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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24)] ‘국민 오빠’에서 ‘화가’로… 박신양의 이유있는 변신 

“그림은 작가의 이야기, 당신의 시선으로 그림은 완성된다” 

9년 전 ‘30년 배우’ 활동 돌연 중단하고 화가로서 새 인생 몰입
거침없는 붓놀림과 극적 요소 가미된 전시 퍼포먼스로 시선 집중


▎박신양이 처음 그린 그림은 러시아 유학 시절 동고동락했던 친구 ‘키릴’의 초상화다. 그가 화가로 변신한 지 어느덧 10년째 접어들었다.
"애기야, 가자!”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의 명대사는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밈(meme)이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멜로, 액션,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배우, ‘국민 오빠’로 자리매김한 그가 새로운 인생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다. 그의 또다른 인생 이야기는 스크린이 아닌 캔버스 위에서 펼쳐진다. 바로 ‘화가 박신양’의 스토리다.

1996년 첫 작품 영화 [유리]로 데뷔한 그는 2019년 드라마 [동네 변호사 조들호 2]를 끝으로 20여 년의 연기 생활을 마감하고 6년만에 화가로 돌아왔다. 이유가 있었다. 화가는 그의 오랜 꿈이었다. 잘 알려진 바 없지만, 그는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미술과 철학을 꾸준히 공부하며 한·중 교류전 [평화의 섬 제주, 아트의 섬이 되다](2017), [서울아트쇼>(2021), [스타아트페어](2022) 등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2009년부터 ‘박신양 FUN 장학회’를 만들어 예비 예술가들을 응원하는 등 예술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박신양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너무 그리워서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러시아에 유학 중이었을 때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러시아 예술가들이 소련 붕괴 후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 쉐프킨 연극대학교와 슈킨 연극대학교에서 유학했다. 당시 그는 한 장의 그림이 주는 ‘감동의 힘’을 경험했다고 한다.

1995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슈킨대학에서 만난 친구 키릴 키아로를 그리워하며 처음으로 붓을 들기 시작했다. 이후 유리 미하일로비치 선생님 등 유학 시절의 그리운 대상을 계속 그려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왜 그리움을 갖게 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그림은 점차 ‘나는 무엇인가’라는, 좀 더 근원적인 물음을 내포하며 10여 년에 접어들었다.

러시아 유학 시절 추억 떠올리며 처음 붓 잡아


▎당나귀는 박신양이 즐겨 그리는 소재 중 하나다. 2017년 작 [당나귀 27]. / 사진:박신양
얼마 전, 엠엠(mM)아트센터에서 박신양 기획 초대전 [제4의 벽(The fourth wall)]이 열렸다. 친구를 그린 그의 첫 작품 ‘키릴’ 외에도 독일 표현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 이중섭, 에곤 실레 등을 그린 인물화와 ‘춤’, ‘당나귀’ 연작 등 1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 전시 기간에 맞춰 박신양의 그림 131점이 수록된 도서 [제4의 벽](민음사)도 출간했는데, 예술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가는 박신양의 고뇌가 담긴 그림과 철학자 김동훈의 해설이 담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전시 제목이자, 책 제목인 ‘제4의 벽’은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 가상의 벽을 의미한다. 무대와 관객,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보이지 않는 ‘선-벽’의 개념과 원리를 작품 활동에 접목했다.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공개한 전시는 매우 연극적이며, 작가의 아틀리에 공간 구성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제4의 벽은 당신의 시선으로 완성되는 전시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생각과 작업실의 모습을 모두 보여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전시실 벽에 박신양의 자필로 쓰여 있는 글을 통해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사과’ 연작은 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두봉(Rene Dupont) 주교로부터 선물 받은 사과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의 책에 초등학교 미술시간 선생님과의 ‘사과’ 그림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감정이 이입된 작품으로 보인다. ‘사과’ 연작 외에 ‘당나귀’, ‘자화상’ 연작 등은 표현주의적 탐구를 통해 깊은 사유와 인생 철학이 캔버스 위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박신양은 거칠고 대담한 붓놀림으로 역동적이면서도 심오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023년 작 [움직임 연구 2]. / 사진:박신양
박신양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색채와 거침없는 붓놀림에 있다. 대상의 본질적 기운이 생동하는 특유의 에너지를 교감한 까닭에 배우 박신양을 잠시 잊고, 화가 박신양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기분 좋은 전시다.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술적 소통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박신양을 전시 중인 엠엠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세월이 흘렀어도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의 표정은 배우로서 전성기 시절의 ‘살인미소’ 그대로였다.

“표현에 대한 고민, 연기자와 화가가 다르지 않아”


▎화가의 작업실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박신양의 전시회는 마치 연극을 보는 듯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지난 4월 평택시립미술관 ‘mM아트센터’에서 열린 박신양의 기획초대전 ‘제4의 벽’ 전시장 모습. / 사진:박신양
[제4의 벽] 내용 중,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사과’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 어려서부터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표현은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고 싶은 사과를 그렸다가 이게 그림이냐고 혼났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그리는 방법이 따로 있었던 건지 헷갈렸고, 어쨌든 그 후로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던 학창 시절 어느 날, 그림 앞에서 받은 감동이 강력하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고 결국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도. 연기자로서 ‘표현’에 대해 고민과 실험을 해왔고, 그 표현이 보여지는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화가에게도 ‘표현’이 어떻게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는가는 연기에서만큼 중요한 과제다.”

그림에 힘이 넘친다. 시선을 끄는 강력한 매력 중 하나인데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원천이 궁금하다.


▎박신양은 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남다른 고민을 해왔다. 화가가 된 뒤에도 그는 그림을 통한 ‘표현’을 늘 고민하고 있다. / 사진:박신양
“잘 모르겠다. 내 모든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근원에는 관심이 있다. 그러니까 인간 본질에 대한 관심이다. 왜 표현을 하고자 하는가. 왜 창조하고자 하는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더 깊은 본질을 찾아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결과물인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가에게 당면 과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표현에서 진정한 힘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든 직면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어떤 그림을 주로 그려왔나? 작품 중에 특히 마음 가는 그림은?

“당나귀, 사과, 피나 바우쉬와 춤을 그려 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혼합되고 중첩된, 또는 대상이 무시된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는 후자에 관심을 더 갖게 된다.”

그림과 연기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 텐데 그림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연기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나와 타자(他者), 나와 세상, 그리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림은 표현을 위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과 협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 좀 더 무게중심이 가 있다. 작가는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스스로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몰입감 극대화하는 연극적 장치, 전시에도 적용”


▎당나귀는 박신양이 즐겨 그리는 소재 중 하나다. 2017년 작 [당나귀 27]. / 사진:박신양
독일의 현대 표현주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탄츠테아터(tanztheater)’ 장르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림과 연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박신양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면?

“연극이 가진 장점은 극적이라는 점인데, 그것은 갈등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이야기의 구성을 통해 ‘몰입감’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고 어떤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인 장치다. 이러할 때 그 반대의 것들도 가능할 수 있다. 연극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앞서 실험하고 있다. 연극을 전공했고 그 원리를 생각해왔기 때문에 나의 그림과 전시에 그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느 분야든 원리의 장점은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과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

배우로 먼저 알려졌기 때문에 화가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유학 시절 모습. 박신양에게 러시아 유학 경험은 연기에 대한 깊은 고민과 더불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로도 작용했다. / 사진:박신양
“(배우라는) 고정된 캐릭터의 옷을 입고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편견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영역에서 요구받는 역할을 소화해내기 위해 여러 캐릭터로 살고 있다. 예술의 역할 중 하나는 그 모든 가면을 벗겨내고 진실을 대면하게 만드는 데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을 한 장만 선택한다면?

“1992년, 혹은 93년 즈음일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러시아 시절이다. 그때는 오로지 예술에 관해서만 얘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순수성을 끝까지 파고드는 일이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던 시간이었다. 예술에 대해 마음껏 생각하고, 눈치 볼 필요 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고 자연스럽게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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