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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수놓은 리투아니아 예술가들의 '도발'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피아노와 색소폰 연주자의 각본 없는 즉흥 협연
바흐와 쇼팽의 명곡을 재즈스타일로 연주해 화제


▎주한 리투아니아 대사관 주최로 열린 콘서트 '도발'이 명동성당을 수놓았다. /김태욱 기자
다소 독특한 공연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겉으론 여느 평범한 피아노와 색소폰의 협연이었다. 다만 연주 내용은 사뭇 독특했다. 피아니스트가 옆에 앉은 색소폰 연주자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공연 도중 포착됐다. 마치 '언제 끝나지?'라는 질문을 건네는 듯했다. 사전 조율 없이 시작된 공연임이 분명해 보였다.

공연 시작 20분쯤 색소폰 연주자가 한 박자 쉬어가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이에 피아니스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찰나 색소폰 연주자가 추가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가 이에 질세라 건반 위에 손을 재빨리 올렸다. 이 같은 숨 가쁜 질주가 두 시간 동안 지속됐다. 지난 2월 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주한 리투아니아대사관 주최로 열린 리투아니아 국가재건일 106주년 기념 공연이다.

이날 공연은 '각본 없는 협연'을 주제로 기획됐다. 각본이 없었기에 피아니스트가 색소폰 연주자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서로 호흡을 맞춰볼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즉석 연주가 '컨셉'이란 이야기다. 이들은 지난 6년간 서로에 대한 ‘믿음’ 하나로 즉석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라 쥐르블리테(Aleksandra Žvirblytė)와 색소폰 연주자 페트라스 비슈니아우스카스(Petras Vyšniauskas)다. 공연의 주제도 이와 걸맞은 '도발(Provocation)'이었다.

공연 직후 조용히 성당 한구석에서 청소하는 리차르다스 쉴레파비치우스(Ričardas Šlepavičius) 주한 리투아니아 대사의 모습에서 '리투아니아'라는 국가에 대해 호기심도 생겼다. 공연 이후인 2월 8일 서울 리투아니아 대사관에서 쥐르블리테와 비슈니아우스카스를 만났다.

리투아니아 국가재건일 106주년 기념 공연으로 펼쳐져


▎왼쪽부터 리차르다스 쉴레파비치우스 주한 리투아니아 대사, 알렉산드라 쥐르블리테(피아노), 페트라스 비슈니아우스카스(색소폰). 비슈니아우스카스는 형식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다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 김태욱 기자
"명동성당에서 진행된 콘서트 '도발'은 과거 바로크 시대 음악으로 시작한다." 피아니스트 쥐르블리테의 말이다. 그녀는 "이번 공연은 나에게도 대단히 특별한 공연이다. 다양한 시대, 장르의 음악을 선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이들의 연주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바흐(1685~1750)의 프렐류드 1번 C장조(prelude in C major)로 막을 올렸다. 오래된 이 걸작은 '도발', 즉 색소폰 연주를 곁들인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환골탈태했다. 색소폰의 도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게 비슈니아우스카스의 설명이다.

구체적으로 프렐류드 1번 C장조 특유의 단아하면서도 선명한 음조는 색소폰의 웅장함 울림 덕분에 완전히 색다른 곡으로 탈바꿈했다. 마치 재즈 공연을 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쥐르블리테가 댐버 페달(피아노 페달)을 힘껏 밟아도 색소폰의 웅장함에 가렸다. 마치 페달을 안 밟고 연주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색소폰 연주자인 비슈니아우스카스는 자신의 '도발'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사실 악보를 거의 안 본다. 어떤 메모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공연의 주제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연주에 임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바흐의 프렐류드 1번 C장조를 연주했으나, 기자에게는 '바로크 시대의 미(美)'로 들렸다. 포르투갈어로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바로크는 '일그러진'과 '진주'의 합성어다. 다소 어색한 만남일 수 있으나, 동시에 아름다운 의미를 갖는다. 마치 이들의 협연처럼 말이다. 이들의 공연을 눈감고 들으면 로마에 위치한 트레비 분수가 떠올랐다. 순간순간 세부적인 내용에 집중하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걸작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연주 '도발'은 바흐에서 쇼팽(1810~1849)으로 이어진다. 쇼팽의 대표곡인 '녹턴 Op. 9, 2번'에서도 비슈니아우스카스의 '도발'은 이어진다. 이에 대해 그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쇼팽은 생전 색소폰을 위한 곡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쇼팽이 살아생전 자신의 곡을 색소폰 연주자가 연주한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만약 쇼팽이 살아 돌아온다면 묻고 싶다. ‘쇼팽, 나의 연주는 어떠한가?'"

쇼팽이 피아노를 위해 남긴 작품이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피아노와 색소폰의 협연으로 탄생한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그는 "인생은 시도의 연속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할 수도 있다. 다만, 실수하는 걸 절대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실수란 두렵기 마련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실수도 우리의 협연처럼 아름답다. 중요한 것은 도전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 이날 쇼팽에 이어 한국 작곡가 최우정, 이흥렬, 이루마의 곡을 선보인 이들은 신선한 '도발'로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도전은 늘 아름다워...실수하는 것 두려워 말아야"


▎비슈니아우스카스(색소폰)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사진도 콘서트의 주제인 ‘도발’에 걸맞게 촬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김태욱 기자
비슈니아우스카스는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실수하는 걸 두려워하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문다. 실수는 인생의 일부다. 명동성당 300여 명 앞에서 2시간 연주하면서 실수 없이 연주하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런 '도발'적인 콘서트가 뜻 깊다고 강조했다. "50년 전에는 '도발'을 주제로 연주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는 소련 강점기에 놓여 있었다. 폐쇄된 국가였다. 원하는 곡을 자유로이 연주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서울 한복판에서 '도발'을 주제로 공연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쥐르블리테도 거들었다. 그녀는 "소련 강점기인 50년 전에는 쇼팽 곡의 오리지널 버전, 즉 변형 없이 있는 그대로 연주해야 했다. 이번 서울 공연처럼 재즈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거들었다.

"과거 소련은 재즈를 '사악한 서방'에서 건너온 '나쁜 것'으로 규정했다. 재즈는 미국, 유럽에서 건너온 '나쁜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시각에서 재즈 연주자들은 도발자였다. 소련 강점기 도발적인 연주를 하면 소련 KGB(정보기관)가 탐탁지 않게 바라봤을 것이다.” 쥐르블리테의 설명이다.

소련 강점기 시절에 자란 이들이 이 같은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쥐르블리테와 비슈니아우스카스는 ‘소련 강점기 숨죽여 몰래 청취한 미국 라디오 덕분’이라고 한목소리로 답했다.

비슈니아우스카스는 “소련 강점기 미국의소리(VOA)에서 방송한 재즈 아워(Jazz Hour)를 즐겨 청취했다”며 “음악은 국경과 이념을 자유롭게 뛰어넘는다. 전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한다”고 했다. 재즈 아워는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VOA에서 지난 1955~2003년까지 방영한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소련 당국은 VOA 청취를 금지했으나, 각 가정에선 VOA를 몰래 청취하며 자유를 향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쥐르블리테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녀는 “소련 강점기 시절 아버지가 매일 라디오 옆에 앉아 VOA 전파를 잡기 위해 노력하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소련 정부는 VOA 청취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몰래 들었다. 당시의 경험이 오늘날 나를 만들었다. 여기 한국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는 리투아니아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라의 탄생은 VOA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들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들려줄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과감히 도전하십시오.”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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