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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경영자 재기 프로그램] 그들은 살기 위해 외딴섬을 찾았다 

12명 기업인 통영 죽도에서 4주간 합숙 ‘재기 교육’…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파격 실험 


▎11월 30일 오전 7시경 통영 죽도연수원에서 재기 교육을 받고 있는 전직 CEO 두 명이 죽도 뒷산 평바위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명상하고 있다.

아무도 생각을 못했고, 생각했어도 실행하지 못했다. 부도와 폐업으로 음지로 숨어든 기업인들을 모아 섬에서 합숙하며 재기 교육을 한다니…. 남해바다 외딴섬 죽도에서 그런 도전이 이뤄졌다.

세상을 원망하며 피하던 기업인 12명은 죽도에 모여 4주간 재기의 각오를 다졌다. 그들은 마음을 치유했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죽도를 찾아 그들을 만났다.


11월 29일 경남 통영에서 죽도로 가는 여객선은 결항됐다. 하루 두 번 출항하는 ‘섬누리호’를 수리하는 날이었다. 다른 여객선을 타고 제승당(충무공의 혼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한산도로 갔다. 섬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진두 마을로 가, 죽도 어민의 5인승 낚싯배를 얻어 탔다. 섬에서 섬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배에서 본 죽도는 아담했다. 한때는 ‘돈섬’으로 불렸던 곳이다. 섬 앞바다에는 삼치, 방어, 참돔이 넘쳤다. 1970년대에는 500여 명이 살았다. 마을엔 배가 50척, 해녀만 100명이 넘었다. 섬은 마을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줬고, 부자가 된 사람들은 섬을 떠났다. 이제 섬은 40세대 50여 명이 지킨다. 홀로사는 노인이 대부분이다. 구멍가게조차 하나 없는 죽도는 조용한 외딴섬이었다.

이 섬에 한시적인 거주 인구 12명이 추가됐다. 모두 전직 CEO다. 한때 기업을 꾸렸고,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실패한 이들이다. 생전 들어보지 못했을 외딴섬에 그들은 왜 있는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오로지 재기하기 위해, 그들은 11월 7일 입도(入島)했다.

29일 오후 6시, 폐교한 분교를 리모델링 한 죽도연수원 강의실에서 형광색 점퍼를 입은 40~60대 남자들은 명상 중이었다. 강의실 강단에는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가?’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좌절하지 말고 도전한다’, ‘실패도 학습이다’ 등의 문구도 보였다. 이곳에서는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실시하는 ‘실패 중소기업 경영자 무상 재기교육’이 진행 중이었다<박스 기사 참조>. 부도를 맞거나 파산한 기업인, 경영위기에 직면한 CEO에게 무료로 재기의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올해 처음 실시되는 4주짜리 프로그램이다.

하루 두끼 먹고 1인용 텐트에서 잠 자

강사가 입을 연다. “눈을 감고 가장 기뻤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조용한 음악이 흘렀다. 연수생들은 눈을 감았다. 표정은 편해 보였고, 진지했다. 명상은 20분 가까이 진행됐다. 명상이 끝나고 한상하 강사(교육컨설팅 전문업체 에너자이저 대표)는 “우리 사장님들이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고 말했다. 교육 23일차 되는 날이었다.

한 연수생은 섬을 찾은 첫날을 이렇게 술회했다. “통영에 모여 배를 타고 오는데 모두 경직되고 위축돼 있었다. 말을 섞기는커녕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온갖 근심과 실의에 찌든 얼굴,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난파선을 타는 것 같았다.”

그럴 만하다. 신문 기사와 광고를 보고 찾아온 12명의 연수생 중 최고 연장자는 66세다. 48세 전직 코스닥 상장사 사장이 최연소다. 1명을 제외하고는 길게는 10년 전, 짧게는 3개월 전 부도를 맞거나 폐업을 경험한 기업인이다. 대부분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다. 음울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사나흘 지나면서다. 처음에는 ‘정부 자금이나 받아내려고 우리를 이용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일부 연수생들은 강의 내용과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의 의지를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박영호(51·가명)씨는 “혹시 멸치잡이 배로 끌려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연수원 설립자(전원태 MS코프 회장)를 만나고 교육이 시작되면서 진심인 것을 알았다”며 웃었다.

대지 4200㎡에 펼쳐진 연수원 환경은 좋았다. 강의실과 식당, 샤워실은 깨끗했고, 숙소도 넓었다. 넓은 잔디에 쉴 수 있는 휴식 공간도 많았다. 무엇보다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절경은 압권이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그 옛날 33명의 범죄자가 목숨이라도 부지하려 실미도를 찾았다면, 이들 역시 살기 위해 죽도를 찾았다.


그들은 편한 잠을 자지 않았다. 따뜻한 숙소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연수 2주차부터 연수원 뒷산에서 야영 생활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 어른 하나가 겨우 들어갈 1인용 텐트에서 잠을 청했고, 명상을 했다. 텐트와 텐트 사이는 30보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되도록 많이 갖기 위해서다. 연수원에서 강제한 것도 아니다. 연수원을 총괄 관리하는 박창환 MS코프 전무는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한 것인데, 몸이 아픈 한두 명 빼곤 대부분 텐트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식사도 아침 8시, 오후 4시 30분 두 끼만 했다. 금주는 원칙이었다. 50~60대, 그것도 심적 고통에 오래 시달려 온 쇠약한 실패 기업인에게는 고행의 시간이었을 텐데, 수료를 나흘 앞둔 날 만난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어쩌면 그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인지 모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을 학대했다.

김성현(55·가명)씨는 22년간 사업가로 살았다. 현대건설에 다니다 1987년 회사를 차렸다. “가방 하나 들고 시작한 사업”이라고 했다. 동유럽에 섬유를 팔았다. 수완 좋은 그는 사업을 넓혀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는 침구류 사업에 뛰어 들었다. 침대문화가 확산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적중했고 사업은 번창했다. 그는 “소비의 중심은 여자”라는 생각으로 화장품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1대 1 맞춤형 화장품이라는 컨셉트는 먹혀 들었다. 그는 매출 1600억원, 계열사 여섯 곳에 직원 970명을 거느린 회사의 CEO로 성장했다. 그는 “재벌을 꿈꿨다”고 했다.

중견기업 문턱에 올라선 2009년 봄, 상상하지 못했던 날이 왔다. 사업을 시작할 때 그는 절친한 친구의 동생을 자기 회사에 취직시켰다. 심장병으로 죽은 친동생을 대신해 김 사장은 그를 살뜰히 챙겼다. 대학을 보내고, 결혼을 시키고, 집을 사줬다. 20년이 지난 후 그는 동생을 사장 자리에 앉혔다. 어느 날 그 동생이 말했다 . “형님, 이틀만 출장 갔다 올게요. 미국으로 병문안 갈 일이 있어서.” 그날이 김성현씨가 나락으로 떨어진 날이었다.

믿었던 동생은 거액의 회사 어음을 사채업자에게 할인한 후 현금을 들고 해외로 도망갔다. 사채업자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백지당좌수표도 담보로 맡긴 채였다. 회사는 부도를 맞았다. 그는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친구가 무릎 꿇고 울며 “동생을 잡아올 테니 고소만 취하해 달라”고 했다. 그는 취하했고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법적으로 재고소는 할 수 없었다. 김성현씨는 “막을 수도 있었는데, 분노가 눈을 가로막아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며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침에 술, 점심에 술, 저녁에 술”

이후 그는 “아침에 술, 점심에 술, 저녁에 술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그 놈이 가져간 건 돈이 아니라 내 꿈과 비전,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용서하고 일어나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한 사람을 패주고 싶었단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 죽도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 그는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재기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 와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며 “분노는 마음속 상자에 담아두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내 성공 스토리를 취재오라”고 말했다.

최봉석(53)씨는 6년째 재기를 위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연구소 출신인 그는 2000년 시화공단에 도장설비와 주물 표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는 숏트 블라스트 머신을 취급하는 회사를 차렸다. 5년 만에 회사는 매출 30~40억원 대를 올리는 안정적인 회사로 컸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주가 갑자기 줄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음식물쓰레기 처리기 개발에 나선 상태였지만, 위기는 한 순간 몰려왔다. 한 달 4억원 정도인 회사 운영자금을 대기가 버거워졌다. 신용보증기금에서 빌린 대출은 만기가 다가왔다.

사채에서 돈을 빌려 막아봤지만, 법인카드 한도는 한꺼번에 대폭 줄고 은행은 대출상환을 압박했다. 결국, 돌아온 13억원 어음을 막지 못하고 2005년 회사는 부도났다. 아파트 두 채를 날렸고, 공장과 장비·제품은 직원들에게 양도했다. 그걸로 모든 게 끝이었다. 그는 방 두 칸짜리 집을 겨우 얻었다. 딸은 학교를 자퇴했고, 아들은 군대를 갔다. 그는 1년간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자괴감이 너무 심했다”며 “1년이 내겐 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의 눈은 충혈됐다.


▎통영 죽도에 있는 죽도 연수원. 분교를 리모델링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그는 부도나기 전 개발하려 했던 음식물쓰레기 처리기에 몰두했다. 역시 쉽지는 않았다. 중간에 도움을 주겠다는 기업을 만났지만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때 도산했다. 한 업체에는 기술을 몽땅 빼앗길 뻔 했다. 최봉석씨는 “죽도에서 내가 이루려 했던 것 이상을 얻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텐트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데 순간 ‘우주가 내 맘 속에 있다’는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그걸로 모든 자신감이 회복됐다.

그는 4주 동안 꼼꼼히 적은 노트를 보여줬다. 이런 말이 써 있었다. ‘나의 꿈은 이미 이루어졌다’. 최봉석씨는 사업계획서를 보여주며 자신이 개발한 제품을 설명했다. “내가 개발한 업소용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는 하루 90kg을 처리할 수 있어요. 기존 제품은 40kg 안팎입니다. 처리시간 역시 5분 1로 줄였습니다. 정부 인증을 받고 내년 말이나 2013년 초쯤 시장에 진입할 것입니다. 투자 받는 게 관건이지만,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 이후에 건조된 음식물 쓰레기를 연료로 쓰는 사업도 구상 중이에요.” 사업계획서에는 ‘장기 매출 목표 3000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했어요”

배창호(52)씨는 제조업, 음식점 등을 하며 흥망을 겪다 죽도에 왔다. 대우그룹 계열 섬유회사에 다녔던 그는 회사에서 최초로 해외 연수를 간 엘리트 엔지니어였다. 그는 1995년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섬유공장을 차렸다. 니트류를 생산했다. 하지만 이미 섬유산업은 사양의 길로 가는 중이었고, 웬만한 회사는 중국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2년 만에 그는 스스로 회사를 접었다. 이후엔 섬유공장의 설계·가동·품질관리 등을 컨설팅·시공해주는 회사를 차렸지만 이 역시 1년 만에 그만뒀다. 국내 기계가 고철값에 후진국으로 팔려가는 와중에 그는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에는 철판요리 프랜차이즈의 지사권을 따내 재창업에 성공했다. 외환위기가 몰아 닥쳤지만 음식점은 잘 됐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지나면서 다시 내리막. 결국, 사업을 접었다.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한 배창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업에 실패하면 채무 관계로 얽힌 지인들과 원수지간이 됩니다. 사장님 소리 듣다가 망하면 정서적으로 위축되고 모든 것에 소극적이 되죠. 가족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데 내겐 달리 와 닿습니다. 혼자만의 고통이 커지고, 악감정이 생기고….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절대 재기할 수 없어요.”

그는 이제 고통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그는 “이 곳에 와서 마음 공부 잘했고 많은 성찰을 했다”며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이런 시공간이 제 인생에 올지 몰랐다”며 만족해 했다. 그는 부동산 컨설팅업을 준비하고 있다.

박영호(51, 가명)씨는 불과 몇 달 전 회사가 부도 났다. 그는 2003년 이사로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분사한 온라인 B2B 업체 대표가 됐다. 매출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안정적인 공기업을 거래처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달의 원인이었다. 회사 매출의 70%를 의존하던 공기업이 내부 정책으로 인해 갑자기 구매를 끊었다. 매출은 하락했고, 결국 부도가 났다. 오피스텔은 경매에 넘어갔다. 집은 압류됐다. 그 과정에 친구에게 배신도 당했다. 원형탈모가 생겼고,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는 일이 반복됐다.

모든 게 억울했던 그는 이제 다른 생각을 한다. 박씨는 “이렇게 살다 내가 죽겠구나”는 생각이 들던 차에 신문광고를 보고 이곳에 왔다. 그는 “내 자질이 부족했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미흡했다”고 말했다. 박영호 전 사장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의 패잔병이고 루저인데, 그 실패와 실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감을 얻었고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당장 서울에 가 교통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세칭 국내 최고 대학을 나와 코스닥 상장사 대표이사를 지냈던 정 모(48) 사장은 “과거를 떠올리기 싫다”며 한사코 인터뷰는 거절했다. 하지만 그 역시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해 정말 좋다”며 “이 마음을 갖고 서울로 올라가 산적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많은 연수생들은 “정 사장이 정말 절박하게 명상하고 생활했다”며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패 경영자 재기교육을 받는 12명의 연수생이 강의를 듣고 있다.

죽도 연수원 24일 차인 11월 마지막 날 새벽 6시. 연수원과 연수원 뒷산에 기상 노래가 울렸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 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번 두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 거야’. 기상 노래가 끝나고 곧바로 명상 CD가 퍼진다. 정 모 사장 등 연수생들은 텐트에서 나와 어두운 바다를 보며 명상을 했고, 동이 트자 산책로를 걸었다.

아침 8시 식사를 한 그들은 죽도 선착장 쪽으로 가 쓰레기를 치우는 봉사활동을 했다. 11시 다시 수업. 강의실에는 105 달러로 KFC를 세운 커널 할랜드 샌더스의 동영상이 나왔다. ‘다 늙어서 무슨…’, ‘1008번 거절당했고 실패하면 방법을 달리해 도전했다’는 문구에 연수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떤 연수생은 눈물을 닦았다. 동영상이 끝나고 다시 명상. 그리고 분임 토의 시간이 이어졌다. 3명씩 4조로 나눠, 서로 멘토가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은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빨리 재기하고 싶어 조급해지면 또다시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 그걸 조심해야 한다.” “나가서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파도라면 더 큰 파도야 오너라.” 그들은 자주 손뼉을 쳤고, 모든 시간에 집중했다. 수업이 끝날 무렵 한 연수생이 나지막이 말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아침에 내 입에서 노래가 나오더라.” 1600억 매출을 올리다 하루 아침에 망했다던 김성현 사장의 말이었다.

다시 세상과 맞서다

12명의 실패 기업인은 이런 4주 동안의 생활을 통해 마음의 벼랑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치유됐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실패했다 재기에 성공한 기업인과 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현직 CEO와 심리 치료사, 정신과 의사 등 11명이 NPO (Non-Profit Organization) 자격으로 무료 강의를 하며 그들을 도왔다.

이제 그들은 다시 현실의 벽과 맞서야 한다. 그들이 가장 잘 안다. 한 연수생은 “우린 담보도 없고, 신용불량자”라며 “기술보증이나 신보에서 대출을 받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했다. 그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제도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다른 연수생은 이렇게 말했다. “신용불량은 사형선고나 다름 없다. 현 제도에서 어쩌면 재기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스타트라인에서 서고, 링 위에 올라설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에 차 있었다. 자신을 믿게 된 후의 변화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섬을 떠나기 사흘 전, 아직 세상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12명의 연수생들은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당분간 그들끼리만 간직해야 할 사진이다. 그들은 환히 웃으면 주먹을 들고 소리 높여 ‘파이팅’을 외쳤다. 크게 박수를 쳤다. 그 소리가 섬에 퍼졌다. 12월 3일 그들은 죽도를 떠났다.


▎전원태 MS코프 회장

실패 경영자 무상 재기교육은

전원태 MS코프 회장이 사재 털어 운영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실시한 ‘실패 중소기업 경영자 무상 재기교육’은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시도였다. 사업하다 실패하면 여간해서 재기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에 많은 것을 시사하는 파격적인 실험이다. 이 교육은 20억원을 출연해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을 설립한 전원태(63) MS코프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MS코프는 공용 가스를 제조, 판매하는 회사다. 직원 350명, 매출 1300억원 대의 회사다.

1973년 회사를 차린 전원태 사장은 초반에 승승장구하다 불의의 일을 겪는다. 가스폭발 사고가 나면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났다. 위기를 겨우 넘겼지만, 결국 2차 오일쇼크로 부도를 맞았다. 자살하려 했던 그가 우연히 찾았던 곳이 통영 죽도다. 그곳에서 그는 재기를 다졌고, 결국 건실한 회사를 키웠다. 실패 중소기업인 재기 교육은 그의 경험이 만든 산물인 것이다. 전원태 회장은 이번 1차 교육을 시작하는 데만 2억원을 들였고 직원을 새로 뽑았다(전 회장은 본지 인터뷰 요청에 “내가 중요한 게 아니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처음 하는 실험은 쉽지 않았다. 올 8월 중소기업청에서 재단법인 인가를 취득한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은 첫 사업으로 이번 교육을 구상했다. 애초 모집하려던 인원은 25명. 교육·숙식비는 전액 무료다. 대상은 부도를 당했거나 회사가 위기에 처해 있는 기업인이었다. 박창환 전무는 “연수생을 모집하는 게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개발원 자체가 인지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 실시하는 교육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20명이 최종 선정됐고, 통영에 도착한 것은 1기 연수생 12명이었다. 교육은 컨설팅그룹인 에너자이저가 위탁을 맡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상하 에너자이저 대표는 “설립자의 취지에 적극 공감해 우리 회사도 NPO 자격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은 향후 연 3회 정도 재기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박창환 전무는 “1기 교육의 미흡한 점을 적극 개선해 보다 실효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수료한 연수생을 위해 실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도 적극적이다. 12월 2일 1기 수료식에는 중소기업청 벤처정책과장과 사무관, 중소기업진흥공단 자금지원팀장이 참석해 연수생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1116호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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