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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왕의 결단⑲ 세종의 허조 중용-반대파 곁에 두고 독단을 경계하다 

세종의 대부분 정책에 반대한 허조를 영의정·이조판서에 앉혀 




몇 년 전에 『Team of Rivals(국내명:권력의 조건)』라는 책이 화제가 됐다. 링컨이 자신의 최대 정적인 윌리엄 슈어드, 새먼 체이스, 에드워드 베이츠를 내각에 등용하여 어떻게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토록 만들었고, 그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헌신을 받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보며 많은 사람이 링컨의 리더십을 예찬했다. 하지만 외국의 리더에 감탄하기 이전에, 우리에게도 그러한 지도자가 있었음을 기억할 만하다.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박은, 황희, 조말생, 맹사성, 최만리 등 자신에게 반대했거나, 자신의 생각에 반대할 사람들을 요직에 등용해 임무를 맡겼다. 이 중 박은은 세종의 장인을 죽이는데 앞장선 ‘중전의 원수’였으며, 황희는 세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귀양을 간 정적이기도 했다. 세종의 반대파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허조이다.

허조는 “어릴 적부터 체격이 깎은 듯이 여위고 파리하며, 어깨와 등이 굽어 ‘여윈 매’라고 불렸고”(필원잡기),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이 앉아 책을 읽느라, 방 안에 도둑이 들었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을”(정암집) 정도였다고 한다. 융통성 없는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였던 허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허조는 고집불통이다”

허조는 세종대에 이조판서, 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세종이 추진한 정책들의 대부분에 반대했고, 찬성했던 일들조차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동의할 때에 홀로 반론을 펼쳤고, 어느 정도 결론이 났다 싶은 사안에 대해서도 끝까지 의문을 제기하니, 그 집요함에 지친 세종은 “허조는 정말 고집불통이다”(세종15.10.23)라고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기까지 한다.

허조는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법전을 이두로 번역하여 나눠주라는 세종의 지시에 대해 “백성들이 법에 대해 잘 알게 되면 법망을 교묘히 피하고 제 멋대로 법을 가지고 노는 무리들이 생겨날 것입니다”라며 반대했고(세종14.11.7), 신문고 운용 문제에서도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조건과 절차를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담당 고을이나 관청에서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무조건 다 임금에게 가져와서 해결하려 들 것이 뻔하다고 했다.

또 무고 등 사사로운 목적에서 신문고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며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는 세종의 명령에 맞섰다(세종14.11.3).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의 폐지를 두고도 허조는 세종과 논쟁을 벌였다. 백성이 고을 수령의 과오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했을지라도 그 수령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한 ‘부민고소금지법’은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도리·질서를 중요시하는 유교윤리에 기반을 둔 법이다.

지금의 관점에서야 수령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백성이 당연히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고을 수령을 부모와 동격으로 여겼던 당시의 윤리관념상 백성이 자신의 고을 수령을 고발하는 것은 흡사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일부 수령들이 이 법을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많아지자, 세종은 ‘백성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정치하는 도리이겠느냐’(세종13.6.20)며 이 법을 폐지하고자 하였는데, 허조가 반발한다.

허조는 이 법을 폐지하게 된다면 사회기강이 흔들릴 뿐 아니라, 고소가 남발되어 수령이 업무에 집중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문제는 백성이 고발을 할 수 있게 하고 그 문제를 나라에서 반드시 처리해주되, 고발당한 수령의 죄는 원칙적으로 묻지 않으며 다만 고의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왜곡한 경우에 한해서 처벌하는 것으로 접점을 찾게 된다(세종15.10.24).

이상의 사례를 통해 허조는 얼핏 세종의 개혁정책을 무조건 반대하는 수구적인 인물로 보여진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세종에 비해 고리타분한 원칙이나 내세우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허조가 기존 질서의 유지를 중시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세종이 추진하는 새로운 정책이나 개혁 작업 자체를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개혁 자체에 대한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정책이 급격하게 추진될 경우 생겨날 수 있는 폐단들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 도입되는 정책과 제도의 단점과 문제점을 제기하고,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까지 집요하게 지적함으로써 앞으로 초래될지도 모를 피해를 선제적으로 예방하고 정책의 완결성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욱이 허조는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았다. 부민고소금지법이 폐지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소신이 반대하였지만 전하의 허락을 끝내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다만 이만큼 보완하고 수정하시었으니 이젠 시행해도 문제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세종15.10.24)라고 말한다. 법 자체의 취지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법이 가진 문제점들이 극복되었으니 시행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흔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옳다고 믿는 것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신문고 규제나 부민고소금지법 폐지 문제는 ‘사회질서와 기강을 지켜야 한다’와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두 옳음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고민이었다. 이 때 리더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신과 가치를 보다 잘 구현할 수 있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하며 이에 따라 세종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옳음과 옳음이 부딪힐 때는 어느 한쪽이 전부 아니면 전무가 되는 것이 아님에도 선택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로지 한쪽으로만 편중되어 가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선택되지 않은 다른 ‘옳음’의 가치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리더에게 자각시켜주는 역할이 필요한데, 바로 여기에 허조의 존재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강력한 반대자가 존재해야 리더는 자신의 판단력에 의문을 던지게 되게 마련이다. 반대와 만나야 집단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문제점은 없는지, 보완할 점은 없는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세종이 때론 질책하고 때론 답답해하고 때론 ‘고집불통’이라며 불평을 하였지만, 허조를 계속 요직에 두고서 그와의 논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허조의 반대를 통해 정책은 더욱 튼튼해지고 정치는 더욱 건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반대자 있어야 정책 견고해져

IBM의 창업자 토머스 왓슨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뭐가 사실인지를 말하는 반항적이고 고집 센, 거의 참을 수 없는 타입의 사람들을 항상 고대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많고 우리에게 이들을 참아낼 인내가 있다면 그 기업에 한계란 없을 것이다.” 반대자로서의 임무를 기꺼이 자임한 허조도 훌륭하지만 그의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실행에 옮긴 세종, ‘위대한 세종의 시대’를 만든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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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호 (201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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