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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8)] 조선 임금 사랑도 독차지한 금강산 

불교 배척했지만 금강산 유람하고 사찰에 보시(布施) 

태조, 오매불망 금강산 유람 중 명나라 사신 입국 소식에 발길 돌리기도
세조는 금강산 순행하며 “문수보살·관음보살 친견했다” 일본 왕에 자랑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이다. 고개 중턱에서 가마에서 내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금강산 천악만봉의 장관을 바라보는 정선 일행이 그려져 있다. 단발령이란 지명은 이곳에 서면 머리를 깎고 중이 돼 속세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데서 유래됐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금강산 사랑은 누구보다도 컸다. 왕위에 있을 때 수시로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보시를 한 것은 물론, 기회가 될 때마다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했다.

“임금이 명해 강릉도의 쌀 600석을 오대산과 금강산의 여러 절에 보시하게 했다.”([태조실록] 1397년 12월 3일자 기사)

“천변과 지괴가 있으므로 법회를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표훈사에 베풀었다.”([태조실록] 1398년 8월 17일자 기사)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법회에 참석하고 싶었겠지만 임금의 행차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것은 태상왕으로 물러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이성계는 금강산 유점사에 가서 보살제를 베풀려고 했다. 하지만 정종이 내관을 태상왕에게 보내 만류한다.

“지난해 수재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쳐 기근에 시달리고 있고, 지금 초여름으로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인데 대가가 거동하시면 비록 수행 규모를 간단하게 한다 하더라도 폐단이 작지 않아 농사에 방해가 될까 두려우니 원컨대 한가한 때를 좀 더 기다려주소서.”

태상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말하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말하는 것이니 어찌 생각 없이 말할 리 있겠는가. 내가 가면 진실로 폐단이 있을 테니 마땅히 그만두겠다.”([정종실록] 1399년 3월 13일자 기사)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지 10년이 된 1401년에서야 처음으로 금강산행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워낙 태조의 숙원이었던 터라 [실록]도 이를 거창하게 한 줄로 기록하고 있다.

“태상왕이 새 도읍에서 드디어 금강산으로 거동하였다.”([태종실록] 1401년 윤3월 11일자 기사)

하지만 그것도 미완성으로 그치고 만다. 당초 이성계는 금강산을 유람한 뒤 자신의 연고지인 동북면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금강산행 도중 명나라 사신의 입국 소식을 듣는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 유람을 중단하고 귀경할 것을 청했다. 아무리 임금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대국인 명나라의 사신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해 8월 이성계는 별 수 없이 금강산 유람을 멈추고 한양으로 돌아오고 만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졌어도 모든 일을 뜻대로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선 건국 원동력이 필요했던 이성계

이성계가 이만큼 금강산에 애착을 가진 것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불력의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난 호에서 ‘담무갈·지장보살현신도’에 대해 소개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 현신한 담무갈보살에게 절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흑칠을 한 얇은 나무판에 금박을 아교로 갠 금니로 앞에는 아미타구존도, 뒤에는 담무갈보살과 지장보살현신도를 그렸다. 주위에 금강저(金剛杵) 무늬를 둘렀는데, 금강저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교 용구의 하나로 고대 인도의 무기였다.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사용한 신비한 힘을 가진 무기로, 불교에서는 번뇌와 싸우는 상징적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고려 충숙왕 14년(1317년) 화가 노영이 그린 이 그림은 오늘날까지 전하는 금강산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한 대로 [화엄경]에는 담무갈보살이 1만2000명의 권속과 함께 금강산에 상주하며 항상 설법을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강산 1만2000봉’이라는 표현도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성계는 이 그림과 함께 당시 전해 내려오던, 왕건이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하고 절했다는 전설에 감동했던 것 같다. 이 전설은 유가의 나라 조선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을 때 담무갈이 돌 위에 몸을 나타내 광채를 비추거늘 태조가 신하를 거느리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 절한 뒤 그 자리에 정양사를 창건했다. 사찰 뒤 언덕을 방광대라 하고 절 앞의 고개를 배점(拜岾)이라 하며 또한 진헐대도 있다.”([동국여지승람] 회양·정양사조)

배점은 개성에서 출발해 천마령을 넘은 뒤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고개다. 이곳에 서면 금강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와 그 장엄함에 감동한 이들이 지팡이를 내려놓고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왕건이 담무갈보살에 절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성계 역시 그곳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하고 자신이 막 돛을 올린 조선의 영원무궁을 빌고 싶었을 것이다. 건국 이전에도 자신의 야망 실현을 위해 불력을 빌리고자 했던 이성계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사리함


▎‘담무갈·지장보살 현신도’. 왼쪽 상단에 서 있는 모습이 담무갈보살이며 그 오른쪽 아래에서 그를 향해 절하고 있는 이가 고려 태조 왕건이다. 옆에 태조라고 쓰여 있다. 고려 충숙왕 때 화가 노영이 그린 것으로 금강산을 그린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1932년 10월 6일 금강산 월출봉에서 산불 저지선을 확보하는 공사를 벌이던 인부들이 돌로 만든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사리갖춤이 들어 있었다. 사리갖춤이란 말 그대로 사리를 봉안하는 용기 세트로, 돌상자 안의 사리갖춤은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기와 은제도금 탑형 사리기, 유리 사리기와 함께 청동발 하나, 백자발 4점, 백자 향로 1점으로 구성돼 있었다.

유리로 만든 원통형 사리기에 사리를 봉안하고, 그것을 티베트계 불탑인 라마탑 모양으로 만든 탑형 사리기(내함) 안에 담은 뒤, 다시 팔각당 모양의 사리기(외함) 안에 넣는 것이다. 유리 사리기는 높이가 9.3㎝, 탑형 사리기는 15.5㎝, 팔각당형 사리기는 19.8㎝ 크기였다. 이를 다시 청동발 안에 넣고 청동발은 또 백자발에 담기는 중첩 구조다. 나머지 백자발 3점 중 하나는 청동발을 담은 백자발의 뚜껑으로 사용됐을 게 분명하고, 나머지 두 개의 백자발과 백자 향로는 공양구로 쓰인 것일 터다. 전문가들은 뚜껑으로 쓰인 청동발이 하나 더 있었을 텐데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기 곳곳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중 탑형 사리기의 받침인 원통형 은판에 새겨진 글자는 이랬다.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 물기씨(勿其氏)”

사리를 봉안한 사람,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사리기인 만큼 불사의 핵심 발원자가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라는 뜻이다. 원래 탑형 사리기가 내함인 팔각당 또는 육각당형 사리기의 내함으로 쓰이는 것이 고려말의 일반적 형태였지만, 이성계는 순서를 반대로 했다. 그것은 운이 다한 고려와는 차별화하고 새롭고 융성한 국운을 바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성계 이름 앞의 25자는 그가 창왕과 우왕을 폐위하고 1389년 공양왕을 옹립한 뒤 받은 위호다. 실질적으로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인 이성계의 위상을 과시하는 것이다. 부인 강씨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다. 첫째 부인 한씨의 이름이 빠진 것이 의아하지만 그것 또한 나중에 신덕왕후가 되는 강씨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함경도 변방 출신의 이성계가 중앙무대에 진출하는 데는 고려말 정2품에 해당하는 문하찬성사를 지낸 장인 강윤성의 힘이 컸다. 게다가 부인 강씨 또한 어지간한 남자를 우습게 보는 여장부였다. 이방원이 허락 없이 정몽주를 참살하자 이성계는 대로한다. 이에 강씨 부인이 정색을 하며 남편을 나무란다.

“공은 항상 대장군을 자처했으면서 (중략) 어찌 그런 일로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이성계가 머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기씨는 누군지 알 수 없으나 이성계와 연이 깊은 인물로, 성씨로 봐서 여진인일 가능성이 높다.

백자발 안쪽면에도 또 하나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금강산비로봉사리안유기(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로 시작하는 명문은 “신미년 5월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일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이성계, 비로봉에도 사리갖춤 봉안

여기에서 이성계가 발원한 사리기 봉안에는 고려 후기 유행한 매향의식(埋香儀式)의 색채도 묻어난다. 매향의식이란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어 미래의 구원자인 미륵불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민간 신앙이다. 묻은 향나무가 시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되면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 스스로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침향이란 불가에서 이르는 최고급 향으로, 이 향을 맡고 미륵불이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러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매향의식을 한 뒤에는 그 자리에 매향비를 세웠다.

백성들이 현실적 고통과 불안에서 구원받기 위해 미륵불에 호소한 것이 매향의식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매향비가 모두 14~15세기에 세워진 것이 그래서다. 고려 말의 혼란과 왜구의 침략으로 고통이 컸던 해안 지역 민중들의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이었다. 미륵불은 미래에 사바세계에 현생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미륵 신앙이 폭넓게 수용되고 전승됐다. 불교 교리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년 뒤에나 출현한다고 돼 있지만,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하루라도 빨리 미륵불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제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피폐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미륵불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 무지한 백성을 현혹하는 일이 많았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자칭 미륵불 행세를 했으며, 고려 말 우왕 때는 이금이라는 자가 미륵불을 자처하기도 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이 없어질 것이라는 이금의 말을 믿고 백성들이 다투어 쌀과 비단, 금은보화를 헌납했다.”([고려사 절요])

조선 숙종 때도 승려 여환이 자칭 미륵이라 일컬으며 왕권을 넘보는 일까지 있었다.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스러운 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불교의 사리 장엄의식과 민간의 매향의식을 빌려왔다. 크게 내세울 것 없는 변방의 세력가로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친 것이 경력의 전부인 신흥무장 이성계로서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권위 있는 제례의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지 3년 만인 1391년 1만 명의 사람을 이끌고 불교 성지 금강산에서 대규모 불사리 봉안식을 거행한 것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금강산 사리 봉안식 1년 뒤 조선 개국


▎고려 우왕 13년(1387) 세워진 경남 사천의 매향비와 비각. 오늘날 남아 있는 고려시대 매향비는 3개인데 비석과 비문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천 매향비가 유일하다. 보물로 지정됐다. / 사진:이훈범
유리 사리기의 재료를 당시로서는 최고급 재료인 석영 유리로 한 것도 그래서다. 이는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유리 사리기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일반 유리는 규소를 주로 사용하며 섭씨 1000도 미만에서 만들어진다. 반면 석영 유리는 열에 매우 강해 섭씨 1500도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다. 석영 유리는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이상 돼 매우 튼튼하다. 이성계가 사리갖춤을 봉안하면서 당대 최고급 재료와 기술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이성계와 그의 추종세력인 개혁파 관료들은 이성계가 금강산에 사리갖춤을 봉안하던 바로 그달(1391년 5월) 전대미문의 개혁 조치를 단행한다. 권문세가가 독점한 토지, 즉 사전을 혁파하고 전·현직 관리에게 녹봉 대신 경기도의 토지를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과전법을 시행한 것이다. 과전을 받은 관리들은 수확량의 10분의 1만 세금으로 받았다. 이전에 수확량의 절반을 바쳐야 했던 백성들에게 조선 건국 주체들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왜구들의 극성스런 발호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으며 해안가 백성들은 아예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했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 이성계가 1만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금강산에서 사리 봉안식을 거행한 것은 스스로 백성을 혼란과 도탄에서 구원하는 미륵불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성계는 금강산 사리 봉안식 1년 뒤 그의 뜻대로 조선을 개국한다. 이성계와 새 나라 조선이 백성이 오매불망 갈구하는 미륵불과 그가 구현하는 이상세계의 현실 버전을 자처한 셈이다.

그토록 금강산에 가고 싶어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태조처럼 조선의 역대 왕 중 금강산을 제대로 탐승한 이는 거의 없다. 유일하게 금강산과 오대산 일대를 순행한 임금이 바로 세조다. 세조는 1466년 2월 금강산 온정리에 행궁을 짓고 다음달 16일부터 윤3월 24일까지 40여 일간 정비왕후와 함께 금강산 일대 사찰과 온천을 유람했다. 이어 관동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기도하고 시주한 내용을 기록하고 금강산의 여러 절경을 소개한 [어가동순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금강산에는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인 만큼 나쁜 이야기들이 더 많다. 단발령(斷髮嶺)과 관련된 전설도 그렇다. 단발령은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금강군과 창도군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 서면 금강산의 천악만봉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곳이다. 그것이 하도 절경이라 보기만 해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고 한다. 신라의 마의태자도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금강산에 들어갈 때 이 고개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전설이 있어 단발령이라 불렸다. 금강산 북쪽에 앞서 설명한 배점이 있다면, 금강산 남쪽에는 단발령이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세조가 꿈을 꿨는데 형수가 나타나 “더러운 인간”이라고 욕하며 침을 뱉었다. 그날 이후 온몸에 종기가 돋았는데 어의들이 머리를 맞대고 치료를 하는데도 낫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금강산에서 기도하고 온천 치료를 받기 위해 금강산 유람길에 오른다. 이윽고 어가 행렬이 단발령에 이르렀을 때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기암준봉들이 마치 보살들의 모습 같고 계곡 물소리는 부처의 음성처럼 들렸다.

금강산엔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아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된 사리갖춤(사리장엄구).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발원해 봉안한 것이다. 사리는 유리로 만든 기물에 넣었고 탑형 내함과 팔각당형 외함, 청동발, 백자발에 차례로 넣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세조는 당장 뛰쳐나가 불가에 귀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신숙주가 겨우 말릴 수 있었다. 머리를 미는 대신 윗머리만 조금 잘랐다고 한다. 1711년 36세의 겸재 정선이 단발령에서 금강산과 조우하는 장면을 그린 ‘단발령망금강산도’가 있는데, 이것만 봐도 당시 세조의 심정을 느껴볼 수 있다. 오늘날 드론으로나 잡을 수 있는 시각으로, 하늘에서 조망하는 것처럼 그려 마치 이곳이 곧 불국토(佛國土)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세조는 재위기간(1455~1468) 순행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조와 현종, 영조, 정조도 지방 순행을 했지만 세조만큼 지방 여러 지역을 두루 방문하지는 않았다. 세조는 즉위 6년(1460) 이후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경기도·황해도·평안도·충청도·강원도를 찾았다. 재위 전반기의 순행이 군사 훈련을 통한 정권 안정과 민정 사찰을 통한 민심 수습에 주안점을 뒀다면, 후반기 순행은 온천욕이나 종교적 열망에서 기인한 성지순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정주 단국대 교수는 세조가 “순행을 통해 요순시대의 정치를 재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세조는 유교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환구제도 시행했다. 중국 황제를 모방해 환구제를 시행함으로써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한 것이다. 이와 함께 순행을 통해 일반 백성과의 접촉을 폭넓게 갖고자 했다. 이는 조선의 다른 임금과는 매우 구별되는 것으로, 세조가 문신세력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광범위한 피지배층과 군사력에 바탕을 둔 통치를 구상했으며 이를 위해 순행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피부병이 악화되면서 재위 후반기의 순행은 온천욕을 위한 것으로 변질된다. 세조는 즉위 10년차인 1464년부터 1465년, 1468년 세 차례에 걸쳐 온양 순행에 나선다. 1466년의 강원도 순행도 당초 온양을 가려 했으나 충청도 일대에 흉년이 들면서 강원도 고성의 온천으로 바뀐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목적지가 바뀌면서 순행 목적도 달라졌다. 불교 성지인 금강산으로 순행 장소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성지 순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조는 기대하지 않았던(또는 의도했던) 기적을 이루게 된다. 태조가 그렇게나 고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담무갈보살 친견을 이룬 것이다. 세조는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자랑한다.

“(금강산) 산기슭에 이르기도 전에 땅이 진동하고, 동문(洞門)에 들어가자 서기가 뻗치고 상서로운 구름이 둘렀으며, 하늘에서 오동잎만 한 사화(四花)가 내려오고 감로(甘露)가 뿌려 초목이 목욕한 것 같았으며, 햇빛이 누래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금빛을 이루었는데, 이상한 향기가 퍼지고 광명한 빛을 발해 산과 골짜기가 빛났고, 선학이 쌍으로 날아 구름가에 돌았으며, 산 중의 여러 절에 사리(舍利)가 분신해 오색 빛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명양승회(明揚勝會)를 열자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기이한 상서가 거듭 나타나고, 또 담무갈보살이 무수한 소상(小相)을 나타내었다가 다시 대상(大相)을 나타내어 그 길이가 하늘에 닿았습니다.”([세조실록] 1466년 윤3월 28일자 기사)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 친견” 자랑도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태조는 강씨가 죽자 궁궐에 가까운 서울 중구 정동에 무덤을 만들었지만,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의왕후 소생인 태종 이방원의 지시로 당시는 경기도 양주였던 현 위치로 이전했다. / 사진:이훈범
세조는 한 술 더 떠 순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까지 친견한다.

“상원사 총림에서 사리, 우화, 이향 등의 상서가 다시 전과 같았으며, (중략) 예전에 부처가 멸도한 뒤 왕사성(王舍城) 사람이 금을 모아 불상을 만들고, 문수보살이 53구를 금종에 간직해 바다를 바라보고 맹세하기를, 마땅히 인연이 있는 국토에 가서 중생을 제도하면 내가 모름지기 그곳에 이르러서 길이 옹호하겠다고 하자, 이에 금종이 우리나라에 떠와서 산 동쪽에 스스로 머물렀습니다.”([세조실록]1466년 윤3월 28일자 기사)

자신이 친견한 것이 문수보살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다. 원래 [화엄경]에는 문수보살은 중국 청량산에 상주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청량산에서 수행한 신라의 자장대사가 한 노승으로부터 문수보살의 상주처가 오대산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돌아와 오대산에 적멸보궁을 지어 문수 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조는 이미 즉위 8년에 경기도 일대를 순행하다가 용문산 상원사에 들려서도 관음보살을 본 적이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항이 1481년 간행한 [관음현상기]에 따르면 1462년 세조가 경기도 지역을 순시하다가 상원사에 유숙할 때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으며 상서로운 빛과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다가 한참 만에 흩어졌다. 이에 세조는 크게 기뻐해 죄인들을 사면하고 조정의 관원들은 축배를 올려 경하했다. 이어 상원사를 중창하고 관음보살상을 봉안했으며, 세조의 관음보살 친견 장면을 그린 그림을 국내에 두루 반포했다.

그런데 강원도 순행을 통해 문수보살과 담무갈보살 친견을 더해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세 보살을 모두 만난 임금으로 등극한 것이다. 남들은 평생 한 보살도 만나기 어려운데 보살 셋을 만났으니 이처럼 신성한 임금은 다시없는 것이다. 그것은 집권의 정통성이 약한 세조로서 통치 기반을 확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고도의 선전술일 수도 있지만, 신하들의 아부성 찬양과 칭송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예조참판 강희맹의 ‘금강산 서기송’이다. 그는 세조의 순행 일행을 뒤따라가 세조를 배알한 뒤 고했다.

“신이 3월 21일에 금성현에 이르러 하늘을 보니 동북방에 누런 구름이 자욱이 끼어 햇빛을 감추었습니다. 곧 상서로운 바람이 불어 하늘이 드러나자 누런 구름이 흰 서기로 변해 (중략) 흰 기운이 퍼져 밝게 빛나고 푸른 무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비단 무늬처럼 찬란했으며 햇빛이 빛나 산천초목이 금빛 세계로 변했습니다. (중략) 신이 물으니 상서로운 구름이 금강산에 닿았고 전하께서 산기슭에 도착한 날이었습니다. (중략) 부처와 부처가 만남은 흔한 일이니 이는 전하께서 여러 차례 신비한 변화를 얻어 고금에 밝게 빛난 까닭입니다.”([세조실록] 1466년 3월 27일자 기사)

세조는 보살 셋 만난 신성한 임금?

세조의 몸에 닭살이 돋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세조를 부처와 동급으로 추켜올린 것이다. 실록에는 감로(甘露)와 우화(雨花), 서기(瑞氣), 이향(異香), 쌍학(雙鶴), 사리 분신(舍利分身) 등의 기이함이 나타날 때는 항상 ‘햇무리’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꽃비라는 표현을 보면 비가 내렸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기상 현상은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좋은 아첨거리가 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신하들의 아부는 물론 보살 친견이나 건국의 염원을 담은 불사가 금강산에서 이뤄지는 것은 금강산이 그만큼 신령스러운 산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그러한 금강산의 명성이 국내에 그치지 않고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일본 국왕에게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그토록 자세하게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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