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발 한 켤레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남성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
'MF 위기보다 더한 위기’라는 국제적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자살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국내 자살자 수는 1만2174명으로 10년 전보다 두 배 늘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4.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자살사망률의 두 배를 훌쩍 넘기면서 OECD 국가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사회 곳곳은 구조조정과 임금삭감 등 군살빼기 작업이 한창이다. 그에 따른 경제적 불안과 실직 공포가 사회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하면서 정신과 병원이나 자살 관련 단체의 상담창구는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실직 공포와 경제력 상실감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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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40대 후반 가장입니다.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아 최근 실직했습니다. 실업급여를 신청해 놓았지만 집안에 한창 돈 들어갈 상황이라 살길이 막막합니다. 오늘도 하도 답답해 관악산을 다녀왔는데 저 자신이 너무나 초라합니다. 해결책은 자살일까요?”
사례 3. “세 자녀를 둔 35세 가장입니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지방에 내려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 있다 보니 가족도 친구도 멀어져 외톨이로 지냅니다. 요즘은 불면증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중노동에 시달리며 한 달에 130만원을 법니다. 자신감이 사라진 지 오래고 초라한 내 모습만 남아 자살에 대한 충동이 계속 생깁니다. 아내는 이런 나를 이해하기는커녕 돈을 더 벌라고 다그칩니다. 나만 없어지면 알아서 잘살겠지, 수면제를 먹을까, 목 매달아 죽을까 하는 생각을 벌써 3개월째 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하게 들어요. 빨리 끝내고 싶어요.”
한국자살예방협회에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상담도 줄을 잇고 있다. 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총 상담건수는 3320건에 달했고, 11월 219건에 머물렀던 상담건수가 12월에는 348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담내용을 세부적으로 분석한 결과 1순위를 차지한 것이 우울(14.8%)이었고 2순위는 부모·자녀관계(14.3%) 문제였다.
‘기타’를 제외하면 3순위는 염세비관(9.8%)이 차지했다. 실직 공포와 불안감, 경제력 축소 또는 상실, 그로 말미암은 가정불화에서 오는 절망감과 위기감으로 몸살을 앓는 중장년 남성들을 더욱 위협하는 것은 자살충동을 동반한 우울증이다. 신촌에서 개인 의원을 운영하는 최의헌 박사(정신과)는 “얼마 전부터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었다.
우울증 환자 수가 늘었다기보다 환자 가운데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또 병원에 다니던 우울증 환자 가운데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어 최 박사는 “30대 환자가 가장 많고 20대와 40대가 그 뒤를 따른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환자는 취직과 관련해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40대는 개인적인 불안정과 불확실한 미래, 가정불화로 우울증을 호소한다”고 덧붙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07년 국내 우울증 환자 수는 52만5466명이고 이 가운데 남성이 16만753명이다. 이는 2005년 45만9222명(남성 14만6955명), 2006년 47만9095명(남성 15만1613명)보다 많이 증가한 수치다. 또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7년 국내 자살자 1만2174명 가운데 남성이 7747명으로 전체 자살자의 60%가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망 원인 중 ‘자살’이 20~30대는 1위, 40대는 2위다. 우리나라 남성은 여성보다 사회적, 가정적 책임이 더 무겁다. 또 남자로서 자존심이 강하고 ‘가정의 책임자’라는 가부장적 가치관 같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남성의 자살률을 높이고 있다. 언론에는 자살사건과 관련한 보도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1월 부산 해운대구 송정동 모 아파트 주차장에서 박모(49)씨가 하수도 배관에 목을 매 숨졌다. 유족들 진술에 따르면 박씨는 노동일을 하다 2개월 전부터 일거리가 없어 몹시 힘들어했다고 한다.
중년 남성이 여성보다 자살 성공률 높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기도한 대리운전기사 백모(45)씨는 2주 만에 끝내 숨졌다. 백씨는 지난해 성탄절 전날 자신의 집에서 화장실 선반에 압박붕대로 목을 매 숨진 채 아내 김모(41)씨에게 발견됐다.
유족들은 경찰서에서 “백씨가 사업실패 후 빚 독촉에 따른 심적 고통이 컸다”고 진술했다. 한창 사회활동을 해야 할 중장년층 남성의 자살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가정과 사회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홍강의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은 “노인을 제외하고 40, 50대 중년 남성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과 관련이 크다”며 우려했다. 그는 “남성 중년층은 가정과 사회, 경제적으로 책임을 지는 세대인데 최근 경제적 여건이 나빠지면서 상대적으로 제일 큰 충격과 타격을 받고 있다.
이때 직장을 잃고 경제력마저 잃으면 타격을 심하게 받아 극단적으로 삶을 포기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우울증이나 충동성을 포함한 유전적 요인, 양육 환경에 의한 성격상 특징, 자살 가족력과 만성신체질환, 알코올 등 중독성 물질 남용 등 생물심리학적 요인과 실직과 빈곤, 낮은 사회적 지지, 높은 자살수단 접근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요인이 ‘우울증’과 ‘충동성’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다.
주변에 알려서 객관적인 조언을 구해야
우울증은 세계 3대 질환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흔한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이면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이 인간의 질환 중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우울증이 심각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우울증 환자의 80%가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최 박사에 따르면 남성은 감정표현력이 여성보다 떨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감정을 억제하느냐 발산하느냐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중간의 미묘한 변화는 읽어내지 못한다. 나아가 ‘사내대장부’답지 못하다는 사회적 통념은 남성이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하도록 한다.
우울증을 표현하는 단어 중에 ‘위장된 우울(masked depression)’이 있다. 이는 실제로 우울증이지만 겉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남성의 위장된 우울 중 대표적인 것은 ‘중년의 위기’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예와 흡사하다. 외도와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등이 위장된 우울일 가능성이 크다.
위장된 우울은 표면적으로는 집착과 충동성으로 나타나지만 저변에는 심각한 우울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과 남성 우울증 환자가 가진 여러 특성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최 박사는 “위장된 우울을 앓거나 감정표현에 서툰 남성이 우울하다고 겉으로 드러낼 정도가 되면 대부분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위기상황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똑같이 최악의 상황에 몰린다 해도 강건한 자아나 인내심, 끈기로 버틸 수 있는 사람과 버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 내면에는 우울증이 있고 우울증의 내면에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공격적 요소가 있다.
그런데 이런 분노나 복수심을 제때 겉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인식조차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면에 쌓인 분노가 자신한테 돌아오는 것이 자살이다.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려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주변에 알려서 객관적인 조언을 구해야 한다. 주변에서 “사람이 많이 변했다”고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홍 회장은 “개인적으로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 주위 사람이나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자살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바로 가족이나 주변 사람의 정서적 지지”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