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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 잇는 중소·중견 제조기업] 가족기업은 3代가 고비, 양자라도 영입해 버텨라 

맥킨지 “창업 후 3대까지 생존할 확률 13%”
상속세 부담이 가업 승계 발목 잡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가족기업의 힘이 새삼 부각됐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순발력으로 위기를 빠르게 극복해서다. 영국 경제지 FT는 “글로벌 불황 이후 가족기업이 위력을 떨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모든 가족기업이 그런 건 아니다. 적절한 가업승계로 장수기업의 발판을 마련한 곳만이 제힘을 발휘했다. 문제는 가족기업이 ‘3대(代)’를 어떻게 넘기느냐다. 세계적 컨설팅그룹 매킨지는 “가족기업이 3대에서 생존할 확률은 13%”라고 진단했다. 우리 가족기업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역경을 뚫고 ‘3대 경영’을 하거나 준비 중인 중소 제조업체를 취재했다. 가족기업의 육성전략과 과제도 살펴봤다.

일본의 대표적 가족기업 ‘구레다케’는 먹과 붓을 만드는 회사다. 1902년 창업한 구레다케의 업력은 올해로 109년, 5대 째 가업을 잇고 있다. 언뜻 보면 전통 먹과 붓을 생산하는 장인기업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구레다케는 100년 넘게 이어온 먹·붓 만드는 기술을 응용해 첨단 제조기업으로 변신했다. 1970년대 현대적인 ‘붓펜’을 선보였고, 최근엔 먹 제조기술을 기초로 개발한 ‘카본(탄소봉)기술’을 활용해 융설제(골프장 눈 제거제)·자동발광표지·도로병(중앙선 구분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구레다케의 직원수는 200명이 넘는다. 지난해 매출은 45억7520만엔(약 687억원)이었다. 2008년 ‘일본기업의 장수요인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낸 한국은행 정후식 국제경제실 부국장은 “구레다케는 성공적인 가업승계를 통해 안정적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적도 늘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8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인도의 타타(자동차), 멕시코의 카르소(전자제품) 등 가족기업이 예상과 달리 세계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다. 가족기업은 아직도 경쟁력이 있다.” LG경제연구원도 2009년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가족기업은 과감하고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변화와 위기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고 있다.” 구로다케는 좋은 예다.

가족기업은 말 그대로 가족이 ‘대(代)’를 이어 경영하는 것이다. 가족기업 하면 창업 단계의 중소기업, 자영업체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글로벌 컨설팅그룹 매킨지의 자료를 보면 S & P지수에 속한 기업의 30%, 프랑스 250대 기업의 40%가 가족기업이다. 국내 대기업도 대부분 가족경영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후 가족경영 각광

가족기업은 대개 괜찮은 성과를 올린다. 정후식 부국장은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유럽 6개국 기업의 주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가장 큰 폭으로 오른 10개 기업은 모두 가족경영을 하고 있었다”며 “특히 독일 가족기업의 주가는 같은 기간 206% 올랐는데, 이는 일반기업 상승폭(47%)의 4배에 달한다”고 밝혔다.


물론 모든 가족기업이 빼어난 성과를 올리는 건 아니다. 가족기업이라도 초창기에 무너질 수 있다. 경영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경영권이 3대(代)로 넘어갔을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고 말한다. 매킨지는 이를 통계로 풀어 설명했다. “창업 후 2대에서 3분의 1이 살아남고, 3대에서는 그중 13%가 생존한다.” 일본에도 ‘3대째는 양자(養子)’라는 말이 있다. 3대째 쓰러지는 가족기업이 많으니 현명한 CEO를 양자라도 삼아 영입하라는 것이다.

3대에 문제가 커지는 이유는 뭘까.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가족기업이 3대에 접어들기 위해선 최소 50년이 걸린다”며 “그때가 되면 산업환경이 1대·2대와 비교했을 때 크게 변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후계자 문제가 진통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나경환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은 “기업 규모와 특성에 따라 원인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세대별 가치관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지는 시기가 3대째”라며 “경영권이 3대로 넘어가면서 가업승계가 끊기거나 회사가 무너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중소 제조기업 중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중소기업중앙회 가업승계지원센터의 회원사 160곳 가운데 3대 가족기업은 4곳뿐이다. 한국생산성본부에 소속된 장인계승기업 15곳 가운데서도 단 1곳만이 3대 경영을 하고 있다. 조봉현 연구위원은 “국내 제조업 역사가 짧은 것도 이유지만 ‘3대 경영’이 시작되면서 쓰러진 기업이 그만큼 많다는 분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무엇이든 고비를 넘으면 평탄한 길이 나온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매킨지는 “3대 경영 이후에도 살아남는 가족기업은 그 이후 우수한 경영성과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3대로 가업이 승계되면 그 기업은 장수기업의 반열에 들어선다. 장수기업은 일반적으로 100년가량 지속된 곳을 말한다. 일본에는 장수기업이 3000개가 넘는다. 이중 74%는 가족기업이다. 장수기업은 좋은 경영성과를 낸다. 노용진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의 매출액·시가총액 두 부문에서 모두 30위 안에 드는 17개 기업 가운데 12개 기업은 창업한지 100년이 넘은 기업”이라고 말했다.

전통기술 발판으로 첨단기술 만들어

3대째 운영되는 가족기업의 장점은 또 있다. 전통기술 노하우가 가업승계를 통해 전달될 뿐만 아니라 이 전통기술이 첨단기술개발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조봉현 연구위원은 “가족기업의 전통기술이 첨단기술로 바뀌는 시기는 대개 3대에 접어들면서다”며 “1대는 창업, 2대는 성장에 집중하는 반면 3대 CEO는 혁신에 초점을 맞추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1917년 창업한 ‘기코만 간장’은 가업 대대로 내려온 간장발효기술을 응용해 미생물 검사장치를 개발했다. 3대 CEO가 일군 작품이다. 이 장치는 미국 나사가 화성 무인탐사기를 발사했을 때 위생검사에 활용됐다.

국내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58년 창업한 오성섬유공업은 전통적인 염색가공업체였다. 2대째까지 전통기술과 업종을 고수하던 이 회사는 3대 CEO에 창업주의 손자 백창욱(50) 대표가 경영을 한 이후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연구개발(R & D)에 사업초점을 맞춘 백 대표는 2009년 신소재 CDP(염기성 가염형 폴리에스테르) 염색가공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나일론·폴리에스테르의 단점을 극복한 CDP는 그동안 염색기술이 없어 의류소재로 활용되지 못했다. 오성은 지난해 또 다른 신소재인 ‘테드라이드’를 활용한 친환경 의류개발도 마쳤다. 테드라이드는 땀이 빠르게 마르는 소재다.


1968년 창업한 부품업체 이구산업도 마찬가지다. 창업 당시 영세부품업체였던 이구산업은 구리를 잘라 납품하는 게 전부였다. 2대를 넘어 3대 경영체제가 구축되는 지금, 이구산업은 반도체 핵심부품을 납품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오성섬유공업 백창욱 대표는 “우리처럼 가업을 잇는 CEO들은 어릴 때부터 관련 계통에 있었기 때문에 기술 습득이 빠르고 시장흐름을 읽는 데 익숙하다”며 “가업승계를 통해 기술과 경영노하우가 알게 모르게 전달됐기 때문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세계 각국은 장수가족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핵심은 가업승계를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은 2008년 ‘중소기업 경영승계 원활화법’을 제정했다. 상속인이 관련 권리를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는 특례조항이 있다. 독일은 가업승계 이후 기업 연속성과 일자리가 유지될 때 상속세를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은 증여세의 최고 세율을 개인소득세(지난해 최고세율 35%) 수준으로 내렸을 뿐만 아니라 피상속인에 발생한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를 사망시점에선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무엇보다 가업을 승계하면 ‘부를 대물림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가족기업은 ‘불로소득을 올리는 곳’이라는 따가운 시선도 많다. 상속세도 가업승계를 원하는 기업인의 발목을 잡는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영국(40%)·미국(35%)·대만(10%) 보다 높다. 상속세율이 우리와 비슷한 국가는 네덜란드(68%)·프랑스(60%)·독일(50%)이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상속인과 피상속인의 친인척 여부에 따라 차등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상속이 해당하는 직계상속은 네덜란드(27%)·프랑스(40%)·독일(30%) 모두 우리보다 훨씬 낮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올 8월 발간한 ‘주요국의 상속세 부담 비교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상속세율은 우리나라와 일본(50%)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또 있다. 2009년 중소기업 상속공제율을 20%에서 40%로 확대했지만 아직도 일본·독일의 절반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상속·증여세수 비율은 0.29%로 OECD국가 평균(0.15%)보다 2배 가량 높다.

가업승계 막는 상속세율 낮춰야

과도한 상속세 부담으로 기업이 경영권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 2008년 세계 1위 손톱깎기 제조업체 쓰리세븐의 주인이 잠시나마 중외신약으로 변경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쓰리세븐 창업주 김형주 회장의 타계로 발생한 상속세 150억원을 유족들이 마련하지 못해 지분을 중외신약에 넘겼다. 유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경영권을 되찾았지만 상속세 부담 때문에 창업자가 맨손으로 일군 기업을 날릴 뻔했다. 남영호 건국대 사회과학대학원장은 “중소기업이 가업승계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상속세”라고 말했다. 정후식 부국장은 “기업이 원하는 대로 상속세를 무작정 낮춰주면 모럴해저드가 발생할 소지가 커진다”며 “상속세 때문에 장수할 수 있는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제도나 장치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수가족기업을 키우기 위해 해결할 과제도 많다. 기업매각·양도 를 통해 제3자에 대한 가업승계가 이뤄질 수 있는 인수·합병(M & A)시장이 필요하다. 가업승계의 지원과 홍보를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통합기구도 만들어야 한다. 정후식 부국장은 “2008년 이후 가족기업 육성을 위한 제도가 많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분산돼 있어 효과가 나오질 않는다”며 “분산된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나경환 생기원 원장은 “중소 가족기업 스스로 전통기술을 첨단기술로 바꿀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책을 만들어야 할 때”라며 “그래야 가족기업의 명맥이 이어져 장수기업이 많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족기업이 노력할 부분은 물론 있다. 후계자를 발굴하고 후계자 양성시스템을 정비하는 건 기업의 몫이다. 체계적인 가업승계 준비는 장수기업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형제·친척간 분쟁을 막는 수단도 미리 강구해야 한다. 남영호 원장은 “2대까지는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지 않지만 3대 때는 다르다”며 “가족기업을 장수기업으로 만들고 싶다면 ‘가화만사성’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활한 가업승계는 경쟁력 있는 100년 기업의 디딤돌이다. 3대가 고비다.

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1115호 (201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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