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유한성 앞에 겸허하지 못한 인류, ‘대량사’의 비극 자초새로운 생(生) 위한 충전(死), 기피 아닌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1993년 9월 24일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이 하버드대학교에서 두 번째 강연을 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박사는 “우리가 희망하고 간절히 바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 강연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 사진:한국SG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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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 24일,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강연을 했습니다(첫 번째 강연은 1991년 9월). 지난해 30주년을 맞은 이 강연을 4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오늘처럼 이렇게 화창한 날, 미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하버드대학교가 2년 전에 이어 다시 한번 초대해 주셔서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야먼 교수와 콕스 교수 그리고 갤브레이스 명예교수를 비롯해 관계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그리스의 철인(哲人)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萬物)은 유전(流轉)한다”(판타레이)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확실히 인간계(人間界)든 자연계든 모든 것은 변화와 변화의 연속이며 한시도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금석(金石)이라 해도 오랜 기간을 놓고 본다면 세월에 따라 작용하는 마멸(磨滅)을 면할 수 없습니다.하물며 인간사회의 놀랄 만한 변화상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일컫는 20세기 말(末)을 살고 있는 우리가 똑같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파노라마와 같습니다.불교(佛敎)의 눈은 이 변화의 실상(實相)을 ‘제행(諸行: 여러 현상)은 무상(無常: 항상 변화)’이라고 포착했습니다. 이것을 우주관에서 말하면 ‘성주괴공(成住壞空)’, 요컨대 하나의 세계가 성립하여 유전하고 붕괴하여 다음의 성립에 이른다고 설합니다.또 이것을 인생관에서 논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 다시 말해 태어나서 살아가는 괴로움, 나이 드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의 유전을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사고, 특히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 생사(生死), 사(死)의 문제는 예로부터 모든 종교나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었습니다.석존이 출가하게 된 동기라고 알려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에피소드나, 철학을 ‘죽음의 학습’이라 한 플라톤의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며, 니치렌(日蓮) 대성인도 “우선 임종(臨終)의 일을 배우고 후에 타사(他事)를 배워야 한다”(어서 1404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20년 전, 이 주제를 중심으로 불세출의 역사가 토인비 박사와 며칠 동안 폭넓게 토론했습니다.
근대 문명에서 죽음은 부정적으로 인식
▎죽음을 두렵고 기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인류의 부정적 인식은 ‘대량사(Megadeath)’의 세기를 불렀다.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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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에게 죽음이 이렇게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죽음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有限性)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한한 ‘부(富)’나 ‘권력’을 손에 넣은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 숙명(宿命)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이 유한성을 자각한 인간은 죽음의 공포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영원성에 참획(參劃)하여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삶의 방식을 넘어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가 인류사와 함께한 이유입니다.그런데 ‘사(死)를 망각한 문명’이라고 일컫는 근대는 이 생사라는 근본과제에서 눈을 돌려 죽음을 오로지 기피해야 할 범죄자와 같은 위치로 몰아세우고 말았습니다. 근대인에게 죽음은 단순한 생의 결여나 공백상태에 지나지 않았고, 생(生)이 선(善)이라면 사는 악(惡), 생은 유(有)이고 사는 무(無), 생이 조리(條理)이고 사는 부조리(不條理), 생이 명(明)이고 사는 암(暗) 등 모든 면에서 죽음은 부정적으로 인식됐습니다.그 결과 현대인은 죽음으로부터 호된 보복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금세기가, 브레진스키 박사가 말한 ‘메가데스(대량사[大量死])의 세기’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를 망각한 문명’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최근 뇌사(腦死)를 비롯해 존엄사, 호스피스, 이상적인 장례식, 또 퀴블러 로스 여사의 ‘임사의학(臨死醫學)’ 연구 등에 보인 높은 관심도는 하나같이 죽음의 의미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현대문명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사(死)를 올바로 이해하는 생사관 확립이 21세기 과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은 죽음은 생과 나란히 전체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이며, ‘생사’ 전체가 하나의 ‘생명’이요 삶의 방식인 ‘문화’라고 설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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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단순히 생의 결여가 아니라, 생과 나란히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 전체는 ‘생명’이며 삶의 방식인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를 응시하고 생명관, 생사관, 문화관을 올바르게 확립하는 것이 곧 21세기 최대의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불교에서는 ‘법성(法性)의 기멸(起滅)’을 설합니다. 법성이란 현상(現象)의 오저(奧底)에 있는 생명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생사 등 모든 사물의 현상은 그 법성이 연(緣)에 닿아 출현하고(기[起]) 소멸하면서(멸[滅]) 유전을 반복한다고 설합니다.따라서 사란 인간이 잠으로 내일을 위한 활력을 비축하듯이 다음에 올 생을 충전하는 기간과 같은 것으로,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생과 마찬가지로 혜택이며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합니다.그러므로 대승불전(大乘佛典)의 정수인 [법화경(法華經)]은 생사가 유전하는 인생의 목적을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법화경 491쪽)이라 하여, 신앙이 투철하면 생도 환희이고 사도 환희이며, 생도 유락이고 사도 유락이라고 설해 밝혔습니다. 니치렌 대성인도 “환희 중의 대환희”(어서 788쪽)라고 단언하셨습니다.‘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남긴 비극은 인간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요인이 외형만의 변혁에는 없다는 교훈을 명확히 남겼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기에는 이러한 생사관·생명관의 변혁이 가장 중요해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이를 바탕으로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을 제 나름대로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4월호에 계속)
※ 이케다 다이사쿠(1928~2023) - 국제창가학회(SGI) 회장 역임. 소카대학교·소카학원·민주음악협회·도쿄후지미술관·동양철학연구소 등 설립. 유엔평화상·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등 24개국 훈장, 세계계관시인 등 수상 다수. 전 세계 대학으로부터 409개의 명예박사·명예교수 칭호 수여. 토인비 박사와의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를 비롯한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