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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백에 숨겨 놓은 ‘돈다발’의 비밀 

서민 등골 휘는데 “지역 세무서장 양복백에 100만원짜리 돈다발 숨겼다 발각”
도마에 오른 국세청 간부 모럴해저드 

울산세무서장 A씨가 수천만원을 양복백 속에 감춰놨다가 발각돼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양복백 돈다발 사건’이다. 울산지검은 현재 A씨가 받은 금품이 뇌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 로비 의혹’이 터진 지 한 달 남짓, 국세청 간부의 모럴해저드는 ‘도’를 넘어선 듯하다.

1. 양복백 속 돈다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 로비 의혹’으로 떠들썩하던 1월 중순. 국무총리실 암행감사팀은 지방 국세청과 세무서를 불시 감사했다. 지방청장·세무서장이 지역 세력과 유착됐을 가능성을 짚어볼 계획이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울산세무서장 A씨(현재 대기발령 중)는 때마침 지역 업자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암행감사팀은 곧장 서장실을 뒤졌다.

100만원짜리 현금다발이 책상 서랍에서 발견됐다. A씨 자택에선 더 많은 현금다발이 나왔다. 그것도 양복백 속에 감춰져 있었다. 바로 이것이 ‘양복백 돈다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재 울산지검 특수부에서 수사 중이다. 현재까지 포착된 금품 액수는 수천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A씨가 양복백 속에 보관했던 현금다발이 뇌물인지, 또 다른 금품수수는 없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불황을 겪고 있는 서민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는데, 국세청 간부라는 사람은 양복백 속에 현금을 감춰놓고 있었으니…”라며 탄식했다.

A씨는 “부산 수영세무서장으로 전보되기 전 친구들이 준 전별금일 뿐”이라며 뇌물수수 의혹을 일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별금은 떠나는 사람을 위로하는 뜻에서 주는 돈. 하지만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떳떳한 전별금이라면 왜 양복백 속에 숨겨놨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전별금 명목으로 수천만원씩 주고받는 게 정상인지도 의문이다. A씨의 ‘전별금 해명’에도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이유다.

2. 2003년 돈뭉치 사건의 재판

2003년, 국세청 간부의 집에서 1000만원 돈뭉치와 고급양주 200병이 나왔다. 상품권도 600만원어치 발견됐다. 주류업체 세무관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 간부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평가가 묘했다. 주류업체 관계자들은 “그렇게 점잖은 사람이 어떻게 잡혔나”라며 아쉬워했다.

앉아서 돈을 받았을 뿐인데 왜 잡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옆구리 찔러 돈을 뜯어내는 국세청 간부가 그만큼 많았다는 소리다. 국세청은 이후 이런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수많은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별다른 성과는 없어 보인다. 국세청장 2명은 비리혐의로 사법처리를 받고 있고, 또 다른 국세청장 1명은 청탁의혹에 시달리다 현직에서 낙마했다.

지방 세무서장은 수천만원의 돈다발을 양복백 속에 감춰두고 생활하다 발각됐다. 그야말로 2003년 비리사건의 재판이다.
울산세무서장 A씨의 뇌물수수 의혹은 한상률 전 청장이 그림 로비 의혹에 휘말린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가뜩이나 이주성·전군표 전 청장도 비슷한 혐의로 사법처리를 받은 상황이다. “우리는 건실하게 일하고 있다”는 국세청 대다수 직원의 하소연이 무색할 지경이다.


3. 국세청 간부 모럴해저드 논란

국세청은 세금을 거두는 기관이다. 그래서 다른 기관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김영훈 연세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극심한 불황으로 민생고가 심각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세금을 거두는 국세청 및 일선 세무서가 부패사슬에 얽히면 국민의 조세 저항이 강력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사건을 거울 삼아 국세청이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은 무척 많다. 무엇보다 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도입한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대표적인 게 실효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는 ‘향피(鄕避)제도’다. 국세청은 2007년 지역세력과의 유착 개연성을 차단하기 위해 지방청장·세무서장 자리에 그 고장 사람을 피해서 앉히는 향피인사를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단 1년 만에 유명무실해졌다는 따가운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 임명된 김광 광주지방국세청장, 김덕중 대전지방국세청장은 각각 전남 영암과 대전 출신이다. 국세청장 직속으로 운영되는 ‘감찰반’도 문제다. 감찰반은 한 전 청장의 그림 로비 의혹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감찰 1순위 청장은 ‘무풍지대’에 서 있었던 셈이다. 국세청은 상명하복 문화가 강하다. 세무행정 특성상 비밀주의 성향도 뚜렷하다. 그래서 내부비리를 감싸기 일쑤다. 전문가들이 “외부감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이 밖에 비대해진 국세청 조직을 슬림화하고 공정한 과세체계를 확립해야 부패를 근절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세청이 거듭나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세청장의 임기보장 등 각종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이어 “지방청·세무서의 통폐합을 통해 지역 토호세력과의 유착고리를 끊어버리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지나친 광역화는 자칫 세무행정의 편의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철한 청렴성 확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세청은 법인세·부가가치세·소득세 등 여러 세목을 동시에 조사한다. 때론 출자회사·특수관계인에 대한 조사도 광범위하게 한다. 세무조사를 통해 수백억원의 추징금을 매기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국세청은 속성상 금력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김영훈 명예교수는 “국세청 공무원을 따라다니면서 감시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라며 “제도개혁만으로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는 발상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했다.

국세청 신입 직원들이 연수를 받을 때 가장 먼저 읽는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라고 한다.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국세청 직원에게 가장 필요한 게 청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 전 청장의 그림 로비 의혹에 이어 터진 양복백 돈다발 사건. 이 볼썽사나운 사건을 계기로 조직개혁에 시동을 걸어야 할 뿐 아니라 『목민심서』가 전하는 ‘공복의 도리’를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976호 (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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