 한참 걸어가다 보면 나중에 나만의 길이 오롯이 나 있지 않을까. 열매나 곡식이 익어갈 때는 뜨거운 해를 많이 봐야 한다. 그 해가 너무 뜨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를 익어가게 만들고 더 풍성하게 만들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생의 맛 중에서 단맛만 즐거운 건 아니지 않나. 살아가고 있는 오늘 그 자체가 행복한 거니까 뭐든 간에 즐겁게 하려고 한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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