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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3)] 영화 '1492 콜럼버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와 대항해시대 

14세기 유라시아 한랭화, 콜럼버스를 서쪽 바다로 이끌다 

몽골제국 쇠퇴로 아시아로 가는 내륙 교통망 무너지자 서쪽 바닷길로 눈 돌려
기온 떨어지며 원나라 정부 캐시카우 염전사업 타격, 소금 상인도 반란군 가담


▎영화 [1492 콜럼버스]의 한 장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몽골제국의 쇠퇴로 육로가 막히자 서쪽 바다를 통해 아시아로 가려고 했다. / 사진:영화 [1492 콜럼버스] 스틸컷
"자넨 왜 서쪽으로 항해하려고 하지?”

“아시아로 가는 새 길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향료와 황금이 넘치는 곳이죠.”

영화 [1492 콜럼버스]에서 서쪽 바다로 배를 띄우는 거대한 모험을 벌이려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그를 만류하는 가톨릭 수사(修士)와의 대화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왜 아시아로 가려고 했을까. 그것은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이자 모험가였던 마르코 폴로가 남긴 이야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퀸사이(Quinsai)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도시이다.”(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중)

퀸사이는 지금의 중국 항저우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하기 30년 전 남송의 수도로서 인구 100만이 살던 대도시였다. 항저우의 번영은 왕조가 바뀐 원나라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14세기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의 발달상에 감탄했다. 동시기 유럽에서 상업이 가장 발달한 베네치아 출신이었음에도 그의 눈에 비친 중국은 훨씬 높은 단계에 도달한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 상인과 모험가들은 어떻게든 동양, 중국에 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에서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지금의 베이징)까지 먼 거리를 무릅쓰고 온 것도 중국이라는 부유한 나라와 거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콜럼버스는 수사에게 “마르코 폴로가 중국 해안이 낙원이라고 하던데요”라고 말한다.

몽골 제국 확장은 13세기 중세 온난기에 이뤄져


▎14세기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의 발달상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 사진: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의 육로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도적의 위협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후와 지리적 어려움을 제외하면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그것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3분의 2가량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 제국, 원나라 덕분이었다. 원나라가 설계한 교통 인프라를 통해 이들은 비교적 순탄하게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년 뒤, 비슷한 목적으로 아시아로 가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러나 그는 마르코 폴로처럼 육로를 통해 중국에 갈 수 없었다. 마르코 폴로와 콜럼버스는 왜 서로 다른 길을 택해야 했을까?

몽골이 제국을 확대한 13세기는 중세 온난기의 후반부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초목이 잘 자라고 말을 키우기 좋다. 초원이 넓어지면 유목민족의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 몽골이 단기간에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환경적 혜택을 받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14세기부터 유라시아 북반구에 한랭화가 몰아닥쳤다. 세계 제국을 세우며 번성했던 원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랭화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산업은 농업이다. 농작물 작황 사정이 나빠지면 제국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강남 지역에서 장사성, 주원장 등 농민 반란군이 일어나자 원나라는 급격히 흔들렸다.

남북조 시대 이래 수백 년간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강남지방은 인구나 농업 생산량 등에서 중원이라 불렸던 화북지대를 압도하게 됐다. 그래서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는 강남의 물자를 화북으로 운반하기로 했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 대운하 건설이다. 수양제는 비록 고구려 원정 실패가 겹쳐서 쫓겨났지만, 대운하 사업은 이후 중국 경제의 대동맥으로써 계속 기능했다. 원나라 때 반란군은 바로 강남에서 올라오던 경제의 동맥을 차단한 것이다.

이때 활약했던 반란군 리더 중 거대한 세력을 이끌었던 장사성은 염전 노동자 출신이었다. 그는 다른 소금 상인들을 끌어모아 거병했다. 이는 원 조정에 이중삼중의 타격을 안겼다. 원나라는 소금이 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일부 상인에게만 소금 판매를 허가하고 대신 이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거뒀다. 소금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판매 수입이 엄청났고, 이는 원나라 정부의 ‘캐시 카우’였다. 심지어 정부가 허가한 소금 판매권인 염인(鹽引)이 일종의 유가증권처럼 거래되기도 했다. 그런데 장사성을 따르는 소금 상인들도 이 반란군에 참여하니, 원나라로서는 재정에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장사성의 반란군에 왜 소금 사업자들이 참여했을까? 여기에는 한랭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한랭화는 농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원 조정은 소금에 막대한 세금을 매기며,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소금 사업자들로서는 불만이 치솟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 기후가 소금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한랭화로 대륙 정권 교체… 교통망도 위험해져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이자 모험가였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의 육로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사진: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염전은 햇빛과 기온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염전은 바닷물의 증발을 통해 소금을 생산하는 과정인 만큼 기온이 낮아지면 바닷물의 증발률이 떨어지게 되고 이것은 소금의 생산량도 감소시킨다. 또한 매우 추운 기후에서는 염전의 수면이 얼어붙을 수 있다. 이러한 결빙 현상은 소금 결정화 과정을 방해하며, 소금 수확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까지 올렸으니 소금 사업자들로서는 어떻게든 정부를 전복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1392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원나라가 다시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이것은 그동안 유라시아 대륙에서 구축된 원나라의 교통·행정망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과 유럽 사이의 중앙아시아에는 이슬람을 비롯해 다양한 세력이 일어났다. 아시아로 가는 길은 이제 치안과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마르코 폴로보다 200년 뒤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대서양)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1492 콜럼버스]의 한 장면이다.

“부의 고장 아시아로 가는 길은 둘뿐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1년이 걸리는 뱃길 아니면 터키의 육로죠. 하지만 터키는 기독교인의 출입을 막고 있죠. 제3의 길도 있습니다. 바로 서쪽 바다를 건너는 길입니다.”

“그 바다는 끝이 없다던데…”

“무지입니다. 인도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750해리 거리입니다. 우리 모두 오랫동안 속아서 지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우리를 속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신화와 같은 오류가 존재하는 법이다. 콜럼버스도 마찬가지. 대표적인 것이 지구구형설이다. 영화 속 또는 각종 위인전에서의 묘사와 달리 당시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건 이미 상식이었다고 한다. 다만, 과연 서쪽으로 얼마나 항해하면 아시아 즉, 인도나 일본 또는 중국에 도착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콜럼버스는 지구의 크기를 지금보다 훨씬 작게 계산했다. 그래서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가는 직선거리를 1만9600㎞에서 3700㎞로 줄여버렸고 넉넉히 6~7주의 항해를 한다면 아시아에 도착할 것으로 봤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낙관론을 고수하면서 대서양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사실 그를 뜯어말린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 것이지만,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듯이 운이 좋은 사람에겐 당해낼 수가 없는 법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생각지도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던 덕분에 콜럼버스는 망망대해에서 죽지 않고 부와 명예를 잡는 행운을 누렸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총독 보장’을 요구했고 이것이 모두 수용된 것은 아니지만 큰 보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14세기의 한랭기는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끄트머리에 있는 고려에도 한 편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바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뚜껑 속에 목화씨를 몇 개 숨겨서 돌아와 고려에 면을 보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에는 허점이 많다.

문익점이 목화씨 가져 온 이유도 한랭화 가능성


▎문익점은 14세기 한랭기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재배에 성공해 대중화에 기여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일단 목화씨는 원나라에서 금수 품목이 아니었다. 원나라는 무기나 화약, 또는 일부 서적에 대해서는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지만, 목화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2010년 충남 부여군 능산리 사찰 유적에서 면직물이 발견돼 이미 고려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면을 생산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러니 붓에 숨겨서 올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문익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계품사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사절요] 역시 “목면(木緜)의 종자(種子)를 얻어 돌아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라고만 돼 있다. 원나라에서 이를 금지했다거나 어디에 숨겼다는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붓뚜껑 스토리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것은 문익점의 증손자인 문치창이 1464년에 지은 [가전(家傳)]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 문익점이 목화꽃을 따려고 하자 갑자기 한 노파가 나타나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엄하게 금지하는 이것을 따는 거요? 만약 관청에서 알게 되면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이 벌을 받게 되오”라면서 씨앗을 빼앗으려다가 문익점의 위엄 있는 풍모에 넋을 잃고는 “이것은 목면화로 우리 나라에서는 법으로 엄하게 금하기 때문에 어른께서 이것이 욕심나시거든 모름지기 몰래 감추시어서 수색당하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붓에 숨겨왔다는 것이다.

다만 문익점이 이 시기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재배에 성공해 대중화에 기여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전까지 면직물은 귀족이나 부유층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품이었지만, 문익점 덕분에 일반 서민들도 솜이불이나 솜옷 등으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문익점은 이때 왜 목화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려 했을까. 본인은 자세히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에 기후가 한랭해져 추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론은 가능할 것이다. 언제든 중국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목화씨가 이때 주목을 받게 되고 들여왔다는 것은 그만큼 따뜻한 소재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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