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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 위기에 처한 5개 산유국 - ‘바니르(VANIR-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신)의 저주?’ 석유 부자의 눈물 

베네수엘라(Venezuela)·알제리(Algeria)·나이지리아(Nigeria)·이란(Iran)·러시아(Russia) 고비용 생산구조, 취약한 재정으로 흔들 


▎배럴당 100달러 대를 유지했던 국제 유가가 2014년 7월 이후 급락하기 시작해 2015년 1월 초 배럴당 40달러 대에 진입했다.
국제 유가의 추락이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배럴당 50달러 선이 무너졌다. 2월 인도분 WTI(서부텍사스유) 가격이 1월 6일 배럴당 47.93달러로 떨어진 것. 연초 첫 개장 이후 3일 동안만 무려 9.7%나 하락했다. WTI가 50달러 아래로 떨어진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 이후 5년 9개월 만이다.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도 50달러 선이 위태롭다. 유가 급락 소식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 등과 맞물려 전 세계 금융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다우존스 지수는 300포인트 넘게 떨어지며 최근 석 달 중 낙폭이 가장 컸고, 유럽 역시 파리 증시가 3.3% 급락하는 등 주요국 모두 크게 하락했다. 한국·일본 등 아시아 증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네수엘라가 가장 큰 타격


최근의 유가 하락이 단순히 수급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저성장 기조에 따른 수요 감소 때문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분위기다. 단기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업계에선 ‘배럴당 20달러 대까지 떨어질 것’이란 최악의 전망까지 나온다. 이에 따라 산유국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게 됐다. 기름 팔아 먹고 사는 나라들의 처지는 대개 비슷하지만 그중에서도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곳이 있다. 대부분 원유 생산비용이 비싸거나, 국가 재정 상황이 좋지 않는 나라다. 베네수엘라(Venezuela)·알제리(Algeria)·나이지리아(Nigeria)·이란(Iran)·러시아(Russia)가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따 모아보니 ‘바니르(VANIR)’다. 바니르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신’이다. 취약한 산업 구조에도 넘치는 천연자원 덕분에 나름 경제를 지탱해왔지만 유가가 1년 만에 절반 이상으로 떨어지면서 당장 디폴트(채무불이행)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국제 유가가 떨어지면 모든 석유 수출국이 타격을 받지만 정도엔 차이가 있다. 주요 산유국이 균형 재정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유가를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란은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가 되야 재정 수지를 맞출 수 있다. 그 이하면 계속 재정 적자란 얘기다. 알제리와 베네수엘라도 121달러가 되야 균형 재정을 달성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는 각각 93.5달러, 60.5달러만 되도 재정 적자를 피할 수 있다. 원유의 생산비용, 원유 수출 의존도, 국가별 경제력 격차 등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여러 면을 고려했을 때 가장 걱정스러운 곳은 베네수엘라다. 베네수엘라는 11월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감산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원유가 전체 수출의 96%를 차지하는 베네수엘라로서는 유가 급락만은 막고 싶었을 터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국내총생산(GDP)이 세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 중인데다 높은 인플레이션이 부담을 키우고 있다. 2014년 11월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64%로 껑충 뛰었고, 화장지 등 생필품 수입이 줄어 품귀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달러 강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소비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로서는 사실상 인플레를 잡을 방법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닥을 드러낸 외환보유액도 걱정이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에 통화뿐 아니라 다이아몬드나 기타 금속 등을 추가하는 강수를 던졌지만 불안을 해소할 정도는 아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일단 디폴트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금융시장의 시선은 반대다. 베네수엘라의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금리는 지난 12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12월 10일 하루 동안에만 832bp(1bp=0.01%) 폭등해 4019.57bp를 기록했다. 1월 초 3400대로 내려오긴 했어도 여전히 위험하다. CDS 금리는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로 수치가 클수록 국가 부도에 대비하는 비용이 비싸다는 의미다.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투자 부적격인 ‘CCC’로 세 단계나 강등했다.

다급해진 베네수엘라는 다시 중국에 손을 벌렸다.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7월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문 때 원유 상환을 조건으로 40억 달러(약 4조 4000억원)을 빌린 바 있다. 새해 첫 방문지로 중국을 택한 마두로 대통령은 1월 8일 시 주석을 만나 양국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를 통해 2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이끌어 냈고, 기존 차관 만기 연장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중국이 얼마를 더 지원하든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유가가 어느 정도 회복되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다고 봐야 한다.

이란도 빈약한 외환보유액에 불안


이란 역시 빈약한 외환보유액이 발목을 잡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감산에 합의하지 않고 버티기에 돌입한 것은 탄탄한 외환보유액 때문이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고 미국과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차원이다. 이란은 처지가 다르다. 고유가 기간 동안 쌓아둔 사우디의 외환보유액은 약 7500억 달러(약 825조원)에 달하지만 이란의 외환보유액은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00억 달러 수준이다. 유가 하락에 따라 리얄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지만 마땅한 대처 방안이 없는 것도 문제다. 외환보유액으로 가치 하락을 일정 부분 막을 수 있지만 서방 경제 제재로 은행 자산이 동결된 상황에서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어떻게든 제재를 풀어야 숨통이 트인다. 이란의 올해 상반기(이란력 3월 21일~9월20일) 실질 GDP 성장률은 2년 만에 반등해 4.0%를 기록했다. 40%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을 10%대로 낮춘 것이 효과를 봤지만 서방의 경제 제재가 2014년 1월부터 일부 해제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경제난을 완전히 타개하려면 제재를 완전히 풀어야 하고, 그러려면 미국·유럽과 진행 중인 핵협상을 타결해야 한다. 중도개혁 성향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국민투표 카드까지 꺼내며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보수파가 장악한 의회의 벽을 넘어서긴 쉽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 역시 경제축이 통째로 흔들릴 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교롭게도 베네수엘라·이란·러시아는 미국과 정치·외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나라들이다. 2014년 초 우크라이나 사태 때만해도 강력한 러시아를 천명하며 파워를 과시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추락하는 경제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 러시아는 석유 및 천연가스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8%에 이르고, 이 수입으로 국가 재정의 50%를 메운다. 유가 하락에 증산으로 대응했지만 유가 하락이 계속되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 관련 산업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제조업 기반이 없다.

지난 7월 미국과 EU는 러시아의 금융, 에너지, 국방 기업들에 대해 자본 조달을 금지하는 등 경제 제재 수위를 강화했다. 유가 하락과 맞물리며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에서 올해 재정수지·무역수지 적자 확대는 불가피해 보인다. 불안감이 커지면 해외 자본 유출 속도도 더욱 가팔라지고, 금융시장이 더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대외 채무도 부담이다. 러시아가 올해 말까지 상환해야 할 총 외채 규모는 약 1583억 달러(원리금)다. 경제 제재 이후 자본 조달 여건이 90일 만기에서 30일 만기로 강화되자 러시아 기업 및 은행은 상당한 상환 압력을 받고 있다. 2013년 대비 2014년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5분의 1가량 감소했다. 유동성 문제가 커지면 1998년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다. 1998년 사태의 출발점 역시 유가 하락이었다.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이중고 겪는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치고 아프리카 최대 경제국으로 부상했던 나이지리아는 1위 자리를 1년 만에 다시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나이지리아의 GDP는 2013년 5100억 달러(약 560조원)를 기록해 3720억 달러(약 410조원)인 남아공을 넘어섰다. 세계 순위도 26위로 올랐다. 하지만 재정의 대부분을 원유 수출에 의존(수출의 75%, 재정 수입의 85%)하는 탓에 최근 정부가 계획한 대규모 국책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인구(1억 7362만명)를 보유한 나이지리아는 2000년 대 초부터 원유 수출로 들어온 돈을 정부가 인프라 분야에 집중 투자해 빠르게 성장해왔다. 덕분에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예외적으로 중산층 성장 속도가 빨랐고, 도시화율도 크게 높아 졌다.

지금도 나이지리아에선 철도·수도 등 인프라 구축 사업이 활발하다. 지난해 11월 중국 국유 중국철도건축총공사(CRCC)가 120억 달러(약 13조원)에 따낸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원유 수출에 따른 재정 수입을 전제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정부가 직접 주도하고, 정부 재정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돈줄이 막히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고질적인 정치·사회 불안정도 발목을 잡는다. 2011년 대통령선거 직후의 극심한 혼란은 다소 진정됐지만 북부 지역 출신들의 불만이 여전히 잠재돼 있고, 정부와 야당의 갈등도 계속되는 중이다. 인종·종교 간의 분쟁도 심각하다. 250여 개의 종족으로 구성된 나이지리아는 종교적으로도 북부 이슬람과 남부 기독교로 양분돼 크고 작은 유혈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 원유 수출에 따른 이익은 사회 각 계층과 집단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왔다. 일종의 당근 정책으로 돈을 풀어 갈등을 차단해왔는데 이 돈이 줄면 사회적 동요가 거세질 수 있다. 실제로 과거 나이지리아에서는 저유가로 후원 자금이 끊기면서 쿠데타가 발생한 적이 있다.

나이지리아·알제리는 대규모 국책사업 중단 위기

주요 산업 대부분을 정부가 주도하는 알제리도 마찬가지다. 알제리 전체 일자리 중 무려 60%가 정부 국책 사업과 관련된 공공 일자리다. 유가 하락 부담이 커지면서 알제리는 올해 공공부문 일자리를 동결하고, 2015년 발주키로 했던 대형 건설 프로젝트도 속도를 조절할 계획이다.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최근 긴축 조치를 시사한 바 있는데 저유가 상태가 지속되면 지하철, 고속도로, 해수 담수화 등의 공공사업도 차질을 피하기 어렵다.

알제리는 1986년 유가 하락으로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으로 반정부 소요 사태를 겪은 바 있다. 비교적 외환보유액이 탄탄하고, 인플레이션 관리도 잘 되고 있는 편이지만 공공사업 지연은 일자리와 직결돼 있는 만큼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유세프 유스피 알제리 석유장관은 지난해 12월 OPEC 회원국들에게 감산을 통해 지난 6개월 동안 추락한 국제 유가를 올리자고 촉구했다. 이를 위해 올해 6월 이전에 OPEC 긴급회의를 개최하자는 주장하고 있지만 사우디·쿠웨이트와 입장이 달라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 장원석 기자 ubiquitous83@joongang.co.kr

1269호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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