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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깨는 인사로 진정한 탕평 추진 

김준태의 왕의 결단(26)-정조의 이조판서 이만수 인사 

김준태 칼럼니스트
정조 24년 6월의 어느 날, 가상 일기…상피, 상거호대 규칙 흔들어 왕권 강화 노려



작년부터 조금씩 아프던 몸은 올 봄을 넘기며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버티기가 힘들어 자리에 앉기만 하면 정신을 잃고 잠이 드니, 너무나도 답답하다.”(3.3 어찰).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와 얼굴이 부어 오르며 목과 폐가 마르곤 했다. 귀 뿌리(耳根)와 치흔(齒痕)의 핵이 번갈아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4.19 어찰).

아마도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러다 내가 죽으면 어린 세자가 어찌 저 노회한 대신들을 상대할수 있으랴. 수정전(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은 또 어떡하고. 내가 추진했던 정책들도 물거품이 되겠지. 이대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원칙만 앞세우는 신하에 일침

하여 나는 이만수를 이조판서에 임명했다(5.12 실록). 이조판서 한사람을 교체한 것이 무슨 큰일이냐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만수는 소론 시파(時派)의 인물이다. 이만수를 이조판서로 임명한 것은 신하들이 규칙이라고 부르는 두 가지를 흔들어 놓기 위해서였다.

이만수의 형이 우의정 이시수이니 형제가 나란히 고위관직을 맡을 수 없다는 ‘상피(相避)’에 걸리고, 이조참판 조윤대가 소론이니 판서와 참판은 서로 다른 붕당이 맡아야 한다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원칙에 어긋난다. 나는 이 두가지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진정 국가에 필요한 인재라면 형제가 함께 요직에 임명되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쌍거호대’로는 기계적인 공정성만 이룰 수 있을 뿐, 진정한 탕평을 이끌어낼 수 없다. 대저 인사의 궁극적인 권한은 국왕에게 있다. 훌륭한 인재가 있다면, 쌍거호대든 상피든 그 적용 여부는 내 판단에 따라 조절할 수 문제다. 굳이 이만수를 이조판서로 고집한 까닭도 그래서이다. 나는 임금의 권한을 확고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만수는 이런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이 듣건대 신하는 임금을 섬기면서 직분을 다하는 것이 충성이고, 사양하는 것은 바른 의리가 아니라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인사(人事)에 밝지 못하고, 또한 형이 정승에 있으니 이조판서를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상소를 올려왔다. 나는 이만수를 질책했다.

“인혐(引嫌:책임을 지고 사퇴함)하지 않을 일인데 인혐을 하는 것도, 마땅히 인혐할 일인데 인혐하지 않는 것도 모두 임금의 명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겨우 힘겹게 몸을 지탱할 정도로 허약해진 나에게 이처럼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있게 하니 과연 (이만수의)마음이 유쾌한지 모르겠다.” “내가 늘 강조하지 않았는가.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라고.”(5.24 실록).

나의 노여움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은 김이재였다. 김이재는 ‘(임금의 명을) 사양하는 것은 바른 의리가 아니다’라는 이만수의 말을 비판하며,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예법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사양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5.29 실록).

내가 평소 불쾌히 여기던 것이, 조정에 나와 ‘백성을 근심하고 나라를 위한 계책을 세우기 위해’ 헌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사로이 명성을 높이는 일에만 치중하며, 조정에 출사하라는 임금의 명을 거부하는 것이 도리를 지키는 것인 마냥 생각하는 자들이다. 임금의 뜻을 무시하고, 임금이 확립한 의리(義理:옳은 원칙)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우는 그릇된 ‘사습(士習)’에 물든 자들이다. 김이재가 바로 그러한 자로, 그의 상소는 나를 비웃는 것이었다.

김이재를 용서할 수가 없어 귀양을 보내도록 하자, 여러 신하들이 재심을 촉구했다. 나는 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신하들에게 명확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월 그믐날 경연 석상에서 김이재를 처벌한 취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나의 고심은 오래 전부터 배어들어 있는 나쁜 풍속을 전부 새롭게 일신하고, 나아가 사악한 무리들까지 모두 착한 백성으로 교화시키는 데 있었다. 하여 처음 보위에 올랐을 때부터 정정당당한 규범 하나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의리를 천명하고 이를 대도(大道)로 향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이 규범이 확고히 정해진 뒤로 여기에 동참한 자들은 나라의 편으로 충신이고 군자이며, 여기에서 벗어난 자는 역적의 무리로 불충한 자이며 소인이었다. 의리에 관계되는 일들은 실로 못을 부러뜨리고 쇠를 자르듯 과감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며, 규범이 한번 세워졌으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신하 된 자가 누구라서 이러한 규범은 절대로 바꾸어 옮길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신하들로 하여금 내가 세운 ‘의리’에 적극 순응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임금이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직 “임금만이 극(極:중심 원칙)을 만들고 극을 세울 수 있는 법이다.”(정조24.6.16). 군신의 위계를 확고히 정하고, 임금을 정점으로 온 신하들이 일치단결해야 우리 앞에 놓인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좌의정 심환지에게도 편지를 썼다. “이조판서는 명목상으로는 다른 색목(붕당)이지만 실제로는 벽파에 가깝다. 예로부터 세상의 도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이를 다른 색목이라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조판서처럼 벽파에 가까운 사람은 마치 우리 편 사람인 것처럼 더욱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아닌가.”(5.30 정조어찰).

내 결정을 반대하지 않도록 물러설 명분을 준 것이다(필자 주: 이 어찰을 근거로 이만수가 벽파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시파인 김이재가 이만수의 이조판서 임명을 반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만수는 순조 초기 벽파의 실각 이후에도 건재했던 시파 인물이다).

정권 말 권력 누수현상 조짐도

그런데 내가 내린 교시에 대해 신하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료 모두가 나의 의리에 적극 동참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예조참판 이서구의 상소 한 장을 제외하면 지지를 하든 비판을 하든 아예 그 어떤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당한 것이다. 극심한 울화로 나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음에도) 조정에서는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나의 가슴속 화기는 더욱 심해진다. 우선 경들 자신부터 임금의 뜻에 부응할 방도를 생각하라.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지만 의리에 관한 문제에서는 그 기준을 확립한 후 조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 신하라는 자들이 감히 이에 반대하여 나를 이기려 들고 있다. 내가 고수하고 있는 의리에 혹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내 어찌 무조건 내 말을 따르라고 강요하겠는가. 하지만 하늘과 땅의 도리에 부합되는 의리에 대해서는 또한 어찌 이를 어지럽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있겠는가.”(6.16 실록).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절규하듯 말했지만 신하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모두들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가 정성을 다해 저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진즉에 무력으로라도 반대자들을 제압해야 했을까. 내가 오만하여 독선적이었는가. 아니면 저들이 구제불능의 인사들인 것인가. 알 수 없구나. 일모도원(日暮途遠)!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먼데 날은 벌써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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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8호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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