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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가 틀렸다, 믿어달라!” 

은행연합회 “피치 결과 재론하고 싶지 않다”… 보수적 평가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는 자성론도
대한민국 은행이 수상하다 - 은행의 자존심 건 항변 

국내 은행은 지금 전방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지 오래다. 대출을 늘려 자산을 키웠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았지만 정작 대출비율이 높아져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열매 따먹는 데 정신이 팔려 리스크 관리엔 소홀했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은행권은 할 말이 많지 않다.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권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은행은 공적자금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며 “하지만 2005년 이후 무차별적 외형 확장 경쟁을 벌였던 게 부메랑으로 날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은행권도 펄쩍 뛰는 사안이 있다. 외국 기관의 비판에 대해선 “할 말 많다”는 입장이다. 특히 영국 신용평가기관 피치(Fitch)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에 대해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피치가 실시한 국내 은행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2008년 6월 말~2010년 12월 말)를 보면, 국내 은행의 단순자기자본비율(equity-to-assets ratio)은 2008년 6월 말 6.4%에서 2010년 12월 말 4.0% 수준으로 하락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국내 은행의 자본손실 규모가 42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피치는 분석했다. 단순자기자본비율(TCE)은 우선주를 제외하고 보통주만을 자기자본으로 인정해 자본건전성을 평가하는 지표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보다 보수적이다. 문제는 피치의 이번 테스트가 외환위기 절반 수준의 충격을 가정해 진행했다는 점이다.

만약 외환위기 강도의 충격이 가해지면 손실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피치 보고서는 사실일까? “피치 결과가 틀렸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전국은행연합회 A부장은 단호했다. 그는 결과는 물론 가정 자체도 오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B부장도 “피치 결과에 대해선 재론하고 싶지 않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신동규 은행연합회장이 ‘피치가 불확실한 가정을 사용해 부정적 결과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고 발표하지 않았는가? 만약 피치 보고서 때문에 국가 신인도가 하락하면 은행연합회는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신동규 회장의 말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전국은행연합회가 이처럼 강력 반발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국내 은행의 자본건전성이 양호한데, 왜 우리만 테스트를 했느냐는 게 첫째 이유다. 국내 은행의 단순자기비율은 현재 6.2%다. 뱅크오브아메리카(2.8%)·미국의 씨티(1.5%)보다 각각 2배 이상 좋은 수치다. 유럽의 UBS(1.1%)·도이치(1.2%)·바클레이즈(1.3%)·RBS(1.6%), 일본의 미즈호코퍼레이션(1.4%)·미쓰이스미토모(2.5%) 등 선진국 주요 은행의 단순자기자본비율보다도 훨씬 높다.

반대로 피치가 적용한 기준을 외국 은행에 똑같이 적용하면, 국내 은행에 대한 전망치보다 더욱 부정적 결과가 나온다는 게 은행연합회의 입장이다. 피치사의 경고음이 국내 은행에 대한 단순한 흠집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피치가 잘못된 가정을 적용해 검증했다’는 것도 은행권의 반발을 부추긴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피치사의 국내은행 스트레스 테스트 관련 평가’ 보고서에서 “피치사는 국내경제가 올해와 내년에 -2.5% 성장한다는 전제로 손실률을 가정했다고 밝혔으나, 실제 산정된 손실 규모는 -2.5% 성장에서 발생할 수준을 크게 넘어서고 있다”며 피치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에 문제를 제기했다.

은행 건전성 높이려는 자구책 마련해야

마지막 이유는 ‘혹여 피치의 테스트 결과가 맞더라도 국내 은행의 자본건전성은 양호하다’는 것이다. 은행연합회는 향후 피치의 스트레스 결과에 따라 자본 감소액 42조원을 모두 반영해도 2010년 말 BIS 자기자본비율은 8.7%를 유지한다고 밝혔다. BIS비율 8.7%는 최저규제비율(8%)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신용상 연구위원도 “피치가 추정한 대로 42조원의 손실을 반영할 경우, 국내 은행의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과 단순자기자본(TCE) 비율은 지난해 말 각각 12.19%, 6.23%에서 2010년 말 각각 8.7%, 4.0%으로 하락한다”면서도 “그럼에도 이는 선진국보다는 높은 수준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국내 은행권의 재무 건전성과 손실 흡수능력을 고려하면 42조원 규모의 손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은행권의 반발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있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용평가기관은 나름의 기준으로 기업 또는 은행의 건전성을 측정·평가한다”며 “이 때문에 절대적 평가는 있을 수 없지만, 무조건 잘못됐다는 식으로 반발하는 것도 옳지 않은 태도”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는 또 “법적 소송을 검토하는 데 힘을 빼기보다는 은행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라고 지적했다.

피치 보고서 파문에 대한 반박
■ 진동수 금융위원장(3월 13일 서울 파이낸셜포럼 조찬강연에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여건이 전반적으로 안 좋은 상황에서 한국 은행들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만 발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 신동규 은행연합회장(피치 스트레스 보고서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서)
“피치사는 불확실한 가정을 사용해 부정적인 결과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한국의 은행들에 대한 피치사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

■ 전국은행연합회 A부장
“피치 결과가 틀렸다는 데 이론의 여지 없다. 결과는 물론 가정 자체도 틀렸다.”

■ 전국은행연합회 B부장
“만약 피치 보고서 때문에 국가 신인도가 하락하면 은행권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은행연합회 역시 법적 대응을 검토할 것이다.”
“한·중·일 기업 차환발행 취약”
피치의 두 번째 공격

피치사 관계자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실사하고 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월 18일 한국과 중국, 일본의 기업들은 채권 ‘차환발행(Refinancing)’에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고 신용평가기관 피치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차환발행이란 만기 시 자금 수요가 있을 경우 또다시 채권을 발행해주는 것을 말한다. 피치가 이날 발표한 보고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기업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채권을 차환발행하는 데 더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며 세 국가의 시중은행들은 기업의 단기부채를 해마다 갱신해 주고는 있지만 경제여건이 악화되면 이러한 상황은 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 2010년까지 갚거나 차환발행해야 할 빚이 전체의 54%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보고서는 세 국가의 은행시스템이 현재 상당한 압력을 받진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 신용 이용가능성이 더욱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세 국가의 기업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의 기업들만큼 현금을 보유하지 못했다며 이들은 유기적인 현금흐름 창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피치는 세 국가의 기업들이 단기 부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은행권으로부터 장기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평가했다.

한편, 피치의 토니 스트링어 아·태 기업등급 담당 헤드는 이날 FT와의 인터뷰에서 “이 보고서가 아마겟돈을 예측하려는 의도는 아니다”며 “단지 잠재적인 스트레스와 압력을 확인하려는 의도”라고 밝혔다. 그는 “피치가 등급을 산정하는 아·태 지역 국가 중에서 당장 차환 리스크에 직면한 기업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한정연 기자·jayhan@joongang.co.kr


980호 (200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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