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극동이 한국을 부른다 >> “달릴 준비는 됐다. 투자만 기다린다” 

APEC 정상회의 앞두고 러브콜…자원·교통·물류 등 한국 적극 투자 원해 


▎블라디보스톡 시내와 APEC 정상회담이 열리는 루스키 섬을 잇는 연륙교(3.1km) 공사 모습. 프랑스 업체가 시공을 맡고 있다.

극동에 훈풍이 분다. 개발·투자 바람이다. 내년 9월 열리는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준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참에 극동을 키워 아태 경제권에서 입지를 다진다는 게 러시아의 복안이다. 일단 한국은 극동 교역을 선점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갖고 있어서다.

반면, 러시아는 한국의 극동 투자를 강력히 원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현지 분위기를 취재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독수리 전망대. 러시아 문자를 만든 키릴 형제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블라디보스톡 전역을 한눈에 불 수 있다. 11월 14일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블라디보스톡은 사방이 공사 현장이었다. 내년 9월 열릴 예정인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우선 눈에 띄는 건 금각만(골든혼 베이)을 연결하는 해상 교량 공사다. 2.1km 길이의 이 다리는 바스포르해협을 거쳐 루스키섬으로 이어지는 연륙교와 연결된다. 약 12억 달러를 들여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루스키섬과 육지를 잇는 3.1km의 연륙교는 장관이었다. 양쪽에 높이 322m 높이의 주탑이 섰고 도로를 잇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안내를 맡은 연해주 정부 관계자는 “빠듯한 공사기간을 맞출 수 있다고 자신한 프랑스 업체가 시공을 맡았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이 밖에도 고속도로 건설, 도로 재정비, 블라디보스톡~우스리스키 연계 철도, 블라디보스톡 국제공항 현대화, 신공항 건설, 호텔 및 의료시설 건설 등 교통, 숙박, 문화시설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시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 루스키섬은 안내 조감도에서 본 모습을 제법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는 정상회의가 열릴 회의장과 30개 나라 정상이 묵을 숙소, 호텔, 전시장 등 24개 건물이 들어섰다. 루스키섬에 들어간 11월 16일은 눈보라가 심했지만 공사는 쉼 없이 진행됐다. 건물 외관은 대부분 완공된 상태였고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기반 및 철골 공사를 할 때는 북한 노동자가 수백 명씩 투입됐다고 한다. 공사 관계자는 “APEC과 관련된 모든 시설은 내년 2월이면 완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산 원유를 한국, 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연안국가에 수출하기 위해 극동 나홋카 인근 코즈미노에 건설한 원유선적터미널.

한국 극동 교역은 30%, 투자는 1% 차지

블라디보스톡의 ‘상전벽해’는 단지 APEC 정상회의 전시용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러시아 정부는 2009년 수립한 극동지역 사회경제발전 전략에 따라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2013 극동·자바이칼 프로그램’을 통해 연해주 지역을 개발하는 사업에만 5600억 루블(21조원)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또한 ‘에너지 전략 2030’ 계획에 따라 조선소, 컨테이너 터미널,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석유화학단지와 LNG 공장, 쓰레기 처리장,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말 극동·시베리아 지역에 2025년까지 최대 9조 루블(약 330조7000억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블라디보스톡을 포함한 극동지역의 경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규모는 아직 작지만 성장 곡선이 가파르다. 지난해 극동 러시아의 무역액은 235억 달러. 전년 대비 52% 늘었다. 수출(48%)과 수입(62%)이 고루 증가했다. 과거 10년간 가장 높은 증가치다. 극동 경제 규모는 늘고 있지만 교역 구조는 단순하다. 지난해 극동 지역 수출 품목 중 자원·에너지가 74%, 수산물이 12%였다. 수입은 자동차·기계·설비기기가 38%, 섬유 제품이 23%, 식료품이 12%였다.

그렇다면 왜 극동인가. 러시아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극동 지역의 인구 유출(지난 20년간 인구가 25% 감소했다) 방지와 러시아 동서부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목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다른 속내가 있다. 러시아는 유라시아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잇는 극동 지역 개발을 통해 아태 경제권에서 입지를 다진다는 목표를 세웠다. 블라디보스톡총영사관에 따르면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7월에 하바롭스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극동지역이 가진 발전 잠재력과 아태지역과의 경제통합을 고려할 때 러시아와 아태지역 국가간의 경제협력은 새로운 수준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 아태지역에서 러시아의 특화산업인 에너지, 우주항공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규 프로젝트 추진과 새로운 생산기반 확충이 필요하다. 은행·컨설팅·물류·정보기술 분야 등 서비스 분야에서도 선진 시스템을 도입해 매력 있는 투자환경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11월 15일~16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러 극동 비즈니스 포럼’에서 만난 러시아 중앙정부, 주·시정부 공무원들은 한결같이 “극동 러시아에 적극 투자해 달라”는 말을 했다. “중앙정부에서 각 주정부가 얼마나 투자 유치를 했는지 평가한다”고 털어놓는 공무원도 있었다. 하소연하는 말투였다. 그들의 투자 구애는 뜨거웠다. 극동지역 7개 주를 관할하는 러시아 극동관구의 레빈탈 대통령 전권 부대표는 “가스·자동차·건설·조선 분야에는 이미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며 “관광·의료·교육·항공·우주 발사장 등 한국이 투자할 수 있는 아이템이 많다”고 강조했다. 아브라모프 극동연방대 극동경제발전센터 소장은 “러시아는 극동지역의 자원 잠재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고 한국은 대규모 투자 재원이 있다”며 “지금의 투자가 향후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홀로샤 극동해운연구소 교통발전과장은 단순히 자원 운송이 아닌 극동지역 발전을 위한 교통 인프라에 투자해 줄 것을 당부했다. 홀로샤 과장은 “극동 지역 주민들은 사회·경제·환경 모든 분야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업과 투자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레빈탈 부대표는 “러시아는 중국, 일본과 정치적 갈등을 겪었지만 한국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 투자환경 불신, 국가차원 보호막 필요

한·북·러 가스관, TSR(시베리아횡단철도)-TKR(한반도종단철도) 연계, ESPO(동시베리아-태평양 원유) 도입, 사할린 가스전 수입, 북극해 항로 상업화 등 굵직한 사업 외에도 우리나라가 관심을 가질만한 프로젝트는 많다. 연해주는 나호트카 석유화학단지 건설과 가스화학공장 프로젝트, 블라디보스톡 국제공항 현대화, 고속전철, 곡물터미널, 보스토치니 항만특구 개발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바롭스크주는 소비에트가반항 항만특구 개발과 천연가스를 활용한 화학강공품 생산 공장 등에 투자를 바라고 있다. 사할린주는 서부해안의 에너지 개발을 위한 인프라 투자, 사할린 국제공항 건설, 수산물가공처리시설 건설, 폐기물처리시설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극동지역 진출에 서서히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쌍용자동차는 러시아 솔레스와 2억 달러 규모의 조립생산 계약을 맺고 6월 초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대우조선해양은 러시아 국영 조선회사와 합작으로 쓰베즈다 조선소 현대화 협약을 맺었다. 11월 초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포스코는 러시아 메첼과 함께 사하공화국 엘가탄전(철광석)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국내기업 대부분은 극동 투자에 여전히 신중하다. 이 지역 투자환경이 아직 열악하고 투자 정보도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포럼에 참가한 이수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제안하는 프로젝트들이 정부 차원의 큰 그림 아래서 연계되고 실효성 있는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러시아의 정치·정책 리스크를 우려하는 시각도 남아있다. 이와 관련해 세계에 각인된 사건이 있다. 이른바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 사건’이다.

시계추를 2003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BP는 러시아 TNK와 지분 50대 50의 합작회사인 TNK-BP를 설립했다. 하지만 2005년 러시아 정부는 자국에서 자원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외국기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에너지 기업의 지분 50% 이상을 보유하지 못하게 했다. 전략자원 입찰 참여도 제한했다. 러시아 정부는 지분 50%를 보유한 BP가 세금을 체납했다며 압박했고, 가스사업권을 철회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 2008년에는 BP 직원에 대해 간접혐의를 씌우기도 했다. 결국 TNK-BP는 러시아 최대 가스기업이 가스프롬에 지분을 매각했다. BP는 철수했다.

러시아의 이런 태도가 달라졌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정여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정부정책의 불안전성을 비롯해 기업의 투자 환경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기업이 이 지역에 대한 투자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러시아 측도 한국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얘기다. 한국기업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소영술 코트라 블라디보스톡센터 무역관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요즘에는 미움과 분노로 바뀌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동시베리아에 3개의 탄광을 보유하고 있다는 기업인 말라우프씨는 “여러 한국 기업에 석탄산지개발을 제안했는데 너무 천천히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는 “말이 달릴 준비가 다 됐으니 빨리 좀 뛰라”고 했다.

레빈탈 부대표는 “한국은 극동지역 교역의 30%를 차지하지만 투자는 전체의 1%에도 못 미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올 상반기 우리나라와 극동지역 간 교역 규모는 46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 증가했다.

한국은 이 지역 최대 교역국(30%)으로 떠올랐다. 사할린에서 생산한 가스·석유 수입이 늘고, 한국산 자동차와 기계 장비 수출이 대폭 증가한 게 이유다. 지난해 1위였던 중국은 3위로, 일본은 그대로 2위였다. 레빈탈 부대표는 “한국이 시장성이 높은 지역에서 물건을 파는 것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포럼 다음날인 11월 16일 만난 연해주·사할린·하바롭스크·마가단 주정부 실무진들은 “극동 지역에 대한 한국의 관심에 감사하고 있다”면서 “세제 혜택은 물론 한국 기업이 투자하는 데 모든 협력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뼈 있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바롭스크 주정부의 국제경제과장은 “다른 나라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이 먼저 투자에 나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주저하다 다른 나라에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이양구 블라디보스톡총영사는 “극동 주정부는 시마다 투자환경 담당 직원을 둘 정도로 적극적”이라며 “이제는 한국이 러시아에 믿음을 보여줄 때”라고 강조했다.

이 총영사는 “러시아 공무원들은 한국에 대해 밥상을 다 차려놨는데 왜 안 오느냐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양국 정부가 나서 경제 협력 프로그램을 만들고 정부 차원에서 기업의 보호막이 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비즈니스에만 전념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정부와 기업이 민관 형태로 러시아에 경제특구를 제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극동이 한국을 부르고 있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다.


■ 레빈탈 극동관구 대통령 전권부대표

“투자 불편한 점 있으면 내게 연락하라”


러시아정부는 러시아 전역 89개 행정구역을 8개 관구로 나누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전권 대표(부총리급)를 파견한다. 극동관구는 연해주, 사할린주, 하바롭스크주 등 7개 주를 관할한다. 11월 15일 한·러 극동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한 알렉산드로 레빈탈 극동관구 대통령 전권부 대표는 8시간 동안 진행된 포럼 내내 자리를 지켰다. 그는 주요 현안이 제기될 때는 연단에 나와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해명했다. 그는 “자원 분야 외에도 한국과 극동 러시아가 협력할 분야가 많다”며 “한국이 적극적으로 투자해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

어떤 분야에 한국의 투자를 원하나?

“쌍용자동차와 대우조선해양이 이미 자동차 조립공장과 조선소 건설에 투자했다. 극동지역은 에너지, 자원 분야 외에도 교통, 물류, 농수산업,, 관광, 의료 등 다양한 투자대상이 있다. 한국이 많은 투자를 해주길 바란다. 우주 발사장도 건설할 계획인데, 이 분야에도 한국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업 투자가 저조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들었다.

“한국은 러시아 극동지역 교역의 약 30%를 차지한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많다. 하지만 한국의 투자 비중은 1%도 안 된다. 당장 시장성이 있고 수익이 나는 곳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극동지역 투자환경에 대한 불신 아니겠나.

“그동안 좀 그랬다. 하지만 최근엔 상당히 달라졌다. 주정부마다 구체적인 투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지역별로 담당 직원도 별도로 두고 있다. 주정부에 설립된 투자환경협의회에도 외국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 투자와 관련, 불편한 점이 있다면 나에게 바로 연락해도 좋다.”

왜 한국 기업인가?

“러시아는 과거부터 중국·일본과는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한국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러시아의 양질의 풍부한 자원을 한국도 갈망하고 있지 않느냐. 중요하고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왜 주저하는지 모르겠다.”

블라디보스톡 =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1114호 (2011.11.28)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